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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흑과 백/김희자

테오리아2 2014. 10. 1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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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김희자 

 

                                             

 섬과 섬을 잇는 다리 여섯 개를 지나 그리운 땅을 밟았다. 꿈결에 듣던, 밤잠을 설치게 했던 고향이다보물섬이라 불리어지고 있는 남해는 조선시대 때 정쟁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유배지였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유배객들이 귀양지에서 절망을 딛고 문학의 꽃을 피운 곳이다. 몇 해 전, 이곳에는 시대적 운명으로 인해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했던 유배객들에게 빛을 주고자 문학관을 세웠다. 귀양살이를 했던 옛사람들의 기록이 없었다면 어찌 그들을 기리는 유배문학관이 세워졌겠는가. 생이 절정일 때가 있다면 필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암울했던 시절에는 유배지였지만 지금은 보물섬으로 거듭나고 있는 남해다어둡고 답답한 시대가 흑()의 세상이었다면 유배문학의 산실이 된 지금은 백()의 세상이 된 섬이다. 문학관 마당에는 당시의 처참한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물살 센 노량해협을 건너온 수레가 지칠 대로 지쳐 있고 티끌 같은 섬으로 귀양살이를  귀양객이 탈진한 수레 속에 앉아 있다. 한양에서 수레로 달려온 천리 길과 뱃길 시오리. 삶과 죽음을 가르는 노량해협을 건너 여기까지 왔.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화전(花田)을 만들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구운몽(九雲夢)을 엮었던 서포(西浦)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유배문학관으로 든다.

 언제 생이 마감될지 모르는 귀양길. 유배라는 서술어가 숙연하게 만들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빛으로 발하고 있으니 기록의 힘은 대단하다고독은 예술가 내면의 잠재적인 예술성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나 진배없다고 했다. 고독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은 저마다 섬의 세계에서 예술을 낳는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섬에서 그리움 삭이는 법을 배우며 붓을 들었던 것이다. 작가라는 이름표를 어줍게 달고 고향을 찾은 내게는 그들의 존재가 더 큰 의미로 다가선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은 훗날 이렇게 희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문학관 안으로 들어서자 귀양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이의 심정을 그려낸 상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팍팍한 삶이 그대로 전해져 와 가슴이 쓰리다전시물 중, ()과 백() 상징한 조형물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백척간두에 선 유배객의 심정을 대비시켜놓은 조형미술이다. 흑과 백 사이에 내려온 동아줄이 침묵하고 있다한 가닥 내려온 외줄이 절박함을 그려낸다. 생과 사의 기로. 기약 없는 유배 길에서 실오리 같은 희망을 던져주는 동아줄이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무언가를 붙들고 싶어 하는 심정을 곧잘 표현해놓았다.

 흑과 백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삶과 죽음, 가장 절망적인 때와 희망적일 때를 생각하며 대조적인 두 세계를 그려본다.

 (), 절망을 상징하는 어둡고 좁은 공간이다. 적막뿐인 공간속으로 들어가 혼자가 되어본다. 지난날의 출세와 부귀영화도 하룻밤 꿈만 같았을 귀양객이 되어본다. 아무도 없는 막막한 섬에 서보니 깊은 외로움만 몰려온다모두 버리고 왔으니 더 이상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다마음대로 오갈 수도 없고 품은 뜻을 펼칠 수도 없으니 동아줄을 잡을 수밖에. 유배지에서 오직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책을 곁에 두고 글을 쓰는 일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뜻을 그려낼 수 있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는 붓이었으리라.

 창호지로 낭창낭창 스미는 갯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희미한 등불 아래서 붓을 적셨을 시간들이 스쳐 간다생사의 기로에서 그나마 붓으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으니 천만다행이지 않는가. 고독을 견디는 자만이 위대해진다는 말이 있다누구나 깊은 고독과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독과 위기의 순간이 오히려 좋은 스승이 되어 꿈을 꾸게도 만든다. 절망의 땅, 유배지에서 문학이라는 찬란한 꽃을 피우며 희망을 노래했으니 그들을 기리는 오늘이 있는 것이다

 어두운 공간속에 들어와 있는 나 또한 고독에의 진한 향수가 있다. 믿었던 세상이 나를 버린 듯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울 때가 있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에 덴 듯 신산한 삶이 위궤양을 일으키고 출혈이 생겨 빈혈을 일으켰다. 내 목숨 하나 던져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붙이들을 생각하면 사라질 수 없었다. 흑과 백의 경계에 있는 저 동아줄처럼 나를 구원해준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 어둠이 그치고 새날이 오는 희망의 공간이다. 누구나 절망의 끝에 서게 되면 희망을 갈구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 동아줄을 힘껏 당기며 오를지도 모른다생과 사의 기로에 서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에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귀양살이를 하던 옛 문호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바깥세상을 동경하며 글을 썼듯이 나 또한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붓을 들었다.

 옛 문호가 절망과 고뇌 속에서 꿈꾸던 세상을 그렸듯이, 나 또한 몸을 사르며 영혼에 풀무질을 해댔다밤이 새도록 상상의 풀무질을 하다보면 찬연한 순색의 언어가 얻어지기도 했다. 깊어가는 포도주의 맛처럼 지친 내 심신에 윤기를 적셔준 것이 수필이었다. 절망적인 세계, 세상에서 분리되어 외톨이가 되어보아야 존재의 가치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놓치고 있는 삶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을 때 백(), 희망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생기지 않았으리라

 우리는 살면서 흑이 아니면 백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넓고 깊숙이 생각해보면 흑과 백의 논리가 같은 데도 말이다. 이곳에 설치된 흑과 백의 조형을 보면 어두운 곳에 숨겨진 사물도 밝은 곳에 숨겨진 형상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검고 흰 것은 바로 내 마음이 보는 세계일뿐이다. 눈은 흰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은 어둠으로 깃들기도 하고 검은 것을 보면서도 희망을 떠올리니 말이다. 수시로 변하는 것이 마음이니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찌 검고 흰 것을 분별할 수 있으랴.

 흑과 백 사이에 내려온 동아줄을 힘껏 잡아본다. 흑과 백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면 누구나 백에 손을 들 것이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빛을 발할 수 없고 동아줄의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 반쪽은 또 다른 반쪽과 하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절망은 희망을 위해 존재하며 꽃을 피운다.

출처 : 대구MBC [이상렬의 수필창작]
글쓴이 : 들꽃-박시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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