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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성칼럼] 여수의 밤 /이숙희

테오리아2 2013. 1. 18.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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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항(美港) 여수에서 ‘수필의 날’ 행사가 열렸다. 지구촌을 달구었던 런던올림픽과 여수세계박람회가 대막을 내린 뒤였다.
올해 열두번째 맞는 수필의 날은 조선 영조 때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를 기행하면서 쓴 열하일기 중의 ‘일신수필(馹迅隨筆)’ 집필일을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매년 이 날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필가들이 지역과 소속 문학회를 벗어나 한 자리에 모여 교류와 화합을 다진다. 올해 대구에서는 열 명의 수필가들이 참석했다.
천혜의 자연을 배경으로 지어진 여수세계박람회장은 초대형 국제행사라는 위상에 걸맞게 압도적인 규모였다. 820만명이라는 인파가 몰려 남도를 후끈하게 달구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건만 우리를 맞는 엑스포장은 철 지난 바다 같았다. 인적은 드물었고, 그저 사람이 밟고 지나 다녔을 구조물만 부표처럼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화려한 공연이 끝난 뒤 텅 빈 객석같은 적막과 쓸쓸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수필의 날 행사장에는 전국에서 모인 작가들로 화기애애했다. 수필가들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손을 잡거나 가벼운 포옹을 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막상 행사가 시작되고 앞자리를 살펴보니 수필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정도로 필생을 수필에 헌신했던 몇몇 원로작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몇 년 사이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부재가 가슴에 와 닿았다. 이심전심으로 가까이 앉은 작가 사이에서 먼저 가신 분들의 행적을 되새기고 추모하는 말이 오고갔다.
덩달아 앞자리에 앉은 원로 작가들을 보는 마음도 애잔해졌다. 지금까지 수필문단을 주도해오면서 그토록 위풍당당했던 분들인데 쇠잔해진 몸과 기력 없는 어깨가 안쓰러웠다. 문학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젊음을 송두리째 투신해 치열하게 글밭을 일구신 분이 아닌가.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가 짙듯, 화려하고 찬란한 문학 활동으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인 원로작가들의 뒷모습이 깊은 음영을 드리웠다.
‘수필은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펼치는 사랑의 향연이자 언어의 축제이며, 먼 훗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온전한 향기로 살아있기를 소망한다’는 것이 수필의 날 선언문이다. 수필가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만든 선언문이 원로작가 앞에 숙연하게 느껴진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작가들은 어둠살이 내리는 바닷가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만남의 시간이 깊어갈수록 자주 뵈었거나 초면이거나 함께 앉은 작가 모두가 오래된 지우(知友)나 다름없어진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서 의미를 발견해 글을 쓰고 공감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대화의 꽃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히 피어낼 수 있었다.
수평선에서 힘겹게 달려왔을 바람에 어느새 가을 냄새가 났다. 가을은 수확과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뜨겁고 강렬한 것들이 식어가는 계절이기도 하다. 충만함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가을에는 좋은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며 마음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중국의 석학 임어당은 청담론(淸談論)에서 ‘벗과의 하룻밤 청담(淸談)은 10년간의 독서보다 낫다’고 했다. 올림픽의 함성도 엑스포의 부산함도 이제 다 지났다. 자꾸만 야위어 가는 세월의 뒷등이 쓸쓸하게 하지만, 밤이 늦도록 함께 청담을 나누는 글벗이 있어 여수의 밤이 아름다웠다.

이숙희 수필가·계간 수필세계 발행인

 
출처 : 수필세계
글쓴이 : 최해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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