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글, 좋은 수필에 대하여 / 정호경
나는 작가의 남녀를 막론하고 좋은 수필을 접하면 그 글을 쓴 작가의 얼굴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나는 계룡산에 입산하여 수도한 관상철학가는 아니지만,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집 고맙습니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수놓은 자수 그림을 선물 받은 느낌입니다.
서울에서 놀러온 손자 아이들은 차밭으로 구경 가고 저는 승용차를 주차장에 대어놓고 이곳 녹차밭 휴게실에 앉아 더위 속에서 보내주신 수필집을 읽었습니다.
수필지를 통해 이미 읽은 글도 있었지만, 새 글이 더 많았습니다.
정겨운 글들이 이곳 녹차 향에 배어 더위를 식혀 주었습니다.
좋은 수필을 만나면 수필집을 보내 주신 미지의 수필가 얼굴이 보고 싶어지는데,
최선생은 제가 이미 알고 있는 맑고 착한 얼굴이기에 만나보지 않아도 좋겠지요.
얼마 전에 기증 받은 여류 수필가 최선생에게 이런 내용의 고맙다는 글을 보냈더니 곧장 회답이 왔다.
저는 미인이 아니라서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 실망할 것입니다.
나는 이 회신 내용이 겸손의 애교 어린 말인 줄 알면서도 몹시 당황했다. 작가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말은 밀가루 범벅을 한 빵집 아주머니 같은 얼굴이 아니라 글에서 본 그대로의 꾸밈이 없는, 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통한 작가의 사람됨을 만나고 싶다는 뜻이었다. 이는 좋은 글이 그 작가의 인간됨과 일치함에 대한 현재의 솔직한 내 심중을 말한 것일 뿐, 그 외 다른 의미는 추호도 없었다는 것을 부언하고 싶다.
글과 관계되는 작가의 사람됨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3,4년 전에 겪은 황당무계한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루는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와서 받아보니 점잖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다음 용건을 말했다. 이번에 ㅇㅇ지방의 문학작품집을 기획하여 발간하기로 했는데 선생님의 작품도 선정이 돼서 게재하고자 하니 원고를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종종 이런 권유를 받은 뒤끝을 알고 있는 터이라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제 작품을 선정해 주셔서 고맙기는 합니다만, 저는 원래 그런 일에는 별로 관심도 의욕도 없을뿐더러 그런 훌륭한 문학작품집에 올릴 만한 글의 수준이 못 되니 저는 빼고 진행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했더니 저 쪽의 점잖은 어조는 순식간에 돌변하여 나를 숨 막히게 만들어버렸다.
“겸손 그만 떨고 보내 달라면 보내요.”
일면식도 없는 그는 일방적인 명령으로 불호령을 내렸다. 그의 책장사 계획에 내가 선뜻 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하는 사람 가운데 이런 사람도 있었던가 싶어 나는 놀라고 허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시를 쓰는 사람인데 종종 이런 기획을 하여 주변 문인들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이 분의 시를 읽고 많은 독자들이 감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만, 혹시 한 독자가 감동한 시와의 인연으로 우연한 기회에 그 분을 만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게 되었다면 5분이 채 안 되어 그의 거짓 사람됨에 놀라 저린 발을 절룩거리며 돌아서야 했을 것이다.
내가 위에서 말하고자 한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글과 작가의 얼굴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시장 바닥이나 지하철 주변에서나 겪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정치인들은 높은 벼슬자리를 노리고, 기업인들은 떼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손치더라도 글을 쓰는 문학인의 얼굴이 이토록 마른버짐이 피어 거칠고 볼썽사나워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나 소설과는 달리 자기 모습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기 심중을 진실하게 고백해야 하는 수필에서는 무엇보다도 글 이전에 사람다운 모습 갖추기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근사하게 얽어 짜서 아름답게만 도배질한 글이 좋은 글인 줄로만 알고 철없이 덤비던 수필 쓰기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그나마도 어렴풋이 수필 쓰기의 바른 길을 깨달은 듯하여 부끄러울 뿐이다.
중학 시절에 읽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딸에게 보낸 편지글 속의 이 한 구절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아 다시 여기 적어본다.
-글은 만드는 데서 시들고, 참된 데서 피어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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