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과 신념(信念) / 신현식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다시 본다. 고등학생 때 보았지만 꼭 다시 보고 싶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명작이기도 했지만 사춘기의 소년에게 긴 여운을 주었기 때문이다.
프루잇(몽고메리 크리프트)이라는 군인이 하와이에 주둔하는 한 부대로 전출을 오게 된다. 그는 권투선수였지만 시합 중 동료의 눈을 멀게 한 심적 고통 때문에 권투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전출되어 온 이 부대의 최고 상급자인 대대장은 부대별 권투 시합을 우승으로 이끌어 승진을 꿈꾼다. 자연, 프루잇에게 가혹 행위가 가해진다.
프루잇과 친구가 된 마지오(프랑크 시나트라)는 부대를 무단이탈한 죄로 감방에 간다. 감방에는 그와 술집에서 다툼을 벌렸던 포악한 헌병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감방에 갇혀서까지 헌병과 끝까지 맞선다. 그는 결국 구타를 당하여 숨을 거둔다.
대대장의 부관인 상사 또한 장교가 되면 결혼하겠다는 여인의 제의를 받는다. 장교는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고집을 부리다 끝내 여인을 떠나보내게 된다.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고집불통들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처음 본 고등학생 때는 가혹 행위를 참고 견디는 프루잇의 표정, 숨진 친구를 위해 트럼펫으로 장송곡을 불어주던 장면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점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모두가 고집을 부리는 캐릭터들만 모아놓은 듯하다. 다시는 권투를 하지 않겠다는 프루잇도 그러하고, 끝까지 권투를 시키고자 하는 대대장의 고집도 대단하다. 프루잇의 친구 마지오 또한 고집스럽게 헌병과 맞서다 숨을 거둔 것이다.
고집은 영화 첫 머리의, 프루잇이 전입신고를 하는 장면에서 조짐이 보였다. 대대장이 권투를 종용하지만 프루잇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것을 지켜보던 상사가 왜 고집을 부리느냐고 핀잔을 주자 푸르잇이 대꾸를 한다.
“신념이 없는 사내는 시체일 뿐이죠.” 그 대사가 가슴에 확 와 닿았다.
얼마 전, 문인들의 행사 뒤풀이에서였다. 취기가 무르익자 토론이 벌어졌다. 숱한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다른 장르의 원로 한분이 내 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인사치레의 성찬이 차려지더니 기류는 차츰 좋지 않은 쪽으로 기울었다.
작가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점을 짚어 주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수긍할 수 없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었노라 변명을 했다. 어설픈 변명은 마침내 항변이 되었지만 나의 소리는 그분의 귓전에 닿지 않았다. 무안을 주기 위함인가 하는 의구심도 일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
아-, 나는 왜 이토록 자신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내 문학적 감각은 왜 이리도 둔한 것일까. 나는 왜 번쩍이는 장검 하나 갖지 못했을까.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내 스스로가 초라하고 미웠다.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래서일까. 프루잇의 ‘신념이 없는 사내는 시체일 뿐’이라는 그 대사가 마치 내게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독하게 마음먹고 하던 대로 나아가라는 것 같이 들린다. 그 때문일까, 화면에 가일층 몰입이 된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치닫는다. 프루잇은 친구 마지오를 죽인 헌병을 격투 끝에 살해하지만, 그도 큰 부상을 입고 도망을 간다. 탈영을 한 것이다. 애인의 집에서 회복을 기다리는 중 일본이 침공 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전쟁이 나면 군인은 모두 부대로 돌아가야 한다.
깊은 밤, 그는 만류하는 애인의 손을 뿌리치고 담을 넘어 부대로 들어간다. 그러나 일본군으로 오해한 초병의 총탄에 쓰러진다. 그는 왜 다 죽어가는 몸으로 부대로 복귀하는 고집을 부렸을까. 그 고집에 의해 꽃 같은 청춘의 막은 내리고, 영화도 끝이 난다.
영화관을 나오며 프루잇의 행동은 신념일까 고집일까를 되뇌어 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고집으로 보였는데 프루잇은 신념이라고 했다. 과연 신념과 고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집이나 신념은 일을 성사시키는 측면에선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반사적이고 맹목적인 사고는 고집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는 신념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프루잇은 어느 쪽일까. 그렇게도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응하지 않았고, 자신의 몸 상태도 생각지 않았고 맹목적으로 부대로 향했으니 고집임에 틀림없다. 나 또한 그분의 평을 반사적으로 서운하게 받아들였으니 고집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도 프루잇처럼 허망하게 쓰러질지도 모른다. 갑자기 현기증이 인다.
'그룹명 > 수필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나, 아내는 괜찮다 / 신현식 (0) | 2018.03.29 |
---|---|
일취(一炊) 선생 / 신현식 (0) | 2018.03.29 |
삼류(三流) 수필가 / 신현식 (0) | 2018.03.29 |
화장과 면도 / 신현식 (0) | 2018.03.29 |
틈 / 신현식 (0) | 2018.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