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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필]절묘한 배역(配役)?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1) / 신현식

테오리아2 2013. 1. 1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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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한 배역(配役)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1) / 신현식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DVD로 보았다. 원작도 영화도 많은 호평을 받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거칠고 차가운 인상의 크린트 이스트우드(Clinton Eastwood)의 연기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였다.

크린트 이스트우드 하면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발인 ‘황야의 무법자’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넝마나 다름없는 망토를 걸치고 골이 깊게 패인 차갑고 거친 얼굴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는 흙바람 날리는 서부영화에나 딱 들어맞는,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용모다.

또 그가 나오기 이전까지의 서부영화는 총을 빨리 뽑는 자가 승리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이스트우드는 달랐다. 총을 뽑지도 않고 악당이 쏘는 총알을 다 맞는다. 그러나 쓰러져서는 일어서고 쓰러져서는 다시 일어서서 단 한방의 총알로 상대를 쓰러뜨렸다. 만화처럼 그는 가슴에 철판을 숨겼던 것이다.

마카로니 웨스턴 시대가 가자 그는 ‘더티 하리’에서 냉혈한 형사 역할을 맡는다. 그때도 역시 낡은 홈스방 재킷에 주름투성이의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나 악당이 먼저 총을 뽑도록 한 다음에 총을 뽑았다. 법정에서 정당방위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한 남자가 픽업트럭을 몰고 시골 외딴집 앞에 서는 것이 스토리의 시작이다. 집에는 중년의 여자 혼자 있다. 남자는 잡지의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왔다며 다리의 위치를 묻는다. 여자가 부지런히 설명하지만 그는 잘 알아듣지 못한다. 여자는 할 수 없이 동행한다. 이것이 여자가 남자에게 보인 첫 번째 호의였다.

남자는 다리에 도착하여 간단한 사진 몇 컷을 찍고 돌아오며 그녀를 집 앞에 내려 준다. 차에서 내리며 여자는 남자에게 차 한 잔 하고 갈 것을 권한다. 여자 혼자만 있는 외딴 집에서 말이다. 이것이 두 번째 호의였다.

남자는 집으로 들어간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는 이곳은 시골이라 식사할만한 곳도 없을 테니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한다. 싫다고 할 남자가 있겠는가. 이것이 세 번째 호의였다.

남자는 마당의 수돗가에 나가 윗옷을 벗고 씻는다. 이층으로 올라간 여자는 창을 통해 남자의 벗은 몸을 몰래 본다. 남자는 여자의 시선을 느낀다. 여자는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독백까지 한다. 이것이 네 번째 호의였다.

저녁을 먹으며 시작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산책길로 이어진다. 남자는 시를 읊조린다. 예이츠의 시가 아니냐며 여자는 감탄을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미묘한 대화는 계속된다. 여자는 “우리가 지금 자식들에게 말 못할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라는 모호한 말을 한다. 나쁜 짓을 하자는 반어법이 아닌가. 이것이 다섯 번째 호의였다.

이어서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간다. 남편과 자식이 며칠간의 박람회에 가 있는 중이라며 여자는 남자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는다. 남자는 가정을 가지는 것이 의무냐고 대꾸한다. 잘 나가던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남자가 가봐야겠다며 나간다. 남자가 가버린 외딴집의 전축에서는 느린 곡조의 음악이 흐른다. 초조해 하며 실내를 서성거리던 여자는 돌연 종이를 꺼내 메모를 한다.

“저녁식사를 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오세요.”

한밤, 여자는 차를 몰아 내일 그가 촬영하기로 한 다리로 달려가 메모를 붙여 놓는다. 이것이 여섯 번째의 호의였다.

다음 날, 남자가 메모를 발견하고 전화를 한다. 남자는 다른 다리도 찍어야 된다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한다. 여자는 흔쾌히 승낙한다. 그러나 남자는 나쁜 소문이 나면 당신에게 좋지 않으니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 여자는 그런 걱정을 왜 하느냐며 나무란다. 이 정도면 노골적이 아닌가. 이것이 일곱 번째의 호의였다.

두 사람은 사진을 찍고 저녁에야 돌아온다. 남자가 샤워를 해도 좋겠느냐 묻는다. 여자는 그런 걸 왜 묻느냐는 투다. 샤워를 마친 남자가 내려오자 여자도 샤워를 하겠다고 한다. 한 밤, 그것도 외간 남자와 단 둘이 있는 외딴집에서 샤워를 하겠단다. 무장해제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것이 여덟 번째의 호의였다.

여자가 샤워를 마치고 내려오자 이웃마을의 여자에게서 전화가 온다. 낯선 남자가 사진작가라며 마을을 다니니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내용이 압권이다.

“뭐 사진작가가 길을 묻는다고? 난 모르겠는데…….” 시치미를 떼며 남자에게 의미 있는 웃음까지 짓는다. 이쯤 되면 백기투항이 아닐까. 이것이 아홉 번째의 호의였다.

전축에서는 끈적한 노래가 흐른다. 두 사람은 꼭 끌어안고 춤을 춘다. 여자와 남자의 뺨이 맞닿는다. 숨이 가빠진다. 천하의 이스트우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슬며시 총을 빼어들 심산이다. 그는 귓속말로 나직이 말한다.

“싫으면 지금 말해요.”

그러자 여자는 스르르 눈을 감으며 말한다.

“아무 말 마세요.”

완벽한, 너무나 완벽한 열 번째 호의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미국에도 통하는 모양이다. 황진이를 뿌리친 서화담도 이 정도가 되면 과연 버틸 수 있었을까. 이스트우드는 이번에도 가슴에 철판을 깔았는지 그렇게 당하고도 총을 뽑지 않았다. 아무렴, 총이란 섣불리 뽑아서는 안 되는 무기가 아닌가. 잘 못 쏘면 감옥행이다. 함부로 총을 쏘아대는 세상에 그는 좋은 본을 보였다. 그리고 ‘더티 하리’에서처럼 정당방위 입증도 완벽하게 했다.

영화를 다 보고서야 배역에 대한 내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이스트우드였는지가 이해되었다. 제작자가 영화의 판권을 손에 쥐자 곧바로 크린트 이스트우드를 주연 배우로 정했다고 한다. 아마 서둘러 총을 뽑지 않는 그의 차가우면서 침착한 이미지를 염두에 두었으리라. 아무튼 그에게 딱 들어맞는 절묘한 배역이었음에 틀림없다.

 

출처 : 신현식의 수필세상
글쓴이 : 에세이 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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