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도 배불뚝이 옹기는 까만 눈을 뜨고 있었다. 옹기점 창고에 가득하던 어둠과 사뭇 달라서일까? 그 옛날 장독대는 사방이 훤하고 바람이 잘 다니는 곳에 있었다. 독은 아낙네의 발걸음이 잦은 곳에 있어 늘 살뜰한 간수를 받는 물건이었다. 나는 그것이 미안해서 부른 배를 하고 있는 이 물건을 베란다 한 쪽 구석을 제쳐 두고 거실에다 들여놓았다. 커다란 몸집에 비해 요란스레 튀는 모양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파트 거실에서는 맹맹하게 겉돌 것 같던 물건이 보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넉넉하고 부른 품새가 은근히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수더분하면서도 맵시를 잃지 않는 그에게서 나는 내 묵은 시간들을 조금씩 끄집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기껏해야 올망졸망한 몇 개의 항아리가 고작인 나는 늘 독이 없다는 핑계로 장 담그기를 하지 않고 지내 왔다. 그러나 점점 해가 갈수록 장 담그기는 내게 포기할 수 없는 일이 되어갔다. 그것은 장독을 유난스레 건사하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고 또 먼 훗날 내 아이에게도 남겨 주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다. 독은 어쩌면 어머니를 떠올리는 나만의 회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독을 사기 위해 들른 재래시장의 옹기점은 외진 자리로 한참 밀려나 있었다. 이미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졌는지 녹슨 철문이 조금은 스산했다. 커다란 항아리와 작은 단지가 옹기종기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옹기점 마당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져 고즈넉하다 못해 쓸쓸한 느낌마저 주었다. 꼭 제 품만큼의 햇살을 퍼 담아 놓고 있는 옹기 너머로 만추의 햇살이 제법 낙낙했다.
칠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옹기장수 노인은 단단히 작심하고 들어선 내 눈치를 읽었는지 잰 걸음으로 나를 맞았다. 뜸하게 들어선 손님이 반가운지 굵게 골이 팬 주름 사이로 노인의 눈이 빛났다. 흐트러짐 없는 눈빛이 다소 고집스러워 보였다.
무엇을 구하러 왔는지 쉬 재촉하지 않는 노인의 배려에 푸근해진 나는 마당을 돌아 허름한 창고까지 구경하기로 했다. 닳아서 헐렁해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뒤로 길게 빠진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다. 깊숙이 해가 들지 않아 어두운 그 곳은 갖가지 질그릇과 오지그릇에 옹배기, 철물까지 사람의 손길이 오랫동안 가지 않아 보이는 물건들이 버려진 듯 채워져 있었다. 한창때 팔다 남은 물건이라고 말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허허로웠지만 내 묵은 감성들은 바쁘게 깨어났다. 이 참에 평생 품을 독 하나 사겠다는 생각은 잠시 잊은 채 나는 덤으로 얻은 구경거리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지난 시절의 살림살이가 지금은 장식품쯤으로 바뀌고 나서야 겨우 세간의 관심을 모은다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노인의 눈길에는 애틋함이 비쳤다.
나의 관심이 반가웠을까? 노인이 벽에 붙은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벽에 붙은 작은 열쇠를 보지 못했다면 그 곳은 그냥 희끄무레한 페인트를 칠한 벽이었다. "요즈음 사람들이 제대로 된 독을 볼 줄 알는지……." 노인은 말끝을 흐렸지만 내 호기심은 이미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투박하고 거친 노인의 손이 녹슨 자물쇠고리를 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았음인지 자물쇠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노인의 손등 위로 솟아오른 힘줄이 마른 살갗 아래 더욱 두드러져서 마치 빛 바랜 보물지도에 그려진 길처럼 구불거렸다. 돌아선 노인의 등이 마당 구석진 자리에 놓여 있던 빈 독처럼 허전해 보였다. 영 풀릴 것 같지 않던 녹슨 고리가 벗겨지자 창고 안의 어둠이 몰려 나왔다. 컴컴하던 창고 안은 적당히 습하고 눅눅했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서늘함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으로 든 햇빛에 항아리들이 채 걷어내지 못한 어둠에 잠겨 있어 꿈을 꾸는 듯해 보였다. 그 곳은 노인의 보물창고였다. 나는 노인의 보물이 그리고 부식되지 않은 세월이 이 벽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보았다.
어둠을 걷어낸 창고 안은 정물화 속의 구도처럼 독과 노인을 적절하게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노인은 커다란 몸집을 하고 웅크린 독들 사이에서 오히려 자유롭게 보였다. 나는 마치 사진기의 조리개를 통해 보듯 노인의 다음 구도를 기다렸다. 이윽고 노인은 허리를 굽혀 익숙한 솜씨로 하나의 독을 기울여서 천천히 돌려 보고 있었다. 배부른 독은 노인의 마른 팔에 매달린 채 부드럽게 돌아누웠다. 손으로 직접 빚었다는 그 배가 부르고 아래위가 좁은 독은 단번에 내 눈에 찼다. 유약의 흘림이 목선을 따라 그대로 남아 있고 튕겨서 나는 쇳소리는 되받아 치듯 단단하고 맑았다. 주둥이의 꺼칠함까지도 넉넉히 품고 있는 자태가 내 어릴 적 어머니가 장독대를 들며 나며 살뜰히 여기던 바로 그 독과 흡사했다. 여닫을 때 커다란 독과 넓적한 뚜껑의 마찰음이 내는 독특한 울림까지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짜릿한 전율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 살뜰한 주인이 떠나 버린 장독대에는 독마다 가득 된장이 익어 가고 있었다. 한참 후에 나는 그 독 속에서 익어 가고 있는 것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해 된장은 왜 그런지 유난히도 달고 맛있었다. 그 후 나는 늘 어머니의 장맛이 그리울 때마다 독을 함께 떠올리고는 했다.
옛날, 독을 지고 골목을 누볐다는 옹기장수 노인은 집집마다 나는 된장냄새로 그 독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제대로 빚어진 독의 숨구멍은 잡스러운 냄새를 걸러내고 사철 적당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깊고 변함없는 맛을 지닐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말을 하는 노인의 눈에 미련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그림자가 스쳤다.
독은 지금 빈 몸으로 우리 집 거실에 있다. 쓰고 떫은맛을 삭히고 또 삭혀서 내는 단맛을 독은 꿈꾸는지도 모른다. 나도 슬며시 내 안에서 보듬고 삭혀서 천천히 익혀 가야 할 설익은 꿈들을 독에 담아 본다. 그리하여 온갖 잡냄새를 다 걸러 내고 나서야 비로소 군내 나지 않는 내 삶을 마주할 날들을 기다린다.
'그룹명 > 수필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손 / 계용묵 (0) | 2013.11.14 |
---|---|
[스크랩] 걸 레 / 송복련 (0) | 2013.11.14 |
[스크랩] 시저리 꽃 / 이경수 (0) | 2013.11.14 |
[스크랩] 맷돌 / 유경환 (0) | 2013.11.14 |
[스크랩] 총총 / 주자청 (0) | 2013.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