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를 볶으며
장남희
참깨를 볶아 본 적이 있나요? 주부라면 참깨 볶는 일은 벼려서 하는 일이라는 걸 알 거에요. 제가 부엌에서 하는 일 중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참깨 볶기’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거예요. 인스턴트식품이 널려있고 조리된 재료들이 흔한 이 시대에 굳이 깨를 직접 볶느냐고 답답해하는 분도 있겠지요. 참깨를 볶을 때면 정말 한눈을 팔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 한 눈 팔아서 될 일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제가 경험한 일 가운데 잠시 정말 잠시 한 눈 팔다 일을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 깨를 볶을 때였습니다. 깨 볶는 일은 밥하듯이 매일 하는 것이 아니지만, 저에게는 한 달에 한 번 미장원에서 머리 손질하듯 주기적으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어느 일정한 기간이면 돌아오는 일을 매번 며칠 전부터 숨 고르기를 한답니다.
참깨를 고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참깨의 생산지가 어딘지 꼭 확인합니다. 우리나라 시골에서 욕심 없이 농사를 짓는 농부로부터 참깨를 구매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보다 속는 것이 싫다는 게 솔직한 속내입니다. 매년 8월이면 미리 부탁해둔답니다. 해마다 똑같은 사람에게 부탁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시간을 놓쳐 참깨를 구하지 못한 적도 있었고, 품질이 좋지 않다고 해서 선택이 달랐던 때도 있었습니다. 올해는 경북 성주산 참깨를 네 되 사놨습니다. 지인의 시부모님께서 농사지은 것인데 입자가 고르고 색깔도 뽀얀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른 참깨를 바로 볶지는 않습니다. 볶는 것만큼 신경이 쓰이는 것이 씻을 때입니다. 사람이 일일이 털어서 수확하다 보니 참깨와 함께 딸려오는 부스러기가 많습니다. 흙과 참깨가 분리돼야 하고 또 같은 참깨에 속해도 속이 비어있는 것도 있어 구분해야 합니다. 우선 양푼에다 참깨와 물을 섞어두고는 가라앉는 것과 물 위에 뜨는 참깨를 지켜봅니다.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는 참깨는 쭉정이지요. 속이 비어 있는 깨는 그릇 밖으로 내보냅니다. 성급히 내보내다가는 가라앉아있는 참깨까지 들뜨게 해 휩쓸려나가기도 합니다. 속살이 통통한 참깨를 잡으려다 손등에 쭉정이가 달라붙어 그것을 떼어내려 허둥지둥 하다보면 짜증이 나기도 하지요. 참깨를 씻은 후 바로 볶지는 않습니다. 깨를 체에 밭쳐 물기가 빠지길 기다립니다. 이때 급한 일이 생겨 밖에 나갔다가 한나절 지난 뒤에 깨를 볶는다면 당신은 저와 같은 낭패를 경험할 겁니다. 깨 꽁지에서 싹이 돋아나 있지요. 아까워서 열심히 볶지만, 허탈감에 곧 사로잡힐 겁니다. 싹이 난 깨는 쓴맛만 내니까요.
물기가 빠진 참깨를 깊은 프라이팬에 넣고 볶기 시작합니다. 나무주걱을 이용해 처음부터 저어 줍니다. 이때는 걸려온 휴대전화를 받아도 괜찮습니다. 불기운이 겉에만 닿아있기에 깨가 요란을 떨지 않거든요. 단 오래 통화를 하면 안 됩니다. 그럴 여유는 없습니다. 조금씩 손동작이 빨라야 합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르면서 뛸 준비를 하기 때문이지요. 주걱에 깨가 달라붙지 않으면 방어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숭어가 뛰어오르듯 참깨가 일제히 뜀뛰기를 합니다. 깊은 프라이팬이라 해도 높이뛰기를 잘하는 참깨를 다 잡아 둘 수가 없습니다. 이때는 뚜껑이 필요하답니다.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뚜껑이 있으면 좋아요. 단 주걱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작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간혹 그 틈새로 튀어 나가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 주워 다 넣지만 발밑 어디엔가 떨어진 깨를 찾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어요. 엎드려 찾는 동안 프라이팬 안은 삽시간에 대혼란에 빠진답니다. 피어오르던 고소한 향이 난데없이 타는 냄새로 바뀌거든요. 노릇노릇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불을 낮춰줍니다. 이제 서서히 다닥다닥 거리는 소리와 점프하는 모습이 잦아들 거예요. 조용해지면 몇 개를 손가락으로 집어 씹어보면 불을 꺼야 할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여러 번 하다 보면 깨의 색깔만 봐도 불 조절은 어렵지 않습니다.
깨를 사고, 씻은 후 볶는 일까지 설명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볶은 깨를 어떤 용도로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고소한 맛을 내는 깨소금으로,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통깨로 나눕니다. 한 곳에서 자라고 같은 프라이팬에서 볶였지만, 운명을 달리해야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아, 깨소금이 될 운명이지만 그 모양이 일그러지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플라스틱 절굿공이를 용케도 비켜나가 온전하게 제 몸을 지킨 거예요. 고소한 향이 짙게 나오는 제 친구를 부러워할 수도 있고 으스댈 수도 있겠지요. 참깨는 이런 과정으로 제 손을 거쳐 두 가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깨를 볶으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사람들 그 속 어딘가에 제가 있고 당신이 있습니다. 때로는 버려지기도 하고 또는 내치는 쪽에 있기도 합니다. 선택 되었다 하더라도 중간에 탈락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발길을 돌리는 이도 있겠고 타의에 의해 추방되기도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어딘가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고소한 향을 내는 사람으로든, 돋보이는 사람으로든.
오랫동안 모양새 나는 삶을 동경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욕망을 분출했습니다. 다른 이보다 한 개 더 가진 후에 베풀고 살아도 늦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보고 들은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너무나 일부만 선택해야 하는데도 허덕거려야 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외로움 속에 갇혔을 때 깨달았습니다. 고독의 근원은 사람의 향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걸. 아직도 짓이겨지는 고통을 참을 용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깨소금처럼 살아가겠다고 섣불리 말도 못합니다. 언제쯤이면 그 시간이 올까요? (15.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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