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스크랩] 제7회 동상 <팔당 우체통/노기화>

테오리아2 2014. 8. 22. 19:07
728x90

팔당 우체통/노기화

 

유치한 편지를 또 썼다. 창피할 일도 아닌데 매번 망설여지는 것이 편지인가보다. 쉰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받아줄 상대가 있다는 것으로 나는 즐겁다.

조안리 팔당댐 위에 있는 나만의 우체통에는 바람이 주인이다. 내가 부친 편지를 날려 보내는 것도 바람 몫이다. 그이가 누워 있는 그곳에 갈 때마다 편지를 놓고 오기 시작한 것이 다섯 해가 지났다.

열여섯 해를 함께하던 남편이 떠나던 그해 가을, 영구차 밖으로 보이는 코스모스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갑자기 쌀쌀맞은 친구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너는 혼자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강물은 그냥 떠밀려서 흩어지는 그이와 나의 연인처럼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팔당대교가 보이는 산언저리에 그이의 새 주소가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혼자만의 몫이 되어버린 그리움의 더듬이는 내 발길을 팔당 가는 길로 이끌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놓아도 편한 상대가 갑자기 곁에 없다는 것이 외로움인가 싶었다. 그가 들어줄 수도 없는 투정을 하고 나서 하늘을 둘러보면 온통 내편인 듯싶어 철없이 시원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팔당을 오가는 동안 스스로를 치유하는 예방주사를 맞고 오는 느낌이랄까. 혼자라도 둘이 함께 있는 듯한 면역기능이 첨자 생기는 것처럼 쓸쓸하게 산을 내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내려올 때마다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면 무언가 마음에 걸려 주춤거리게 되는 날이 많아졌다.

우는 아이를 떼어놓고 오는 엄마의 마음처럼 뒤돌아서 묘비를 바라보았다. 연애시절 "조금만 더 있다 가" 하고 조르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날 처음 메모지에 짧은 편지를 썼다. "나는 하늘만 바라보는데 당신은 내려다만 보니 고개 아프지 않아 좋겠다."

묘비 앞에다 그 메모지를 놓고 작은 돌로 눌러 놓았다. 살아 있는 내가 참 욕심도 많지 싶었다. 바람에 날려가도 어쩔 수 없는 것을, 산을 내려오는 동안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최소한 돌아오는 내내 그이의 웃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그이가 잠들어 있는 그곳에 어떤 날은 낙서처럼, 때로는 연서처럼 진하게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든 창피할 것도 없는 사이가 부부라는데, 곁에 있을 때 표현하지도 못했던 감정들이 왜 갑자기 허망한 용기만 생기는지 나잔이 우스웠다.

'여보'라는 말도 처음이고, '사랑한다'하는 말도 처음이지 싶었다. 바보 같은 짝사랑을 제대로 해보는 심정이랄까. 그와 살아온 지난날의 추억들이 아프게 그립다가도 열심히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어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버팀목이 되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수다 떨듯이 쓰는 글들이 때로는 비에 젖고 바람에 날아가 버려도 나는 상관없다. 가수 조용필이 부른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처럼 그의 영혼이 느껴지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나 혼자 만들어 놓은 팔당 우체통에 수취인은 하늘나라에 있지만 편지를 들고 부치러 가는 즐거움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어느 날 아들이 생각나 혼자 산소를 가셨다가 남아있는 편지를 아버님께서 보신 모양이었다. 아버님의 젖은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들려왔다."얘야, 이제 그놈 생각하지 마라.... 니 편지가 젖어서 찢어져 있구나." 대개는 날아가 버렸는데 그 편지는 젖어서 묘비에 붙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닌 것을 알았다. 잠시 민망했지만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이젠 편지를 코팅해서 놓고 와야겠다고. 그날 이후 팔당 우체통에는 그 누가 보아도 잠시 편안해지는 글은 코팅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이가 내게 보낸 편지는 연애시절에 준 단 두통밖에 없다. '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광고 문구까지 동원해서 쓴 그의 프로포즈 편지. 최고의 악필에 몇 줄 뿐인 그의 연애편지가 너무 솔직하고 멋없어서 오히려 그에게 빠져버린 나. 그의 진실이 너무 투명해서 쉽게 대답하고 후회했었는데, 나는 또 그 두 통의 편지 때문에 한없이 긴 답장을 보내고 있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유치할 정도의 간지러운 편지를 쓰고는 다시 읽어 보지 않는다. 다시 보면 찢어 버리기 십상이다. 내가 그이를 향해 쓴 편지는 산을 내려오면서 날려 보내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우체부 역할은 바람이 다 하니까. 그이가 잘 부르던 노래가사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바람이 불러오면 귀 기울여 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아가는데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 소리라 생각하지 마.

 

팔당 우체통에 바람이 다녀갔을까. 오늘도 나는 하늘을 바라다본다.

출처 : 고울문학회
글쓴이 : 인도공주(표수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