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사외 칼럼 (ESSAY〕
어물전 천사
박기옥 수필가
그는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시장 요지에서 어물전을 하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터줏대감이라 인근에서는 모르 는 사람이 없었다. 성(姓) 또한 김이나 박이 아닌 공씨였으니. 공씨네 가게는 태풍이 닥쳐와도 생선의 구색과 신선도를 보 장했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그의 포 뜨는 솜씨는 당할 자가 없었다. 그것은 요술에 가까웠다. 종잇장처럼 얇으면서 도 끊어지지 않고 탄력이 있었다. 그가 떠 준 생선포로 전을 부치면 명절 음식에 초짜인 새색시라도 결이 살아있는 전이 나왔다. 그의 가게는 특이했고 고급이었다.
이런 공씨에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생선이 아니라 책을 만지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일을 아버지가 물려받았듯이 자신도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을 때만 해도 별 갈등은 없었다고 했다. 손님도 많았고 돈도 벌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이라는 '요물(妖物)'이 그의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요물은 날이 갈수록 세력을 확장하여 그를 지배했다. 결국 그는 어물전을 접고 집 근처에 서점을 하나 차렸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다. 단골인 나 역시 펄쩍 뛰었다. 그 선택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어물전을 그대로 운영하면서 서점에는 사람을 쓰면 안 되겠느냐고 해도 싫다고 했다. 자기가 직접 책을 만지고 나르고 진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점을 그가 운영하고 어물전에 사람을 쓰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고객이 자기를 보고 오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고객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마치 돌풍에 휘말린 사람 같았다. 50대 후반에 여자도 노름도 아닌 책에 빠져 버리다니!
이태를 넘기지 못하고 그의 서점은 문을 닫았다. 엄청난 대가를 치른 후였다. 폐업의 주원인은 그의 고집이었다. 팔리는 책과 팔고 싶은 책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이문에 관계없이 자기가 팔고 싶은 책을 주로 취급하여 고객들의 비웃음을 샀다. 서점이 문을 닫았을 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도 재고로 남은 책들이었다. 새 주인은 재고 인수를 거부했다. 팔리지 않는 책들은 결국 고물상에서 폐지로 처리되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는 다시 어물전으로 복귀했다. 저번 가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1평이 채 못 되는 크기에다 시장 안에서 가장 몫이 나쁜 북쪽 귀퉁이였다. 그의 가게는 이제 더 이상 구색과 신선도를 자랑하지 못했다. 손님이 민어나 해파리·새우 같은 귀한 해물을 찾으면 다른 가게로 달려가 구해다 주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단골손님이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시 가게를 찾기 시작했는데 아무도 그의 '일탈'을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공씨가 심혈을 기울여 구입한 책들이 고물상으로 넘어간 이야기에 한숨 쉬며 귀를 기울였다. 좁고 비린내 나는 가게 한쪽에 서서 팔뚝만 한 방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얄핏얄핏한 전으로 되살아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더러는 보온병에 생강차를 달여와서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쉴 때 무릎이라도 덮으라고 미니 담요를 갖다 주는 사람도 있었다.
공씨 아내도 모습을 나타냈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가게에 아무리 손이 부족해도 공씨는 아내에게 생선을 만지게 하지 않았다. 명절처럼 손님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면 사람을 썼다. 전 뜨는 일은 밤을 새워 혼자서 감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공씨가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해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판국에 봉사는 무슨~."
사람들이 마뜩잖은 얼굴을 하면 공씨의 부인은
"힘들지 않을 때는 어려운 사람의 고충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우리가 실패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 보니까 비로소 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라며 남편을 옹호했다.
어물전은 간간이 단골에게 커피를 내어 오기도 했다. 선 채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공씨는 서점 운영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고 역설했다. 책을 접한 것이 남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손바닥만 한 어물전에서 나오는 수입의 절반을 흔쾌히 장애인 시설에 보내고 있었다. 돈 잘 벌고 주위에 사람들이 득실거렸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단골손님들과 함께 커피를 마신 공씨가 명태포를 뜨기 시작했다. 봉사활동 때문에 자리를 비울 경우에 대비해서 너덧 마리씩 미리 떠서 포장해 두는 것이었다. 그의 손이 날렵하게 움직이는 동안 공씨 아내는 생선 대가리와 내장을 챙겼다. 무우 듬성듬성 썰어 넣고 얼큰하게 한 냄비 끓여서 봉사시설에 보낸다고 했다. 공씨 부부의 편안하고 환한 얼굴은 마치 천사가 멀리 있지 않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조선일보 201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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