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모두 그 병원에 가야 한다고, 자기는 병원 갈 날만 기다린다고. 도대체 그 명의는 병을 어떻게 고쳤을까? 새로운 명의가 나타난 것일까?"
쓰지 않고 몸에 좋은 약
“글쎄 할머니, 누가 모르나? 의사들은 하기 좋은 말로 살 빼야 산다, 자꾸 걸어라 그러는데요, 이 다리로 어떻게 걷냐구요?”
5~6년 전 단골병원 심장초음파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자리의 50대로 보이는 아낙이 스스럼없이 종아리를 걷어 보이며 처음보는 내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검지로 꾹꾹 눌러 보이는 그녀의 다리는 손자국이 움푹움푹 들어갔다. 머리는 희끗한 자그만 체구의 노파가 동그마니 앉아 있으니 자신의 큰 몸집이 조금은 창피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안됐다. 어쩌다 저 모양이 됐나, 진작에 관리 좀 잘하지.’ 속으로 뇌이며, “무릎 관절이 안 좋으신가 보네요.” 이 한마디로 답답해하는 마음을 위로해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나는 저리되지 말아야지, 저렇게 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지, 수영도 더 열심히해서 지금처럼 건강을 지켜야지.’ 내심 굳게 다짐을 했다.
삶이 어디 마음대로 살아지나? 그 몇 년 후, 나는 그만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잘 걷지 못하게 되었다. 신체 중 어느 한곳이 나빠지면 그걸로 그치지 않고 전신 악순환으로 이어져 합병증이 오기 마련이다. 투병 과정에서, 우선 코앞에 닥친 불을 끄느라 영양섭취부터하여 기운 차리고, 비만 되면 다음에 다이어트 하지, 그랬다. 그런데 웬걸……?
문득, 그때 초음파실 앞에서 통사정하듯 사연을 늘어놓던 그 여인이 연상된다. 나는 지금 그 대기실에 앉아있다. “어쩌죠? 조금 아파도 참으셔야겠네요. 나이 드시면 체중조절 힘드시죠?” 내 가슴에 프로브(검사기기의 한 부분)를 조심스럽게 문지르고 있는 검사자를 올려다보니 흐린 조명 아래지만 또렷한 이마가 돋보이는 풋풋한 얼굴이다. 검사 과정이 어찌나 아프던지, 모로 누워 겨드랑이 쪽에 프로브를 밀착시키고 문지를 때는 너무 아팠다. 가슴살이 두꺼워 심장이 잘 안 보여 어쩔 수 없다니 참는 수밖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러다 갈비뼈가 상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겨우겨우 마쳤지만 진땀이 났다. 환한 불빛에 드러난 젊은 의사의 이마도 촉촉하게 젖어있는 게 보였다. 갑자기 나는 죄인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끝까지 환자의 고통만을 배려해 검사시간이 지연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정성을 다해준 그가 참으로 고마웠다. 비만으로 이런 고통까지 겪게 될 줄이야! 그동안 여러 번 검사를 했어도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 돌이켜보니 70평생 일정한 체중을 유지하며 그래도 건강하게 살았구나, 하는 자긍심도 들었다.
며칠 뒤 정기검진날, 나는 숙제 못해온 학생처럼 잔뜩 주눅 들어 의사와 눈도 못 맞추고 앉아 있었다. “지난번보다 더 살찌셨네요. 그 탄수화물 줄이시라니까요!” 지긋한 의사는 청진기를 들이대며 일갈一喝을 한다. 양손 지팡이 짚은 날 보고 차마 걸으란 말은 안 했다. 물론 오랫동안 자신이 관리해온 환자다 보니 스스럼없이 건네는 충고라 여길 수도 있다. 무뚝뚝한 말투에 풀이 팍 죽는다. 지난번엔, “체중조절 힘드시죠? 좀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살갑게 이야기하여 미안하고 부끄러웠는데 오늘은 쓴소리를 한다. 걱정 말고 잘 지내라는 애정어린 격려라도 받는 날은 금세 병이 다 나은 느낌이 든다. 이런 만남일 때는 진료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참 가볍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그날따라 희색이 만연했다. 그 아프던 다리가 감쪽같이 나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의사 칭찬에 침이 마른다. 친구들 모두 그 병원에 가야 한다고, 자기는 병원 갈 날만 기다린다고. 도대체 그 명의는 병을 어떻게 고쳤을까? 새로운 명의가 나타난 것일까?
그의 의사에 대한 자랑은 이랬다. 의사는 우선 여기가 결리네 저기가 쑤시네 하는 자기의 푸념을 성의껏 들어주고 맞장구도 잘 쳐주어 막힌 속을 절반이나마 풀어준다. 가까이 앉아 손도 잡아주고 어깨도 쓰다듬고 무릎도 만져준다. 마치 피붙이처럼 다정하게, 십년지기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치료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병원과 달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만 아프던 다리의 통증이 확연하게 줄었단다.
물론 그 회복의 기미는 일시적일 수도 있다. 우리 몸에 일어나는 모든 병은 마음의 병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 마음의 행로에 따라 병이 낫기도 한다. 많은 종교에서 보여주는 기사起死와 이적異蹟의 예도 결국 그런것이 아닐까.
바쁘고 힘든 의사들이다. 만날 아픈 사람들만 상대하다보면 환자의 고통에 대해 저절로 시큰둥해지고 무디어질 것이다. 종합병원 의사일수록 예약된 환자는 많고 진료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환자의 고달픈 심정을 다독여 줄 여유가 없을 것이다.
환자들은 단 몇 분의 진료를 받기 위해 몇 시간을 마다않고 아프고 지친 몸을 이끌고 병원에 온다. 의사의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가 주저앉았던 환자도 일어서게 한다. 병원 문지방만 넘으면 터질 듯 아팠던 머리도 개운해진다는 환자도 있다. 어쨌거나 친구의 의사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밥 반 술을 덜 먹으려고 덜어 놨다 다시 떠왔다 하며 칼로리와 전쟁을 하고 있다. 기초체력 유지량을 섭취 못하면 뒷머리가 당기고 어지러워 견디기 힘들다. 특히 고령자의 경우는 심각한 부작용이 올 수 있다고도 한다. 저녁밥 한술 더 먹은 다음날은 용서 없이 체중계의 한 눈금이 더 돌아간다. 대신 머리는 덜 무겁다. 이 노릇을 어쩌랴! 다이어트,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절감한다. 야금야금 밀고 들어와 요지부동으로 아랫목을 차지한 불청객에게 따가운 눈총을 주면서 그와 똑같이 내게 쏟아질 의사의 눈총을 걱정하며 ‘몸에 좋은 약은 쓰다.’라고 언짢았던 마음을 추스른다.
그래도 다리가 퉁퉁 부은 환자에게 살을 빼기 위해 ‘무조건 걸어라’ 하지는 말았으면, 나무만 보지 말고 숲도 살피며 몸에 좋은 약도 쓰지않게 처방해주었으면, 인술을 기대해 본다.
윤묘희 --------------------------------------------------------
1993, 1994년 MBC 드라마 전원일기 집필.
≪한국수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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