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문화체험 수필대전 수상작-
음지에서 피고 지고
- 김씨고택 -
산수가 맑고 인심도 좋아 예로부터 많은 인물을 낳은 ‘삼청(三淸)의 땅’, 청도는 이름만큼이나 산자수명하다. 특히 동창천을 따라가는 길은 ‘길맛’이 성찬이다. 내호리에는 유치환 시인과 이영도 시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맛’이 있고, 신지리에는 운강고택을 비롯한 여러 고택의 ‘집맛’이 있다. 그 여운을 안고 ‘절맛’을 보러 운문사로 가는 도중, 나그네는 샛길로 빠져 샛강을 건넌다. 임당서원과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고택이 있는 마을, 임당리다.
마을을 가로질러 기와돌담 유려한 곡선을 따라가니, 솟을대문이 특유의 색깔로 나그네를 맞는다. 암갈, 암록, 역사의 색깔이다. 대문을 들어서니, 한눈에 보아도 빈집이다. 한해살이의 일대기를 누가 기록하고 또 누가 평가할까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초목들이 사람의 역사가 멈춘 현재를 푸르게 채색하고 있다.
이 고택의 공식 명칭은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이다. 사대부의 집은 보통 자신의 아호를 따거나 의미 있는 이름 붙이는데, ‘아무개씨 고택’이라니, 택호도 현판도 없는 이 가문에 관한 기록은 최근에 발견된 가첩(족보)뿐이라고 한다. 16세기 한 내시가 이곳에 정착한 이후 꾸준히 대를 이었고,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김일준 선생(16세, 1863~1954)이 낙향해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17세부터는 직첩(職牒)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이후에는 정상 부부관계로 대를 이었다고 전한다.
내시는 부인을 둘 수 있었다. 성(姓)이 다른, 주로 가난한 집 남자 아이 한 명을 양자로 들여 8세쯤이면 궁궐로 보내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소양을 쌓게 했다. 왕실의 비밀이나 대전의 정보를 접하다보면, 정변에 휩쓸리고, 궁녀들과 접하다보면 자칫 금도를 넘어 참수 당하기도 쉽거늘, 400년 넘게 가계를 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책임감과 인내심이 깊은 이들은, 낙향해서도 왕실에 누가 될까 싶어 비망록 한 장 남기지 않고, 말조심하며 살다가 모든 비밀도 땅속으로 가져갔으리라.
사당의 기와에 찍힌 연호로 미루어 김씨고택은 1686년경 지었다고 추정되나, 건축양식으로 보아 19세기에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 사랑채, 작은사랑채, 안채, 고방채, 작은고방채, 사당으로 이루어졌는데, 안채와 작은사랑채 그리고 두 고방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ㅁ'자를 이루고 있다. 안채와 안마당은 건물과 담으로 막혀있으며, 큰사랑채는 솟을대문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바라보고 있다. 일반 사대부의 저택도 내외공간을 구분했으나 이 정도로 엄격하지는 않다. 안채를 드러내지 않고 안주인의 동선이 일정한 영역을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말하자면, 건물구조에 ‘폐쇄’와 ‘감시’를 우선 반영했기 때문이다. 작은사랑채와 중문 사이 판벽에 뚫어놓은 감시구멍이 이채롭지만, 내관가의 예법을 지키라는 상징이라고 여기니, 오히려 그 모양새가 앙증맞기만 하다.
음지에서 왕조를 떠받친 내관의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남향이 가능한 지형과 공간임에도 몸채가 하늘의 해를 등지고 지상의 해가 있는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햇빛이 덜 드는 약점은 안채 마당에 하얀 자갈을 깔아 보충했다. 사랑채는 두리기둥에 팔작지붕으로, 안채는 사모기둥에 맞배지붕으로 하여 남녀의 위계질서를 세웠다. 안채 뒷문은 개방식으로 만들어 답답한 안주인의 마음을 배려했으며, 후원 낮은 기단 위에 낮은 굴뚝을 쌓아 습기와 곤충을 막도록 했다. 사당은 솟을대문을 바라보고 있으나, 후손은 다 떠나고 호기심 품은 객들만 드나들어 나그네의 마음이 수수롭다.
눈에 담는 고택답사는 자칫 인증사진 몇 장만 남는다. 김씨고택은 가슴으로 맛을 보는 집이다. 청도 특산물 ‘씨 없는 반시’는 달지만, 김씨고택은 달지도, 쓰지도 않다. 겉은 여느 사대부의 집과 다르지 않으나, 집안 곳곳에 서려있는 내밀한 아픔을 생각하면, 뭐랄까, 가난 때문에 소풍을 못 간 유년의 기억처럼 아릿한 맛이라고 할까. 게다가 껄끄러운 껍질을 벗겨야 내밀한 속이 보이고, 속도 쉬 상하는 복숭아처럼 그 이야기도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내시는 하늘이 내린 중요한 권리와 행복 하나를 거세한 사람이다. 어쩌면 이들은 신분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거세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본능까지 거세할 수 있었겠는가. 사랑을 나누고 아기를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은 안팎이 다르지 않듯, 안주인의 애환도 이에 못지않았을 터, 안주인은 부모상을 당했을 때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하니, 아기 첫울음소리 한 번 들리지 않은 집에서 아녀자 웃음소린들 시원하게 한 번 담장을 넘었겠는가. 경계 너머는 들추지 않는다는 무언의 약속 때문에 뒷이야기는 짐작만 할 뿐, 그나마 대지라도 넓어 안주인은 채마밭을 일구고 화초를 키우며 불임의 모성을 달래지 않았을까.
김씨고택도 사대부가의 가옥배치에 충실했으나, 툇마루나 대청 아래에 낮은 섬돌 하나만 있을 뿐 계단이 없고, 공부방도, 딸이 머무는 별당도 없다. 가옥구조에 아이는 고려하지 않은 셈이다. 전체 구도를 보면 안팎의 조화가 약간 어긋난 느낌이지만, 시대의 가치규범과 생활양식에 주인의 운명적 삶까지 고려하다보니 구도만 다를 뿐, 한 가문의 역사가 피고 진 흔적은 고색창연하다. 산의 정기가 지붕을 타고 암녹색으로 흐르고, 옛 사람의 달빛 감성이 문살을 따라 흐른다. 기둥을 만지니, 비틀어지고 갈라지면서도 집안을 떠받치는 가장의 소명이 의식을 타고 흐른다. 모서리가 닳은 문지방이 집도 사람과 살붙이임을 말없이 말한다. 비바람과 부대낀 나뭇결, 이끼 피고 진 돌덩이, 하염없이 입을 벌리고 있는 아궁이, 역사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오롯한 세계에서 나그네는 콘크리트 집이 즐비한 현재를 투영해본다.
우리 시대의 집. 그러니까, 그들만의 아성을 구축하고 첨단 경비시설로 주변의 모든 움직임까지 감시하는 집에 비하면, 김씨고택이 전하는 인심은 널찍한 곳간만큼 넉넉하다. 재산을 많이 모은 김일준 선생은 평소에도 이웃에 많은 것을 베풀어, 그가 세상을 뜨자 조문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니, 통정대부 직위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닌 듯하다. 내관가의 마지막 꽃을 ‘가진자의 미덕’으로 활짝 피운 선생이지만, 그 공덕을 알리는 문구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으니, 이러한 정신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인색할 정도로 우리시대가 메말랐을까.
대문을 나서 주변을 둘러본다. 담장 안에 핀 꽃이나 담장 밖에 핀 꽃이나 다 같거늘, 담장 밖에 핀 꽃이 더 해맑게 보이는 까닭은 왜일까. 어디서든 자기 생을 꽃피우는 생명으로 본다면 다르게 보이지 않을 터, 바람 한 자락이 두 씨앗의 운명을 갈랐듯, 인간도 태어날 자리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기에 내일을 알 수 없는 ‘운명의 베일’에 가린 착시다.
양지든, 음지든, 과거와 미래의 점이지대에 사는 우리는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 나와 내 시대를 빛내려 최선을 다한다. 비록 빛은 나지 않을지라도 음지에서 봉사하고 역사의 밑거름이 된 이들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는 더 나은 문명을 누리며 살지 않는가. 그리하여 길 위의 명상에게 역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철학을 주는 것이리라.
외진 길섶, 햇빛을 받을 권리까지 다 누리지 못해도 자기 색깔로 피는 생명들이 더없이 고마운 날이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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