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수(繡)를 놓으며 / 김은주
검은 흑 미(米) 강정에 흰 잣으로 꽃수를 놓는다. 바탕은 검고 꽃은 흰색이니 제법 모양이 난다. 꽃술 안에다 지난해 지리산 산행에서 채취한 노란 산국 하나를 올리니 제법 살아있는 꽃의 모양새를 가진다. 한 입 베어 물때 마다 쌉싸름한 산국 냄새가 입 안에 가득 고인다. 노란 치자 강정에는 검은 콩이 어울린다. 밝은 치자 물에 까만 콩을 올려놓으면 보리쌀 단지 안의 쥐 눈처럼 맑고 선명하다. 살구 색 백련초 강정에는 푸른 호박씨와 구기자가 어울린다. 연분홍 바탕에 붉은 구기자 꽃잎과 호박씨 꽃받침을 놓으면 강정위에 금방 한 떨기 꽃이 피어난다. 수수나 조에는 오미자 꽃을 만들고 흰깨나 검정깨에는 잣이나 땅콩을 박는다. 엿물을 따끈히 중탕해 데워 놓고 긴 나무젓가락에 엿물을 묻혀 강정에다 바르고 하나씩 꽃수를 놓다가 보면 만사가 다 고요해지고 마음이 밝아져 온다.
강정을 하려면 우선 고두밥을 쪄야 한다. 찹쌀을 하룻밤 푹 불려 다음날 면 보를 깔고 찐다. 찐 고두밥을 돗자리에 얇게 펴 말린다. 따끈한 온돌방에 몇 날이고 몸을 지져 밥알이 꼬들해지면 서로 붙은 밥알을 아기 달래듯 살살 떼 줘야한다. 이때 잘 떼야 밥알이 부서지지 않고 부스러기도 나지 않는다. 오래 잘 말릴수록 튀밥이 곱고 크게 인다. 얼추 고두밥이 말랐다 싶으면 볶아야 한다. 튀기는 기계에 튀겨도 되지만 그럼 고소한맛이 없다. 고운 꽃소금을 얼기미에 내려 불에 달군다. 소금위에 손바닥을 펼쳐보고 따끈하게 달았을 때 어른 밥술만큼씩 떠 넣고 고두밥을 볶아 낸다. 고두밥은 이미 달은 꽃소금에 닿자마자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벙근다. 초를 다투며 튀는 쌀알을 얼기미에 붓고 소금은 다시 솥으로 위에 남은 튀밥은 강정을 만드는 것이다.
볶는 시간이 지난하게 느껴지지만 나는 은근히 이일을 즐긴다. 따끈한 불 앞에서 한참을 볶고 나면 내 볼도 복사꽃처럼 달아오른다. 그즈음 쌀엿을 녹인다. 뜨거운 물에 중탕을 한다. 굳은 쌀엿이 어지간히 녹았다 싶으면 각종 효소를 준비 한다. 치자. 백련초, 쑥, 오가피, 석류, 매실, 솔잎 일 년 내내 제 철에 난 식품을 그때그때 갈무리 해뒀다 쓰는 것이다. 흰 튀밥에 각종 효소가 들어가면 제 각각 빛깔을 낸다. 치자는 치자대로 쑥은 쑥대로 천연의 색깔을 내며 튀밥에 고르게 물든다. 흠뻑 색깔 물을 마신 튀밥은 버무려 놓은 모습만으로도 아름답다. 튀밥을 쌀엿에 묻힐 때는 손끝에서 바람 소리가 나야한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적당히 잘 이용해 되도록 손을 빨리 움직여야 강정이 바삭하고 맛있다. 한시라도 그 호흡을 늦추면 강정이 질고 쳐진다. 음식은 귀로 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손끝에 감각으로 한다. 스스로 해 봄으로서 터지는 물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어지간히 굳었다 싶으면 긴 자를 대고 자른다. 자르는 일도 큰일이다. 너무 무르거나 굳어지기 전에 빨리 잘라야 곱게 잘려진다. 무를 때 자르면 칼에 달라붙고 너무 굳어지면 부서진다. 칼끝을 자에 바짝 붙이고 자르지 않으면 자꾸 엇박자로 나가기 일쑤다. 곡식의 알갱이가 칼끝에 미끄러져 그런 것이다. 가지런히 정 사각으로 자르는 일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사각, 세모, 별 모양으로 잘라 소쿠리 가득 식혀 둔다. 찬바람에 어느 정도 굳어졌다 싶을 때 꽃수를 놓는 것이다.
바늘로 한 땀씩 뜨는 것만 수(繡)가 아니다. 사각의 강정을 앞에다 놓고 뜨거운 물엿을 발라 엿이 마르기 전에 그 위에다 씨앗으로 수를 놓다가 보면 한 땀씩 바늘로 여백을 메워가는 수 못지않게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음식을 만들 때는 이 음식을 먹을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음식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성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예(禮)를 다해 정성을 쏟을 때만 제 맛을 내는 것이 음식이기도 하다. 음식의 성질 중에 참으로 희한한 것은 오랜 시간을 투자하거나 만드는 과정이 복잡할수록 그 음식 맛이 좋다는 것이다. 급하고 쉽게 이루어지는 음식은 빨리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을 수 있으나 정성이라는 감미료가 빠져서 그런지 근기가 없어 뵌다. 세상도 급하게 돌아가다 느림으로 발걸음을 고친지 오래다. 천천히 정성을 다한 음식이 대접 받는 시절이 된 것이다.
꽃수를 다 놓은 강정을 비닐에 싸 대소쿠리에 담는다. 고운 한지를 올려 그 위를 덮고 근 보름동안 음식을 준비하며 들인 정성도 함께 올린다. 전통주 명인에게로 떡 달인에게도 한 상자씩 보내고 나니 그 분들의 화답이 화려하다. 제사상에 올리라며 가양주와 꽃 떡을 보내오셨다. 그분들의 정성이 내 마음에 또다시 꽃수를 놓는다. 오간 것은 단지 음식뿐인데 서로의 마음 안에 튀밥처럼 고운 꽃들이 피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음식장만이 끝나고 나면 몸이 불어난 달그림자 마당 안에 그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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