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이다.
이상렬
차라리 발설하지 말았어야 했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언어 하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나를 격동시킨다. 마구 부서진 생각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박혀 중심을 흩어 놓았다. 마음의 미궁에 빠져 허둥거리다가 숨이라도 쉬어야 했기에 본능적으로 찾은 곳이 방이다.
“당신은 실패자야!”
이 말은 방에 이르기 전, 지인으로부터 날아온 언어의 파편이다. 귓가에 생생하게 남겨진 말은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이명처럼 윙윙거리고 있었다.
나는 작은 교회의 목사이자 무명작가이다. 볕이라도 고르게 내려야 겨우 지붕 끄트머리라도 보이는 곳에서 소박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더불어 지낸다. 희뿌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중년의 나이에 내세울 만한 빛나는 이력도, 또 이루어 놓은 자랑할 만한 결실도 없어 보였나 보다. 그저 무 꽁다리만한 자존심하나 붙들고 살아온 내 생애가 그의 눈에는 가난한 삶을 전전하는 가엾은 실패한 자로 보였을 게다.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내 체취를 은은히 머금은 온기가 나와서 나를 맞이한다. 숱한 날 나와 함께 고뇌하며 밤을 지새웠던 책상, 낡았지만 묵묵함으로 내게 늘 쉼을 주었던 의자, 순금처럼 쏟아지는 은은한 스탠드 불빛, 나와 함께 사색의 밤을 보냈던 책장의 책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이 내 지친 안색을 살핀 후, 일제히 말을 걸어온다.
이곳 심연의 안식처에서 내 모든 비밀을 기꺼이 털어놓는다. 심히 아팠노라고, 내가 격정의 세상에서 또 실패했었고, 송곳 같은 말이 내 가슴을 찔러 몹시 고통스러웠노라고. 순간, 방안에 있는 나의 분신과 같은 동행들은 무너진 나를 다독여 준다. 어느덧 격렬했던 마음의 격랑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설 ‘비밀의 화원’ 에서 주인공 메리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정원을 가꾼다. 난생처음 사랑을 주고받는다. 그 대상은 꽃과 나무다. 곧 새들이 깃든다. 소중한 친구들도 만난다. 그곳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고 내적 고요를 실천한다. 메리가 그 비밀의 정원에서 고요 중에 머물며 내면의 치유를 경험했던 시간, 곧 내게는 방에 들어오는 시간이다. 바짝 마른 건초처럼 탈진한 내 영혼이 푸른 시냇가의 싱싱한 나무들같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맞보게 되는 순간이다. 무릇 내 방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깊다.
내 안에도 방이 또 하나있다. 곧 ‘마음’ 이다. 마음의 방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내가 사나운 짐승이 되기도 하고, 또 그것을 길들이는 조련사가 되기도 한다. 나를 실패자라고 먼저 전쟁을 선포한 자에게 온갖 포악한 언어의 무기를 발사하여 그의 내면을 초토화 시켜 버릴 수도 있다. 허나, 마음에는 사납게 날뛰는 홍수와 같은 흥분을 부드럽게 잠재우는 기능이 있다. 심지어 바위덩어리 같이 굳은 마음을 깨워서 춤을 추게 할 수도 있다.
내 마음이 괜찮으면 다 괜찮다. 산다는 것,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다 경험한다는 말이 아닐까. 그러니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것인가. 외부의 힘에 의해 나의 행복과 불행이 판가름 난다면, 자유로이 생각할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서 얼마나 억울한가. 누가 생각마저 통제할 것인가. 시작은 내 안에서 부터다. 바깥이 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을 결정한다.
그렇다. 살다보면 어두운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진 골 깊은 아픔을 경험한다. 이것은 우리의 가슴속에 수천의 주름을 드리우고 있는 비밀스러운 커튼에 살짝 나 있는 틈새기와 같다. 내가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바깥에서의 자극이라기보다 내 마음의 방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도 내 내면에서다. 마음속의 넘치는 행복이 있다면 모자란 곳에 흘러 보내고, 결핍과 미완이 있다면 내 마음의 깊은 방으로 부터 보충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가 내게 뱉은 ‘실패자’ 란 말은 틀리지 않았다. 또 살다보면 그런 류의 말들을 듣지 않고는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말에 내가 속절없이 무너질 수도 있고, 그것을 디딤돌 삼아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여겨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그 선택은 내 마음의 정원에서 결정한다. 그러하듯 가시가 무서워서 생선을 먹지 못한다면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생선을 입에 넣고 뼈를 뱉어 내는 힘을 길러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방문을 열고 세상으로 발을 딛는다. 거울에 설핏 비친 내 얼굴을 보니 비장함이 서려 있다. 곧 부딪힐 현실의 무서운 짐승과 싸울 만반의 준비 태세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돌아와 편안한 안식을 취할 본향 같은 이곳 비밀의 틀이 있으니, 든든한 보험하나 들어놓은 셈이다. 내겐 이렇게 진저리치게 아름다운 성찰의 방이 하나 있다. 그러니 어찌 절망만을 말하겠는가.
이제 낡고 헌 마음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세상만사를 그러려니 바라보는 것도 괜찮겠거니, 숨 막히도록 바싹 죄어서 몰아치는 삶의 시시비비 따위에 괜스레 나를 부추기지 않기로 했다.
“당신은 실패자야”
이젠 이런 맹독성 언어로는 나를 꺾을 수 없으리라. 바로 이곳에서 진정한 나를 만나 회복의 자리에 이를 수 있으니, 방에서 새겨놓은 정갈한 마음으로 장차 맞이할 세상 모진 바람서리에도 끄떡없길 바랄뿐이다. 놀고먹겠다는 나태함만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각진 세파에 맞설 뱃심 두둑한 용기로 인생을 살아 내리라. 이제 이렇게 당당히 승리선언을 하고 싶다.
다시 시작이다!
국가보훈처 웹진 2014년 1월호/이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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