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자 기
책보라는 말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책가방이라 하겠다. 그전에는 시골 학생들로서 가방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개 책을 보자기에다 싸 가지고 학교엘 다녔다. 남자는 책보를 오른쪽 어깨에서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등 뒤에다 걸머지고, 여자는 한팔로 얌전히 받쳐들고 다녔다. 간혹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도 했다. 그것은 서당(書堂)에 다니는 사람들이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던 습관에서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시골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거의 가방들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그 가방에 문제가 있다. 요새는 학교 급별(級別)이 높아질수록 교과서 외에 참고서와 학습보조자료의 부피가 두꺼워져서 그것만으로도 몹시 무거운데, 가방 자체의 무게가 가중(加重)되어 중고등학교의 남녀 학생들의 어깨는 거의 한쪽이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국민학교에서는 등에 지는 가방을 권장하고 있지만 철저하지가 못하다.
보자기는 그 자체의 중량은 거의 문제시되지 않을 만큼 가볍고, 어떠한 형태의 것이라도 쌀 수 있어 편리하다. 가방은 그 내부의 공간이 제한되어 있는 데 비해 보자기는 능소능대(能小能大)한 포용력(包容力)을 지니고 있다. 바다는 잔 시냇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여 그렇게 크다는 말과 같이, 보자기는 둥근 것, 모난 것, 긴 것, 짧은 것, 두꺼운 것, 얇은 것, 못 생긴 것, 잘 생긴 것 등을 가릴 것 없이 무엇이나 쌀 수 있다.
보자기는 하늘처럼 넓은 마음같기도 하다. 병아리를 품안에 품고 있는 어미닭같이,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모든 것을 꾸려가는 어머니의 마음같이 넓다.
오질꼬질하고 잡스러운 것도 보자기로 탁 덮어 놓으면 아주 정연하고 마음이 가라앉게 된다. 어머니의 마음도 이처럼 넓게 모든 것을 감싸고, 그 밑바닥에는 저리고 괴로운 온갖 갈등이 있을지라도 아무일 없는 듯이 잔잔한 바다의 수면(水面)과도 같은 것이다.
보자기는 때로는 아낙네의 머리쓰개가 되고, 앞치마도 된다. 그런가 하면 땅 위에 살짝 펴서 그 위에 앉을 수 있는 자리나 깔개 노릇도 한다.
귀를 맞추어 물건을 두루루 말아 가운데를 질끈 동이고, 양쪽 귀에 끈을 잇대어 가운데 매끼에 동여매어 짊어지고 나서면 묏산(山)자 모양의 괴나리 봇짐이 된다. 가붓한 차림의 길손들에겐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복(韓服)에 어울리는 것이요, 양복에는 손가방이 더 어울리는 것은 조화(調和)의 미(美)에서라고나 할까.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20여 년을 근속하다 이미 정년 퇴임하신 K교수는 손에 가방을 드신 적이 한번도 없었다. 늘 보자기에 책을 싸 가지고 다니셨다. 다만 그 보자기가 매우 고급이어서 그것만 보아도 마음이 가라앉고 아취(雅趣)가 풍기었다. 또 모 신문의 논설위원을 하고 있는 Y씨도 보자기의 애용자다. 그는 각종 스크랩북, 서적, 팜프렛, 그날의 신문 등 사설(社說) 자료가 될만한 것은 휘뚜루 이 보자기에 싼다. 보자기도 수수한 데다가 되는 대로 묶어 매우 실질적인 느낌이 풍긴다.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하는 것을 이야기보를 터뜨린다고 한다. 여러 가지 재미나고 구수한 이야기 자료를 사설 자료 보따리처럼 가슴 속에 꾸려 두었다가 하나하난 펼쳐내기 때문이다.
보자기는 필요한 것도 싸지만 보기 싫은 것, 보이기 싫은 것을 가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과수댁한테 보자기를 씌워 뒤로 업고 도망을 했다고 한다. 일종의 약탈혼이다. 이때의 보자기는 피차의 체면을 가림으로써 정당화시킨 것이라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도둑도 그 체면 때문에 얼굴을 보자기로 가리는 것이리라.
한때 혼례식장 선물용으로 보자기가 날개 돋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무슨 행사의 기념으로 보자기를 내는 일이 있다.
그림이나 글씨까지 곁들인 품위 있는 보자기는 앞으로도 우아미(優雅美)를 가지고 그 간편하고, 무한대한 포용성을 두고두고 발휘할 것이다. (197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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