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戀人/위영
초가을 숲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습기 없는 청랑한 공기를 지나면서 햇살의 몸은 더욱 가벼워져 있다. 바람은 선선하고 감미로워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무두질 해주는 것 같다.
사람의 기척이 없는 숲 어디쯤에서 우뚝우뚝 서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굵은 숨을 토해내 본다. 호흡은 살아있는 증표이기도 하지만 나 아닌 사물과의 친밀한 교류이기도 하다. 특히 숲 가운데 서서 하는 호흡은 숲에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나무들과의 합일이며 더불어 연인이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는 내안에 나는 그 안에....... 소박 하지만 절대 절명의 법칙인 하나 되는 연인관계가 호흡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무들ㅡ ‘들’이라는 복수가 허용되는 특별한 연인관계. 질투나 성냄이나 독점하려는 고약한 성품이 필요치 않는 연인 사이. 숲에 존재하는 사랑스러운 그 연인은 편안한 쉼을 주며 삶을 사유하게 하는 지혜로운 연인이다. 그는 단순하면서도 소박하다. 그와 더불어 있을 때면 그에게 뿐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가장 솔직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연인과 함께할 때면 미끈거리는 교어(巧語)가 필요치 않다.
조금 더 깊게 초가을의 숲을 음미하다 보면 거기 미묘한 생기가 감지되기도 한다. 마치 의도하지도 못했던 갑자기한 죽음을 맞이한 초상집 같다고나 할까, 조용하지만 놀라움 가득하고 깊은 슬픔에 젖어 있지만 통곡이 흐르지 않는, 그러면서도 수많은 손님들을 치러내야 한다는 동중정의 흐름ㅡ 숲에도 그런 긴박함과 의연함 혹은 슬픔이 가득하다. 아마 숲의 사계 중 초가을 숲은 가장 다혈의 시간일 것이다.
사실 봄과 여름 동안 숲의 모든 것들은 고요하다. 작은 풀씨와 덩굴들 그리고 나뭇잎들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태어나기 위하여, 태어나서 자라나기 위하여, 자라면서 성숙해지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 속에만 침잠해 있다.
초가을 숲은 그런 그들이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보게 되는 완숙의 시간이다. 자신이 딛고서 있는 부모라는 무한한 존재, 형제와 이웃들, 벗들의 손짓이 보이는 시간이다. 사랑의 시간, 사랑의 축제가 시작되었는가 싶은데, 축배의 잔을 들고 부라보를 외치는 순간, 붉은 갑옷의 장군과 노란 방패를 든 이별의 여신도 함께 파티에 초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 역시 샴페인 잔을 높이 들고 미소를 지으며 연호하고 있는 모습을........
가을 숲은 슬픔과 기쁨이 조우하게 되는 교차로이다. 만남이 반갑고 다시 또 이별이 서러워 잎들은 바스락거리며 서로를 만지며 온몸을 흔들어 댄다. 그들은 서로에게 뜨거운 관심을 표명하며 사랑을 고백하고 슬픈 별리의 언어를 몸짓으로 표해내면서 붉게 혹은 노랗게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한다.
나무의 자연스러운 죽음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의 생명이 겨우 백여 년 이쪽저쪽인데 반하여 흔하게 볼 수 있는 갈참나무는 700살이 보통이며 소나무, 전나무는 그보다 조금 적은 600여년이라고 한다. 그 장구한 생명의 경이도 놀라울 정도인데 10,000년이 넘는 생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브리스틀 콘 소나무도 있다. 강수량이 고작 3백 밀리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고산지대에서 살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에너지로만 살기 때문에 키도 작은 소나무이다. 건조한 날씨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브리스톨 콘은 자신의 조직을 스스로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수명이 다한 뒤에도 작은 조직인 부름켜와 함께 마치 영원처럼 살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가장 오래 살아있게 하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고통스런 삶에 대한 극명한 해석을 몸으로 보여 주고나 있다할까. 그러나 생명이 길다 하여 과연 나무에게 죽음이 없을까?
아마 나무는 죽음을 벗 삼아 생명을 이어가는 가장 고통스럽고 아픈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가지는 살아 있는 나무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나무는 그 죽은 가지를 버려두지 않고 자신의 몸 안으로 밀어 넣는다. 옹이 뿐이랴, 이른 봄 온 힘을 다해 새 잎들을 몸속에서 틔워 낸 후 무더운 여름 까지 나무는 끝없는 헌신으로 나뭇잎들은 무성하게 자라나게 한다. 다 자라났나 하면 참척의 시간이 다가와 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일이라 하여 내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초가을. 이별의 예후로 인한 견고한 슬픔 때문에 나무들의 몸은 한 해중 가장 가벼워진다. 바람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고통 때문에 나무는 흔들리며 아파한다.
초가을의 숲은 그늘이 짙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름과는 다르게 그늘의 모습은 짙고 선명하다. 그늘은 존재 뒤의 존재이다. 그래서 더욱 정직한 존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실팍한 나무둥치를 만나면 가만 기대어 앉는다. 이르게 물든 나뭇잎 몇 이파리 둥치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팔랑거리는 나뭇잎 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마음 고요하다면 나무의 나이테를 기억해볼 일이다.
나무의 나이테에는 나무의 언어가 차곡차곡 배어있다. 나무라고 병을 앓지 않겠는가? 산불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바람은 어이 그리도 거세게 불어오는가? 태풍이나 수해로 인해 나무는 부러지며 뿌리내려야 할 흙들은 모두 씻겨 내려가 버리고, 숲속의 모든 존재들은 고독하다.
고난의 시간 속에서 흘러나오는 고통의 소리들을 나무는 속으로 삼켜낸다. 침묵으로 인내한다. 슬프고 외로워도 그저 묵묵히 삭혀낸다. 대다수 사람들의 못다 한 삶의 표현이 그러하듯 나무의 언어인 나이테도 신산스런 삶의 징후들인 것이다.
숲도 세상인 것을. 정글의 법칙이 숲이라고 하여 피해가겠는가? 먹고 먹히는 전쟁은 숲속에서도 장구하고 격렬하게 지속 된다. 살아야만 하는 존재의 법칙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의 이해는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다. 슬프게도 식물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도망갈 수도 없는 약자이다. 살아야 하는데........ 이 공격을 이겨내야만 하는데........... 그 절망적인 상황을 극도로 승화시킨 물질이 바로 송진을 비롯한 피톤치드이다. 사람처럼 죽고 죽이는 대신 자기 방어 물질을 내보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득도를 나무들은 이루어 낸 것이다.
숲은 인생을 축척해서 보여주는 삶의 전도(全圖)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숲의 나무들은 세상의 거울이며 거룩한 스승이 아닐까. 숲의 왕성한 생명력ㅡ 죽었으면서 살고 살면서도 죽음을 이어가는 질긴 생명력은 우리네 자화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모든 인생처럼 숲에도 생사화복은 존재한다.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눈부시게 현현하는 죽음의 그림자. 그래서 오히려 초가을 숲에 서면 생과 사의 아득한 거리가 한 눈에 보이기도 한다. 숲의 길은 죽음으로 이어진 듯 보이나 그 길에는 삶의 향기 또한 그득하다.
미로 앞에 서있는 것처럼 막막하거나 지독히도 마음 산란할 때는 가을 숲을 찾아가 볼 일이다. 살아가고 있으나 죽음을 향해 전진해 가고 있는 유장한 인생길이 숲 가운데서 굵고 선명하게 보일 것이고 그 순간, 세상과 더불어 싸워야만 했던 이유들이 아주 작아지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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