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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 / 김 종

테오리아2 2013. 7. 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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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 / 김 종(金鐘)

 

 달을 바라본다. 달이라면 둥근 달이거나 반달이거나 눈썹달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달을 바라보면 그저 마음이 달같이 밝아지고 고와지기 때문이다.

 비록 어수선하고 복잡한 현실에서 하루를 버둥거리다가도 막상 밤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보면 마음은 도든 것을 잊어버리고 한없이 숭고해지고 밝아진다. 이 얼마나 고마운 자연의 혜택인가.

 자연이 베푸는 은혜는 비단 달에 한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달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는 달이 베푸는 은혜가 크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이처럼 달은 우리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풀고 또 우리는 그 은혜 속에서 밝고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달이란 것은 흙과 모래와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구의 위성, 즉 죽은 땅에 불과한 것이다.

 그 옛날, 이태백이가 놀았고 또 옥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서 떡방아를 찧었다는 달이 아니라 이젠 메마르고 헐벗어버린 달이 된 것은 사실이다. 과학이 지나치게 발달됨에 따라서, 우리가 여름밤 모깃불을 피워놓고 듣던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무한한 상상과 아름다움을 간직해 왔던 달이, 그만 일시에 허물어진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달이 변한 것은 아니다. 수십만 년, 아니 수십억 년 전부터 달은 그대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해 온 것이다.

 다만 우리들의 눈으로 보기에 마치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고, 그 계수나무 아래서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상들이 여름날 마당에 평상이나 삿자리를 깔아 놓고 달을 쳐다보면서 온갖 아름다운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들려 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우리 조상들이 달을 좋아했고 달처럼 맑고 곱게 살기를 원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 준 아름다운 이야기와 꿈을 결부시켜 달을 바라볼 때마다 막연하나마 가슴 설레도록 옥토끼와 계수나무 그리고 떡방아 같은 것을 상상해 왔는데, 인간이 달에 갔다 온 후부터, 그런 상상과 꿈은 산산히 깨어지고 말았다.

 하기야 일찍부터 달에는 생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인간이 달에 직접 내려 보지 않은 다음에야 그 어떤 생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항상 우리의 가슴 밑바닥에 잠재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인간의 확인’은 비록 과학 분야에서는 개가를 올렸다손치더라도 우리의 ‘꿈의 세계’에서는 아니감만 못한 결손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달을 바라볼 때 마마다 그런 과학적이 배경을 생각하면서 보지는 않는다. 그저 훤히 하늘 가운데 흐르는 달을 보면 마음이 밝아지고 흐뭇해지고 말기 때문에 그런 과학적인 것은 사실상 달을 좋아하는 이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올 때, 차창에 어리는 달이라든지, 밤중 낙엽소리에 밖으로 나왔다가 문득 우러러보는 달, 그리고 한없이 서러운 사연을 가누지 못해 바닷가나 산으로 올랐다가 바라보는 달 등등은 또한 우리의 마음에 따뜻한 위안의 손길을 베풀어 준다.

 서러운 이에게는 온정의 손길을, 괴로운 이에게는 평안의 손길을, 그리고 행복한 이에게는 충만과 자애의 손길을 베풀어 준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며 믿음직한 자연의 벗인가.

 우리는 때때로 외롭고 슬프고 또 어둡고 괴로운 경우를 겪는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에게서 실망을 했다손치더라도 자연만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아니한다.

 달이 그렇고 별이 그렇고 나무와 풀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간혹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자연의 혜택을 전연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산다’는 각박한 문제로 인해 하늘에 흐르는 달이 언제 떠서 언제 지는지 아니면 어떻게 변해가는지조차 모르고 지낸다. 더군다나 하늘에 뜨는 달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보는 관점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바둑을 처음 배우는 사람의 눈에는 밥상의 밥그릇이라든지 천장의 무늬, 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들의 머리까지 바둑돌로 보이는 것과 같이 이들에게는 달이 동전으로 둔갑해 보이는 것이다.

 하늘에는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달이 있으되, 그것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 비한다면 하늘 높이 걸린 달을 보고 감사와 은혜와 축복의 미소를 느끼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다행한 족속인가.

 반공에 유유히 흐르는 달, 때로는 구름 사이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이윽고 탁 트이듯이 웃음을 벙긋벙긋 머금고 나오는 달을 보면 모든 근심 걱정이 일시에 눈 녹듯 사라진다. 마치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듯 그저 흐뭇하고 그저 좋아지게 마련인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달의 무한한 축복 속에 미소 짓고 하루의 피곤을 씻는다.

 달은 나의 것인 동시에 또 너의 것이다. 도든 인류가 같이 공유하는 고마운 벗이요 자연의 선물인 것이다.

 헌데, 한 때 미국과 소련이 제각기 자기 나라 국기를 달에다 꽂아두고, 자기 나라 것인 양 으스댄 일이 있었다.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지구에서 사십여 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지구의 위성을 제아무리 자기 나라 영토로 만들었다손 치더라도 우리들이 바라보는 그 누구의 달도 아니며 만인 공유의 달인 것이다. 너도 주인이요 나도 주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강대국이 과학으로 달을 짓밟는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들 마음속에 살고 있는 달만은 짓밟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고 있는 달, 비록 과학이 짓밟고 간 죽은 달이긴 하나, 우리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체온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아름다운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작법 해설)

필자가 이 작품을 비평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 작품의 문장법이 ‘나’의 시점(視點)에서 탈출하여 ‘우리’의 시점으로 넓혀간 시점 확장 · 변화에 있다. 이 작품에는 ‘나는…’이 한 번도 안 나온다. ‘나의 것인 동시에 또 너의 것’의 ‘나’는 ‘나’라고 지칭하는 불특정 다수를 의미한다. 기존의 수필의 신변잡기적 글쓰기의 대표적인 사례는 천의 수필가가 천편일률적으로 ‘나’ 시점의 글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시점 탈출이 이 작품의 <鳥자 치킴>이다.

출처 : 장대명화張大明華
글쓴이 : 장대명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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