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겁 없이 펜을 잡아 보았습니다. 서론은 어떻게 펼치고 끝은 어떻게 맺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동안 그림이 잘 안 잡힐 때는 무딘 제 손끝을 탓하기에 앞서 글이 부족하다고 자만을 떨기도 했죠. 타인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뒤늦게 절감하게 되었지요. 막상 제가 그 힘든 길에 들어섰다.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러나 쓰고 또 쓰고 혼신을 다해 쓸 것을 약속드립니다."
차 한잔하자 - 이철원
신입사원 후배는 잔뜩 긴장된 얼굴로 앉아 있다. 곧추세운 허리에 연신 좌우를 살핀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가고, 교육 내용을 설명하면 수험생처럼 아주 진지해진다. 언론사 입사의 바늘구멍을 통과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새롭게 시작되는 ‘적응훈련’이라는 또 하나의 험준한 코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문득 까마득한 나의 새내기 시절 첫 출근 때 일이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제일 바쁜 마감 시간 바로 전이어서 사무실에 들어와 앉아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다. 정신없이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총성 없는 전쟁터 같았다.
“저~, 이번에 입사한 이철원입니다.”
“바쁘니까 조금 이따 소개하자고!”
잔뜩 치켜든 눈으로 모니터만 응시하던 담당 데스크의 툭 던지는 한마디였다.
업무가 일단락되는 마감 시간이 30분 정도 지나자, 바로 위 선배의 안내로 부서마다 인사를 다녔다. 희끗한 머리칼의 경제부장, 또 희끗한 머리칼의 사회부장, 희끗한 머리칼…… 또, 부장……. 이상하게도 신문사 부장들의 머리칼은 사규社規인지, 아니면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인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흰 머리에 뿔테안경까지 비슷했다. 돌아서면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사람이 이 사람 같았다. 한동안은 나이가 많아 보이건 적어 보이건,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눈만 마주치면 무조건 접이식 핸드폰 인사를 하였다.
신입인 내 책상은 ‘깨끗하다’를 넘어 광채까지 나던 기억이 생생하다. 새로 산 컴퓨터는 손만 대도 스르륵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아 신바람이 났다. 이제 본격적인 직장생활이 시작됐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이 행복은 작디작은 내 책상 위에서 뿐, 익혀야 하는 회사 업무에, 내부 원고는 어디서 어떻게 넘어오는지, 그림은 또 어디로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감 시간은 칼이다! 못 지키면 해당 지면은 하얗게 나가는 거다!”
선배의 교육은 매서웠다. 작은 눈은 더 크게 떠야 했고 귀는 머리통보다 더 커야 했다. 선배의 한마디 한마디를 신처럼 받들어야 했다.
긴장의 연속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나는 악몽을 꾸는 날이 허다했다. 회사에서 큰 실수를 저질러 울상이 되어 깨어나곤 하였다. 그렇게 비몽사몽의 한 달이 되어갈 무렵, 기어이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 관련된 기사의 간단한 삽화를 그리는 작업이었는데, 그림에 삽입되는 짧은 단어인 ‘연예인’을 ‘연애인’이라 쓰고 아무 생각 없이 문제작을 그대로 넘겼다. 최종 신문까지 인쇄돼 버렸다.
“연애만 하냐? 네 눈에는 뭐든 연애로만 보이냐?”
신문을 코앞에 들이대며 내지르는 담당데스크 ○차장의 호통에 나는 아찔 현기증이 났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목이 잠겨 말이 잘 안 나왔다. ‘이게 바로 나의 일터구나, 혼쭐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낡은 구두코 위에 뚝 떨어졌다.
마우스 잡은 손이 쥐난 것처럼 뻣뻣했다. 작업을 시작하는 게 두려웠다. 대책 없이 허둥대는 내게 그 무서운 ○차장이 다가왔다. 채찍이 무서웠으니 당근밥을 사주겠다며 쭈뼛거리는 나를 근처 식당으로 데려갔다. 반찬 세 가지면 진수성찬이던 자취생 입이 모처럼 호사하던 날이다. 염치없게도 추가 밥 한 공기 더 비웠던 것 같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식곤증이 밀려왔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볕에 그만 병든 닭처럼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옆자리의 딸깍거리는 마우스 소리는 어릴 적 엄마 무릎에서 듣던 자장가처럼 도리어 편안했다.
“야, 너 조는 거냐?”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신입사원 교육을 하던 ○차장은 송충이 눈썹 아미를 잔뜩 찌푸리며 날 째려봤다. 확, 잠이 달아났다. 정신이 얼떨떨해서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차 한잔하자!”
교육을 마친 ○차장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복도 맨 끝에 있는 자판기까지의 거리가 평소보다 세 배는 길었다. ‘연애인’ 일로 또 혼이 날까? 교육시간에 졸아서 야단맞을까? 똑바로 서 있을 용기조차 안 나 눈치만 살피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묵직한 저음의 ○차장 음성이 정적을 깨기 시작했다.
20년 전 신입 시절 당신의 경험담과, 전에는 자신의 몸매가 날렵했다는 얘기를 할 때는 한 톤이 올라가기도 했다. 두둑한 그의 뱃살 콤플렉스 커버담談으로 들려 속웃음도 나왔다. 어떤 모델을 좋아 한다는 둥, LP판을 즐겨 듣는다는 둥, 시시콜콜한 대화에 끌려 어느새 나는 추임새까지 넣으며 빠져들었다. 종이컵의 커피가 말라갈 즈음 ○차장의 음성이 더 굵어지고 낮아졌다.
“처음이라 실수도 할 수 있는 거다. 차츰 익숙해진다. 언젠가는 니가 그 자리에 없으면 안 되는 일도 생길 거다. 그때가 되면 너도 네 후배 다그치지 말고 잘 위로해 줘라!”
자판기 앞에서 멀어져가는 ○차장의 뒷모습을 보며 그 의중意中을 헤아려 마음속에 깊숙이 담았다.
혼날 줄 알고 잔뜩 겁먹었는데 질책 아닌 격려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졌다. 그날 이후 출정식出征式 같던 출근길도 편안해졌고 회사 생활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무섭기만 하던 상사는 후배를 다독일 줄도 안다는 분위기를 알게 되었고, 야박해 보이던 동료들도 서로 양보할 줄도 아는 지기知己라는 걸 느끼게 되어 갈 때쯤, 나는 같은 공간에서 같이 호흡하는 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술자리에서는 형, 아우로 변해 속내까지 풀어놓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10여 년이 지난 오늘, 그때 선배들처럼 나도 눈 돌림 틈 없이 업무에만 파묻혀 ‘딸깍딸깍’ 마우스를 휘두르며 그림을 그려대고 있다. 그날의 내 모습을 꼭 닮은 후배가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다. 긴장된 옆모습이 그때의 내 얼굴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후배를 보니 얼마 전 정년으로 퇴임한, 내 천川자가 깊게 팬 대선배의 얼굴이 나의 얼굴에 겹쳐 보이기도 한다.
“차 한잔할까?”
뜨악해 쳐다보던 후배가 엉거주춤 따라나선다. 이 친구도 전에 나처럼 자판기까지의 거리가 멀게 느껴질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철원 ----------------------------------------------
서울 출생. 단국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일러스트레이터. 현 조선일보 편집국 편집디자인팀 차장.
당선소감
직장에서 제가 하는 일은 남이 써온 글에 그림을 넣는 일입니다. 글 속의 주인공과 제가 그린 그림이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 무척 행복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멋진 에세이 한 편 읽다 보면 불쑥 나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일었습니다.
정말 겁 없이 펜을 잡아 보았습니다. 서론은 어떻게 펼치고 끝은 어떻게 맺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동안 그림이 잘 안 잡힐 때는 무딘 제 손끝을 탓하기에 앞서 글이 부족하다고 자만을 떨기도 했죠. 타인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뒤늦게 절감하게 되었지요. 막상 제가 그 힘든 길에 들어섰다.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러나 쓰고 또 쓰고 혼신을 다해 쓸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족한 글 반열班列에 올려주신 심사위원님과 주위 분들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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