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스크랩] 맷돌 / 유경환

테오리아2 2013. 11. 1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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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

 

참으로 오래 잊고 있었던 맷돌을 온양 민속박물관에서 다시 보았다. 그런데 그냥 지나쳐 갈 수가 없었다. 숭숭 구멍이 난 회색 곰보돌에는 옛날이 박혀 있었다.

화산지대 수성암을 쪼아 맷돌을 만든 것이 대부분이나, 옛날 우리집에 있던 맷돌처럼 화강암 석질의 것도 섞여 있다.

밑돌이나 윗돌이나 그 한가운데서 원심력 방향으로 골을 만들어, 그 틈으로 낟알이 들어가서 갈리도록 된 구도이다. 그것은 회색 곰보 맷돌과는 달리 아주 무거웠다.

여름이면 대청마루에서 이 맷돌을 돌렸다. 돌담 위로 넘어오는 바람이 마루를 지나 활짝 제껴진 뒤꼍 문으로 빠지기 때문에 그렇게 더위에 시달렸던 기억은 없다.

어머니는 별미로 콩비지나 순두부를 만들 땐 힘이 드는 내색을 전혀 않으셨다. 별미를 차리는 것이 어머니에겐 그때 작은 즐거움이었을 테니까.

나도 어머니와 마주앉아 맷돌을 돌렸다. 물에 불은 콩을 한 주걱씩 떠 넣으면 뽀오얀 콩비지가 옆으로 새어나왔다. 꼭 무슨 기름물감의 유화(油畵)처럼.

그래 불린 콩을 맷돌 구멍에 퍼넣는 일이 재미있어, 이 몫을 도맡아 한 적도 있었다. 이런 일에 열심이면 마주앉은 쪽에서 어머니는 넌지시 대견한 눈길을 내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나서는 사정이 아주 달라졌다. 맷돌질이 싫어진 것이다. 꼬박 석 달을 버티는 동안 쌀은 떨어지고 감자나 고구마, 호박 같은 풋것까지 귀해졌다.

어머니는 간직해 온 옷가지를 한 벌씩 내주고, 어디서 오는 사람인지 그들에게서 호밀을 받았다. 검고 갸름 걀죽한 호밀.

이 호밀을 맷돌에다 갈아서 지겨운 날들을 보내며 검은 수제비로 끼니를 이어 살아 나갔다.

그때부터 맷돌만 보면 어깨가 아파 왔다. 맷돌질은 정말 힘에 겹고 지겨운 일이다. 마루에서 맷돌 소리가 나면 한숨부터 쉬면서 책을 덮고 일어서야 했다. 어머니 혼자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다 게으름을 피면서 문틈으로 내다보면, 어머닌 왼쪽 주먹으로 오른쪽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맷돌을 돌리고 있으니 어찌 모르는 척할 수가 있었으랴.

검은 호밀의 껍질이 부서져 하얀 속살이 가루로 바서져 내르는 것은 아픔이었다. 하지만 민속박물관의 맷돌들이 내게 불러 일으켜 준 회상은 그것만이 아니다.

짧은 팔로 어머니와 마주앉아 맷돌을 돌리자면 온몸 운동이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토록 가깝게 마주한 채 하염없이 세월을 휘감아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모시 적삼 속의 어머니 앞가슴도 곁눈으로 볼 수 있었고, 숨결이 일렁이는 어머니의 어깨와 목덜미까지 찬찬히 살펴볼 수 있던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어머니의 귀밑머리가 자꾸 흘러내리기 시작하면 어머니도 힘에 겨워하시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나로서는 어머니의 힘듦을 덜어드린다는 뜻으로 뻔히 다 아는 옛날 이야기를 조르기도 했다. 흥부놀부 이야기, 심청이 이야기. 또 장화홍련전 같은 이야기들. 어머니는 유성기판을 돌리듯이 그런 이야기를 맷돌에서 풀어냈다.

맷돌 손잡이가 어머니 가슴 쪽으로 돌아갈 땐 키 작은 내 윗몸을 앞으로 내밀어야만 했는데, 그때 어머니의 콧등에 돋은 땀방울을 훔쳐드린 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해드린 '효'라는 것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나보다 앞서 태어나 자란 형제보다 어머니를 더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어머니와 마주앉아 맷돌질한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지겹고 지루한 맷돌갈기가 아니라 정(情)을 감는 일이었다. 혼자서라도 맷돌을 돌려 그때 어머니와 함께 했던 세월을 다시 살고 싶다.

맷돌은 우리들의 팔힘만으로 천천히 돌았지만 어떤 낟알도 그냥 흘려 내보내지 않았다. 아무리 단단하게 여물고 바짝 마른 낟알이어도, 한 번 무거운 맷돌 밑을 지나 나오면 부드러운 가루로 변했다.

뻔한 이치인데도 마냥 신비스럽게 여긴 것도 철 늦은 나이 탓이었을까. 뒷날 자라면서 원심력과 구심력에 따른 윈리임을 배우게 되지만, 그때엔 조금도 흥미롭지가 않았다.

오늘날 육중한 맷돌이 서로 위아래로 맞물려, 삼킨 낟알을 빠짐없이 가루로 분쇄하는 것을 생각하면, 투박한 맷돌의 맞물림에 소름이 돋기도 한다.

세상일의 그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천천히 도는 것 같지만 빠짐없이 바스러뜨린다. 그리고 그 비명을 상상하고 몸을 떨어 본다. 녹두를 갈아 녹두부침이라도 만들어 못하는 술이라도 한잔 기울여 볼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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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행단문학
글쓴이 : 손진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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