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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쪽 -최호일

테오리아2 2015. 12. 9.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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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쪽

                                                최호일

 

 

 

 

  세상의 가장 안쪽을 보여주려는 듯 미개한 부족의 언어처럼 보이지 않는 곳의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모든 빛의 옷자락이 제 모습을 감추고 몸을 형광펜으로 칠한 사람들이 그 소리를 소리 없이 듣고 있다

  어둠을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뼈처럼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밤이 오고  

 

  평생을 죽고 있다가 들킨 사람의 표정으로

  몸이 살 밖으로 빠져나온다

 

                                             시집 <바나나의 웃음> 74쪽 . 문예중앙 간.

 

   시는 은밀한 '안쪽'의 열매다. 아코디언처럼 펼칠 주름이 많지만, 다 펼쳐서 보여주려 하진 않는다. 대부분의 시는 열어서 보려는 독자의 노력이 필요하고, 다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와해되어버리는 시와, 더러 이제껏 보이지 않는 새로운 주름을 마련하는 놀라운 시들도 있다. 어쨌거나 시인이 말하려는 '안쪽'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바깥'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이때의 바깥은 물상이 간직한 그냥 바깥은 아니다. 꾸려진 시의 세계가 정의하는 안쪽의 바깥이다. 모든 시에는 이런 일종의 시적 내부 규율들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안쪽'은 시인이 상정한 어느 한 지점인 것이다. 일반론으로 풀어내면 시가 늘 왜곡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왜곡도 완전한 왜곡만은 아니다. 시의 놀라운 능력 중의 한 가지는 오독의 과정을 통해 외연을 확장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외연은 다시 내연을 낳고.

  목적지를 향한 시의 걸음새가 눙을 치며 멀리 휘돌아 '귀뚜라미'를  지나도 위 시에선 행간의 넓이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려 낯선, 매혹이 되어버리는 수사적 기법을 관통한다. 그렇더라도 안쪽은 역시 사람의 어떤 지점, 장소가 아닌 마음의 지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눈여겨보기로 하자. 어설프게 말해서 거긴 육체로 드러나는 정신이랄까. 그래야 '들킨 사람의 표정'이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

  시가 어려워질 땐 멀리 밀어놓고 볼 일이다. 밀어놓기가 쉽지 않을 땐 꾸밈말을 제거하고,  

 

     세상의 가장 안쪽을 보여주려는 듯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처럼 담담히 읽어도 된다. 이때 말하려는 바는 명확해진다. 의미의 꿰기가 가능하다면, 그 다음은 고저강약의 정도를 뭉쳐놓은 꾸밈말을 다시 합하고 노래의 어깨를 빌어 즐거이 넘어갈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채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가지 않으므로 얻는 것도 없다. 그저 세상 시의 일부만 읽고 이 세상의 시를 말할 뿐이다.

   그냥 허공에 쏜 화살은 없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청개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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