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론

주제 선택의 조건 / 오창익

테오리아2 2014. 3.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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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주제 선택은 그 어느 장르의 경우보다도 어렵고 까다롭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작자 주변의 신변사 일상사를 제재로 하면서도 그 중심사상
의 핵은 항상 진리가 아닌 '眞實'이어야 하고, 개인이 아닌 '人間'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소재는 작자의 눈으로 선택하는 개별적인 것이지만, 주제는 항상 독자와 같
이 나누는 이해와 공감, 보다 인간적인 보편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고 까다로운 주제의 선택이나 그 선정의 조건들을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선명한 주제

주제는 그 글의 핵(核)이요, 중심사상이다. 그 사상이 선명하지 못하면 그만치 그 글의 호
소력은 떨어지고, 설득력은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창작수필의 주제는 가급적 단순·간명해야 한다. 크게 보다는 작게, 넓게 보다는
좁게, 전체보다는 부분적이거나 국부적이어야 한다. '나무'를 그리되, 소설이라면 뿌리,
줄기, 가지를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완벽하게 갖추어 놓음으로써 형상화가 가능하지만, 수
필의 경우 그와는 다르다. 가지나 뿌리, 잎이나 열매 중 그 어느 하나를 통해 나무 전체
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제가 단순 명료하면, 중심사상의 확산을 피하는 것은 물론, 읽는 독자에게도 친근함을
주어 이해나 공감이 쉽고 빠르다. 흠이라면, 흔히 명제(제목)와 제재(소재)가 동일한 경
우가 많아 독자로 하여금 중심사상을 쉽게 엿볼 수 있게 하는 점이다. 기대감이나 호기심
의 유발을 감하게 한다.
그래서 이 때의 서술은 가급적 직서(直敍)를 피하는 비유나 상징, 암시적인 문장이 효과적
이다. 나도향의 <그믐달>, 이양하의 <나무>와 같은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나무는 德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分數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
지도 아니 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 한다. 등성이에 서
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厚薄과 不滿足을 말하지 아
니 한다. 이웃 친구의 處地에 눈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 보되 깔보
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 보되 부러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
대로 스스로 足하고, 진달래는 진달래 대로 스스로 足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
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보슬비 내리는 가을의 저녁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내리는 겨울 아
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팔이 옴짝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
고, 또 고독을 즐긴다.

제목과 소재가 동일한 수필 <나무>의 한 부분으로써 그 서술은 비유의 문장으로 일관한
다.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감이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부
칠 수도 없이 깜찍하게 어여쁜 계집애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삼키려는 독부가 아니면, 철모
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
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비정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公主)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만,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들어 하는 이나 못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은 보여주는 이가 별로이 없을 것이다.

나도향의 대표작 <그믐달>의 서두부로서 역시 비유와 상징적 문장으로 주제의 선명도를
높여 주고 있다.

2.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

주지(主知)적인 것이든 주정(主情)적인 것이든 수필의 내용은 친구와 마주앉아 격의없이
나누는 '말'과 같아야 한다. 그 말은 문장의 경우에도 해당되고, 주제 설정의 경우에도 예
외가 아니다. 수필에 관한 한 말이 곧 문장이고, 문장이 곧 그 글의 주제라고 해도 지나
치지 않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라 해도 마주앉은 사람(독자)
을 무시하는 주장, 설교일 변도의 고담준론으로써는 이해나 공감은 결코 얻어내기가 어렵
다. 때문에, 수필의 문장은 가급적 완곡(婉曲), 온유(溫柔)해야 하고, 그 주제는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관심사여야 한다. 이 경우, 자칫 교훈이나 비평에 치우치
기가 쉬우므로 적의적절(適宜適切)한 예시로 보다 자연스럽게 주제의식을 구체화 해야 한
다. 박종화의 수필 <淘河와 靑莊>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세상에 가장 가련한 것은 일하고도 먹지 못하는 것이요, 그 대신 가장 가증한 것은 놀고
도 잘 먹는 것이다. 인간의 온갖 불평과 눈물의 반 이상이 여기에 연유함이라 해도 틀림
이 없을 것이다.
'淘河勞而常飢 靑莊佚而常飽'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淘河는 애를 쓰고도 늘 주리
는데, 靑莊은 놀면서도 늘 배불리 먹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淘河와 靑莊이라는 것은 물새의 이름이다. 一名으로   라고도 하는, 俗名으
로는 '사다새'이니, 이 새는 하루종일 고기를 엿보며 강물의 뻘흙 속으로 다니면서 날개와
입부리를 더럽혀 가며, 고기를 찾느라 애를 쓴다. 그러나 꽤많은 고기들은 淘河의 그림
자를 피해 물가로 숨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靑莊은 항상 물가에 멀쑥하니 서서 밖으로는 한가한 척 아무것도 구하는 것이 없
는 듯이 보이나, 淘河에게 쫓겨 물가로 숨어 나오는 고기들을 아무런 수고도 없이 날름
날름 배부르게 잡아먹는 것이니,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일찍이 淘河와 靑莊을 世間利慾人
에게 비겨 말해 온 것이다.

애를 쓰고도 항상 굶주리는 淘河와 놀면서도 항상 배불리 먹는 靑莊을 예시로 하여 작자
는 어렵잖게 '불평등'이란 주제의식을 공감케 한다.

옛날 朝鮮의 국화는 無窮花이다. 그리고 조선을 그의 날개 밑에 품고 있는 白頭山에는 무
궁화가 많이 핀다.
무궁화, 그 이름조차 아름다운 이 꽃은 조선사람의 마음을 상징하는 名花라고 한다. 이
꽃은 반드시 백두산에만 피는 것이 아니요, 조선 각지, 어느 구석에든지 반드시 피는 꽃
이다. 이 무궁화, 그는 조선사람의 마음을 대표하느니 만치 결코 화려한 꽃은 아니다. 청
초한 맛은 있으나 진하고, 그리고 可憐한 꽃이다.
이 꽃에 둘러있는 반도는 그 꽃의 상징과 같이 화려한 역사는 가지지 못하였다. 조선의 역
사가 말하는 것과 같이 항상 紛亂과 戰亂이 있었고, 따라서 외적의 침범도 많이 받았다.
무궁화 반도는 그 꽃과 같이 항상 슬픔과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가련한 역사의 줄
기를 걷고 있었다.

노자영(春城)의 <半島山河 禮讚記>의 서두부로서, 온유하고 완곡한 문장이 독자에게 친밀
감을 주고, 따라서 작자가 의도하는 주제의식을 쉽게 공감케 한다. 수필이 대우(對偶)적
인 문학임을 실감케 하는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