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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상을 꿈꾸다

테오리아2 2013. 2. 2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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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을 꿈꾸다, 운문 댐에서

                                                             

                                                                                                                                                                               


  숲은 오랫동안 젖지 않아 바람 끝자락에도 바스락댄다. 상수리나무 잎은 뭍으로 끌어낸 새우 등을 닮아가고 있다. 나뭇가지에서 바동대는 잎은 마른기침 한 번이면 떨어질 것 같다. 계곡엔 소리가 멎었다. 지류에 흘러드는 물줄기가 멈추니 운문 댐의 저수지도 속살을 드러냈다. 발가벗긴 절개 지切開 地는 황토색이다. 호수와 기슭 사이에서 장승처럼 서 있던 나무들이 위태롭게 보인다. 금방이라도 뿌리째 뽑혀 댐 안으로 곤두박질할 모양새다.


  호수는 어머니 같다. 초당 수억 개의 빗방울도, 이 골짝 저 골짝 물이 모여 무섭게 밀어닥쳐도 안아준다. 흙탕물로 뒤범벅돼도 품어서 한 빛깔로 거듭나게 한다. 고여 있는 호수의 물은 제소리를 내지 않는다. 외부의 자극에 따라 크고 작은 소리를 낼 뿐이다. 호수는 한가로울 때가 없다. 넘쳐도, 모자라도 넋두리를 들어야 한다. 밤낮으로 시달린다. 바라보는 이들은 저수지와 댐의 역할만 말할 뿐 생채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호수 기슭에서 건너편 절개 지를 바라본다. 물이 빠진 곳이 아프게 다가온다. 저 빈 곳이 채워져 있을 땐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댐이 들어서기 전, 한 그루 나무의 생명 터였고 한 해살이 풀이 자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굴착기가 굉음을 내며 수십 년 혹은 단 몇 달을 뿌리박은 생명을 도려냈을 그 순간, 호수는 태어났다. 아픔은 새로운 생명을 거두는 임무를 맡겼다. 그 의무의 시간은 길다. 소멸하더라도 기록으로, 기억으로 남는다.


  호수는 수필을 닮았다. 호수가 어떤 물을 가리지 않고 끌어안듯 수필 또한 삶을 포용하고 있다. 때로는 모자람에서 글감을 찾아내고 어떤 때는 넘쳐서 생겼던 일을 글로 나타낸다. 댐이 만들어질 때 수없이 생채기가 생겨났다. 그 상처를 호수가 더 감싸 안았다. 수필 또한 삶의 여정에서 생긴 흉터를 다독이는 글이다. 부족하든 풍족하든 모두 포용하는 것이 호수와 닮지 않았는가.


  수필로 등단한 지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앓고 있다. 무기력해지고 마음에 울림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어떤 것이든 의미를 부여하고 새롭게 조명해보는 사고력이 부족하다. 등단이라는 꼭짓점을 동경했었던 시간.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작품 속 호랑 애벌레처럼 기둥만 올라가면 되는 줄 알았다. 절망감에서 탈출해 보고 싶은 생각보다 수필의 끝을 놓으라는 내면의 압박이 더 거세다.


  수필에선 작가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개인의 삶이라 해도 혼자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니 포용력이 필요하다. 포용은 배려다. 모든 사물이 배려의 대상이다. 나는 배려의 대상에게 무조건 수용적이지는 않다. 저울과 자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내면에선 언제나 사물에다 무게와 길이를 재고 있다. 모자람과 넘침이 나를 기준으로 하기 객관적이지 않다. 상대방의 마음이 내게 와 닿지 않는 것도 내게 무게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무게 중심이 때때로 오차가 있을 수 있는데 나는 한사코 중앙에 있다고 고집을 피울 때가 있다. 포용력의 한계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무기력, 뒤로 물러설 용기도 부족하다. 머뭇거린 시간이 길었다. 누구나 겪었다 해도 이즈음에서 벗어나고 싶다. 드러냄과 포용력, 이 두 가지를 내 속에서 더 끌어낼 수 있을까? 최면을 걸어보면 어떨까. 집안 곳곳에 두 낱말을 써 붙여놓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각인시키면 울림이 되살아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드러냄과 포용력은 울림이다. 울림은 글을 살아있게 한다. 울림이 꿈틀거리는 글은 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약간 흥분이 된다. 마른입에 침이 돈다. 침을 목젖으로 넘겼다. 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식도가 젖는다. 살려는 행위다. 육체와 정신이 서로 교감하고 있다. 운문 댐의 호수도 마찬가지다. 하늘과 땅의 섞임이다. 비는 땅이라는 공간에 머물다 하늘로, 그곳에서 떠돌다 다시 지상으로 떨어진다. 채웠다가 비워지는 것이 자연인데 어쩌면 지금의 나는 비워지고 있는 게 아닐까? 비어져 바닥이 보이면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 넓다. 품을 양이 많다. 운문 댐도 지금의 모습처럼은 있지 않는다. 어느 날에는 생채기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경계선의 소나무는 물속에 잠길까봐 조마조마할 것이다. 그러면 댐은 수위를 조절한다. 품은 물을 먼바다로 향하게 한다. 그렇다고 영원한 이별은 아니다. 자연의 섭리가 변하지 않는 이상 물은 순환의 삶을 산다.


  황토색 절개지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연민의 정이 사라졌다. 저 또한 자연의 섭리인 것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 도리어 아름답게 보인다. 한 번쯤 그 자리의 존재를 기억해 달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내게로 전달된다. 절개 지를 향해 내 속을 보여주고 있다. 내 어깨로 바람이 밀려온다. 저곳을 향해 비상해 보라 한다. 만져보고 쓰다듬어보라고 한다. 마음의 울림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13.6매)


 

     

출처 : 신재기문학강의
글쓴이 : 장남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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