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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밥집 두 번째 이야기/대구일보 에세이마당 1.24

테오리아2 2014. 3. 24.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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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집 두 번째 이야기

-이상(理想)의 문-

 

이상렬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 루이스는 자신의 또 다른 책 ‘순전한 기독교’ 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나 기쁨이나 평안이나 이런 것들은 신(神)이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주는 상품 이 아니다. 이것은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분수의 물보라 같은 것이다. 촉촉해지기를 원한다면 물 가까이에 가야 한다. 따뜻해지기를 원한다면 불 가까이에 가야 한다.’

 

 겨울 빛이 짙다. 이미 추위에 이골 난 서민들에게 이깟 날씨가 무슨 대수겠는가. 깊숙이 파고드는 마음속 칼바람만 할까. 고달픈 현실 앞에서 잔뜩 움츠러든, 오들오들 떠는 이들과 따스한 불가를 찾아가 머물라면 바로 이곳이고 싶다.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끼리 한 끼 해결하기 좋은 곳, 국밥집이다.

 

 단골 국밥집,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향의 느티나무처럼 항시 그곳에 계신 주인 할머니, 아무 말 없이 눈빛인사가 오간다. 왁자지껄한 세상에서의 고독한 수다보다 더 깊다. 늘 그 자리에 앉았다. 투박하지만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 순수한 손으로 뚝배기를 툭 내어 놓는다. 국밥을 받아 놓고서 선뜻 수저를 들지 못한다. 뽀얀 국물 속으로 생각 하나가 잠긴다. 그릇 속의 잔잔한 파장에 초췌한 얼굴이 흐려졌다 뚜렷해졌다 한다. 함께 갔던 지인 중 한 명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왔지만 멋쩍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낮에 걸려온 전화 한통, 빚을 갚으라는 말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거린다. 하늘에 마음을 내어주고 살면서 금전관계를 절연해야하는 성직의 길을 걷는다고 하지만, 작은 개척 교회를 이끌다보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홀로 감당해야할 경제적인 현실 앞에서 무력해질 때가 있다. 발은 땅을 딛고 있으면서 시선은 천상에 두고 산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국밥집이라도 찾지 않으면 내 오후가 욱신거릴 것 같아서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마치 집의 대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 안쪽은 이상(理想), 바깥은 현실이다. 이 긴장상태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다. 특히 내 경우는 신앙이라는 이상과 치열하게 생존해야하는 현실 사이에 놓여 있다. 당연한 장면이다. 성(聖)과 속(俗)의 장소적 경계는 없다. 종교의 사원 안에서도 얼마든지 속(俗)될 수 있고, 속인들이 모여 사는 세상 속에서도 성(聖)스러울 수 있다. 속세를 떠난다는 것의 의미는 세상을 도피하여 은둔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기보다 각박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성스럽게 사느냐가 결정한다. 번잡한 세상살이를 떠나 구도자가 되는 것보다 매순간 마음 곱게 먹고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수행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상과 현실 앞에서의 인간적인 고뇌는 차라리 애처로운 용기였노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다.

 

 피땀 흘려 먹고 살고자 애쓰는 세인들의 노력을 헛되다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밥을 귀하게 여기면 삶도 거룩해지나 보다. 결핍이 많을수록 이상(理想)의 힘은 세다. 살짝 계산대 앞으로 가서 국밥 값을 냈다. 주머니가 헐렁한 사람의 작은 베풂보다 갑절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 여기다. 허나, 눈치들이 백단이다. 일행들이 계산대로 우루루 따라 나와 저마다 돈을 내 주머니에 푹푹 쑤셔 넣는다. 받은 돈을 확인해보니 국밥 값을 제하고도 팔천 원이 남았다. 주인 할머니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목사 양반, 횡재했구먼.” 그렇다. 단출하지만 포근한 횡재다. 이러한 꿈의 계산법은 국밥집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오늘만큼은 이상(理想)에 무게 중심을 두고 싶다. 누군가 다가와서 “이 삭막한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따뜻한 곳으로 갑시다.” 현실이 아무리 시리고 차갑더라도 이상은 여전히 따뜻하다. 냉랭하고 멋없는 성공보다 결핍이 정겨운 곳, 가슴 뜨거운 곳에 머물고 싶다. 인간미 촉촉한 곳으로 가고 싶다.

 

 국밥 한 그릇에 뱃심이 두둑하다. 삐걱거리는 이상(理想)의 문을 열었다. 또 다시 눈앞에 놓여있는 거센 현실과 맞장을 떠야 할 것 같다. 국밥집 지붕 위에 떠있는 달이 오늘따라 참 따뜻해 보인다.

 

 

대구일보/에세이마당(2014.1.24)

 

출처 : 이상렬의 선물
글쓴이 : 선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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