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 경보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더위를 피해 인근 공원으로 나갔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옆에 남자 서넛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얼큰하게 취한 얼굴에 요즘 한창인 올림픽이 안주였다. 호쾌한 웃음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우리 선수의 위대함에 모두 동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화제가 정치로 바뀌자 분위기도 바뀌었다. 둘만 모여도 찢어지는 게 우리나라 정치라고 하더니 차츰 말이 거칠어졌다. 대선후보자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면서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싶더니 결국 술판은 깨졌다. 화를 삭이지 못해 붉으락푸르락 하던 남자가 비틀비틀 걸어가더니 승용차를 몰고 휑하니 사라졌다. 현직 경찰 간부가 술이 취해 도로 한복판에 정차한 채 잠이 들어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사건은 과도한 경쟁 사회가 술을 마시게 하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술은 승진도 물거품으로 만들고 가족까지 불행하게 한다.
비틀거리며 사라져가는 사내의 승용차를 보며 얼마 전, 아들의 방을 치우다 빈 소주병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겹쳐졌다. 평소에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 아들이라 마음이 더 아팠다. 청년실업의 고통과 쓰라림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술을 통하여 위로를 받으려 했을까.
부채질을 하며 곁에 앉은 남편도 방금 차를 몰고 사라진 남자가 신경이 쓰이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달콤한 술의 유혹 뒤에는 악마의 미소가 숨어있다.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한 언행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술이 사람을 부리는 증거라 하겠다. 특히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을 때 악마는 스스럼없이 그 사람을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 술을 마시고 힘든 현실을 잊고 싶겠지만 달콤함을 선사한 술은 찰나에 엄청난 후유증을 선사하는 법이니 즐기기는 하되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어느 날 한낮이 되어갈 무렵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골목이 시끄러웠다. 대문 밖에서 보니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승용차 운전석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남자는 어젯밤 늦게 들어와서 차 속에서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아내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사색이 되어 연신 차문을 두드리며 소리쳐 남자를 불렀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119구조대원이 겨우 차문을 열었다. 차 안에서 후끈한 열기와 술 냄새가 쏟아져 왔다. 맥없이 늘어지는 사내를 구조대원이 잡고 흔들어 깨웠다. 아무 반응이 없는 이순(耳順)쯤의 남자는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옮겨지고 중년 여인과 청년은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남자는 볼 때마다 술에 취해 있었다. 어떻게 운전을 했나 싶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며 골목길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다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부축해 들어가는 그 가족의 눈빛은 그야말로 애처로웠다. 가장이 술을 마시는 동안 그를 기다리는 가족들은 피 말리는 기도를 했구나 싶었다. 술이 있는 세상은 재밌는 지옥이라면 술이 없는 세상은 지루한 천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애주가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천국을 오가는 동안, 기다리는 가족들은 지옥을 오가는 것이다.
혹자는 요즘 취하지 않은 제정신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술이 한순간 위로가 될지는 몰라도 해결사는 아니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술은 어김없이 깨기 마련이고, 깨어나 보면 술의 흔적은 그리 유쾌하지가 않다. 우스갯소리로 술의 으뜸은 입술이라고 한다. 성냥을 그으면 화르르 불이 붙는 독주 같은 날씨에 가족의 입술이 피워내는 웃음꽃이야말로 가장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최고의 화주(花酒)가 아니겠는가.
이숙희 수필가·계간 수필세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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