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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4회 김수영문학상 당선작] 황유원

테오리아2 2016. 3. 3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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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회 김수영문학상 당선작] 황유원

 

■ 세상의 모든 최대화 외 6편


세상의 모든 최대화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나?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 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Joni Mitchell, A Case of You중에서.

** Amy Winehouse.

      

 

    

 

루마니아 풍습

 

 

루마니아 사람들은 죽기 전 누군가에게

이불과 베개와 담요를 물려준다고 한다

골고루 배인 살냄새로 푹 익어 가는 침구류

단단히 개어 놓고 조금 울다가

그대로 간다는 풍습

 

죽은 이의 침구류를 물려받은 사람은

팔자에 없던 불면까지 물려받게 된다고 한다

꼭 루마니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 냄샐 맡다 보면

너무 커져 버린 이불을, 이내 감당할 수 없는 밤은 오고

이불 속에 불러들일 사람을 찾아 낯선 꿈 언저리를

간절히 떠돌게 된다는 소문

 

누구나 다 전생을 후생에

물려주고 가는 것이다, 물려줘선 안 될 것까지

그러므로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이들 중 누군가는 분명

먼저 이불 속에 묻히고

 

이제는 몇 사람이나 품었을지 모를

거의 사람의 냄새 풍기기 시작한 침구류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혼자서 이불을 덮고 잠드는 사람의 어둠

그걸 모두들 물려받는다고 한다

언제부터 시작된 풍습인지

그걸 아무도 모른다

 

      

 

 

레코드 속 밀림

 

 

1

 

예술은 두 종류,

차가워지거나 뜨거워지거나

 

목이 쉬면 빛이 바래는 가사가 있고

휘발도니 노래 밑바닥에 반정부군처럼 살아남아

지구 반대편 지원군을 불러 모으는 가사가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변함없는 사실은

 

마음을 다하면

판은 돌아가는 거

    

 

2

 

봄밤, 짐승들이 합창하는

레코드 속 밀림의 고요

식지 않은 피를 싣고서 최대한 무리하지 않게

어슬렁거리는 무리들

 

이것이 바로 열대우림에서 맞는 봄밤

따뜻한 비를 맞는 호랑이들의 피부에 핀 착한 꽃들이 질 때

그들을 달래며 적어 보는 부드러운 밀림서()

 

호랑이는 두 종류,

찢어지거나 불타오르거나

 

밤의 정적 속에 점화되는 눈알들의 냉정함

밤의 고요 속에 이글대는 살가죽의 뜨거움

 

그걸 헷갈리면 당신의 끝장

 

마음이 다하면, 결국

판은 그만 돌아가는 거

 

 

3

 

울울창창 밀림이 깊어만 가는 밤이고

그래 봤자 무료한 반복재생

겨우 의 자리바꿈에 불과하겠지만

 

마음이 다한 자린 이미 겨울이어서

두꺼운 침묵 한 장 껴입고 사냥을 나설 때

얼굴엔 짜작, 단번에 금이 가는 거

 

잊고 지냈던 화려함들은 어느새 훌륭한 장작이 되어 있었네

그 위에서 불타는 마음

 

 

4

 

호랑이 요리는 두 종류,

꽁꽁 언 눈알의 단단한 차가움과

가죽의 뜨거운 화염

 

차가운 눈빛 삼킬 땐

밀림에 찬비 내려

이글거리던 내장이 식고

칼로 썬 화염 씹어 먹을 땐

뜨거운 아궁이 속에서 들끓는 비명

누구라도 뻘뻘 땀을 흘리지

젖는 건 마찬가지

 

 

있을 수 없지 밀림의 암전(暗轉)이란

호랑이의 얌전은 가당치 않아

 

그러므로 우리란,

산산조각 난 레코드판에서

죽지도 못하고 기어이 기어 나오고 있는 것

 

마음이 있는 한.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

그러나 고층 빌딩의 견고함

원피스의 펄럭임은 야외에 달린 커튼

걸어다니는 커튼, 긴 머리의 자유로움과

저 여잔 머릴 기르길 참 잘했다는 생각

바람 부는 날 멀리서 바라보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빌딩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테이블에 올려진 물회에 뜨거운 밥 한 그릇을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잔 세 개를 부딪칠 때 불어오는 바람

바다보다 더 바다 같은

바람보다 더 바람 같은 바람의 통로 안에 담겨 한 접시의 물회를

이제 더 큰 바람이 불어오겠지

암 그렇고말고

바람 속에 흔들이던 것들 죄다 이륙하고 테이블이 뒤집히고 원피스가 팬티 위로 올라가고 술병이 차례로 추락할 거야 만물지중(萬物之衆)이 낙하하고 비행하는 난장판이 펼쳐질 거야 그 전에 딱,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마지막 잔을 비우고 그 속에 한 잔의 바람과 평화를

이 세상 모든 바람이 지금 여기로 불고 있다는 착각

지금 이 바람은 우릴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는 확신

이 모든 접시들과 수저들이 처음 보는 우릴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게 바람이 하는 젓가락질이라는 망상

그 와중에도 이 골목은 계속 길어져서 아무리 긴 바람도 결국 빠져나가지 못할 거란, 그러나 바람에는 길이가 없을 거란

헛된, 몽상

그러나 얼음이 다 녹기 전에 한치 학꽁치 미주구리 문어대가리

바람 속으로 날아드는 새들이 생선을 다 채가기 전에 쌈장을 찍고 마늘을 올려서

김에도 싸서 너의 입에 한번,

나의 입에 한번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

오늘 왜 난 자꾸 눈물이 날까

이봐 그러고 있지 말고 저길 좀 봐

어느새 일렬로 늘어선 소주병들이 진한 방풍림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봐 앞에 앉아서 자꾸 핸드폰이나 쳐다볼 바엔 차라리 지나가는 여자 다리를 쳐다보지 그래

난장판이 되기 직전 빈 접시의 바람을 집어먹는 나무젓가락의 튼튼함

우리가 이제부터 불어올 모든 바람을 이 한 잔의 공간 속에 모두 쑤셔 담을 순 없겠지만

마침표같이 눌러놨던 돌멩이들 죄다 굴려 버리는 바람

그러나 어딘가에선 반드시 멈출 돌멩이들을 바라보며

바람 부는 날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취기에 시원한 사이다 한 잔씩을 따라 주며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빈 잔은 이제 그냥 빈 잔으로 남겨 두고

 

     

   

 

인식의 힘

-Notes on Blindness*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내리는

빗소릴 듣고 있었고

내리는 비가 때리는

물질들이 내는 소릴 듣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둔탁한 소릴 내다

창을 열면 크고 선명해지는

빗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빗소리는 무엇 하나 소외시키지 않았으므로

비로소 간극 없이 이어진 세계 속에서

내리는 비가 때리는 온갖 물질들이 내는 소릴 듣고 있었다

내리는 비가 때리는 물질들을 하나씩 분간해 낼 때마다

세계는 확장되고 있었고

세계는 재구성되고 있었고

때로 한밤중에

가는 물줄기 어딘가 부딪치고 있을 때

밤비 오시나

엄마 또 자다 깨 오줌 누시나

분간해 낼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침대에 누워서도 듣고

창문을 열어 두고도 듣고 있었다

문득 뒤돌아보면

고요한 실내

잠시 비 그치면 다시

고요한 세계

그러나 다시 빗소리 들려오기 시작하면

때로 나는 그게 다시 멀리서 비 내리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벌거벗은 네가 욕조에 들어가 샤워를 하기

시작한 건지 분간해 낼 수 없고

그럴 때마다 세계는 뒤섞이고 있었고

세계는 재구성되고 있었다

이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볼 수 있었으면 없었을 세계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없었을 세계

비가 내리지 않을 땐 정말로 없는 세계 속에서

모든 물질들이 내리는 빗속에서 어깨동무하는 광경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게 돼버렸을 때까지

비는 내리고 있었고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을 때까지

비는 내리고 있었고

비는 때리고 있었고

나는 그 모든 물질들의 한가운데 있었다

나는 여전히 창가에 머물고 있었고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신학자 전 헐(John Hull)이 실명 이후 3년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일기를 그대로 사용하여 제작된 단편 다큐멘터리.

    


 

    

쌓아 올려 본 여름

 

 

여름이다

혼자 점심을 사 먹고 운동장 계단에 앉아 있는 여름

괜히 끊었던 담배 한 갑을 사서 정말 딱

한 대만 피우고 계단 위에 누워 보는 여름이다

개미들이 무언갈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여름

동네 아저씨 하나 학교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오갈 데 없이 앉아 보는 여름이고

딱 한 대 피운 담배곽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통째로 줘버리는 여름

그 누군가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알 속의 여름이다

개미들아 내게 올라타서 놀다 가라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천천히 기는 매미들아

네 옆에 와서 생을 마쳐라

고장 난 티비나 세탁기 컴퓨터 삽니다

그래도 괜찮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나는 콘크리트 위에서 죽은 매미의 몸을 흙 위로 옮겨주는 여름이고

공 차는 소리와 구름이 흘러가는 색깔이 구분되지 않는 여름

누워 있는 나를 슬쩍 구름 위로 옮겨 주는

힘이 남아돌고 시간이 남아도는 여름이다

아까 그 아저씨가 애들이 하는 축구를

승부차기가지 다 보고 있는 여름이고

그물은 골의 힘만큼만 출렁이다가

곡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여름

여름은 이윽고 자리를 비우고 잠시 화장실에 갈 것이다

수돗물 틀어 놓고 그 소리 듣고 있자면

잠시 폭포 앞에 서 보는 기분

여름이다

땀과 물이 뒤섞여

배수구로 집중되고 있는 여름

잠깐 누워 있던 여름이 깜박 조느라

구름 떼로부터 도처에 자유낙하 중인 여름

오면 오고

가면 가는 여름이다

짧은 치마를 입고 또각또각 걸어가는 여자보다는

그 여자의 다리와 볼록한 궁둥이를 멍하니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고 마는 노인의 표정에 더 반응해 보는 여름

너는 자꾸 치마를 끌어내리고

나는 여름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본다

여름이다

지난해 여름에 이어

또다시 여름

내년 여름은 아직 안 왔지만

내년에도 여름은 오는 거겠지

어떤 확신에 가까운 여름

여름에게도 얼굴이라는 것이 있다면 참

볼만할 거야

운동장처럼

하얗게 웃고 있을지도

모든 것을 증발시키며

정신이 증발했을 때

홀로 버려질 몸뚱이처럼

드러누워 있는 운동장 위에 홀로

드러누운 여름

나는 여름의 타오름 속에 슬쩍 몸을 끼얹고

잠시 같이 타올라 보는

여름

여름이다

여름이고

여름이고

여름이고

여름

나는 돌을 쌓듯이 거기 여름을 쌓아 놓고

발로 한번 차 본다




 

전국에 비

 

 

어둔 방

창밖으로 들려오는 자욱한 빗소리 속에서

나는 기타를 치고

기타는 허공에

나무 한 그루 심어 놓는다

기타의 목질(木質)이 허공에서 축축이 젖어 가는 사이

나무는 비를 맞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우리는 그 아래서 비를 그으며

젖은 머릴 말리며 다시

기타를 친다

내가 기타를 치면 참

평화롭다고 너는 말하지

나는 고작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틀렸는지나 생각할 뿐인데 너는 그게

평화롭다고 말하고 진심으로 평화로워지지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내가 치고도 듣지 못한 음악을 너의 입으로 전해 듣고서야

평화로워진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처럼

참 쉬운 평화

그러나 네가 없으면 도래하지 않는

너로 인해 듣는 참 평화

어쩌면 이 모든 건

규칙적인 비의 리듬이 가져다준 착각일 뿐

풍부해진 대기가 소리의 울림들을 한껏 껴안고선

공중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말해 보지만

말해 본들

이미 평화는 왔고

이유 따윈 중요치 않다

이미 전국은 무수한 빗소리를 거느리고 있고

오래 사람이 찾지 않은 숲 냄새 속에서

방은 여전히 어두운 채였는데

어느덧 혼자 남겨진 내가

그곳에서 듣는 빗소리

열린 창 하나만으로

씨앗 속 세상에서

씨앗 밖 세상을 듣는 듯했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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