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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구일보 <에세이 마당> 아름다운 `굿바이` /정명희

테오리아2 2013. 4. 1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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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굿 바이’
의미있게 삶을 내려놓는 것도 중요
2013.03.25 01:00   

 

정명희

대구의료원 진료처장

  화사한 꽃이 핀 주말, 쓸쓸한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선다. 작은 일에 기뻐하고 괴로워하며 한 생을 열심히 건너왔을 이들이 삑삑대는 기계음 속에 흔들리는 생명줄을 붙잡고 있다. 누구보다 건강체였던 어머니는 전화 때마다 ‘잘 있어’라고 늘 마지막처럼 인사하셨다. 그리고 당부했다. “갈 때 되었다 싶으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그냥 놔두어라.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일, 그것이 효도이니 명심하고 꼭 그리 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일,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온 정성을 쏟아 간호하고 돌보는 것 또한 가족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닐까 싶어서다.
  이래저래 심란해지면 문득 하늘로 돌아간 한 남자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연세 든 이의 병동에 그가 입원했다. 깡마른 체구에 눈만 까맣게 살아있어 저절로 자세를 가다듬게 하던 분이었다. 큰 사업체를 운영했던 오십 중반의 그가 체중이 자꾸 빠져 검사를 했더니 췌장암 말기였다.
수술도 못 할 상황이라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는 그날로 단호한 결심을 했다고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다가 후회 없이 마무리하고 미련 없이 이승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병원에 와서 맨 처음 한 일은 남들에게 그 뜻을 정중히 알리는 판을 거는 것이었다. 단정하고 유려한 필체로 부탁을 적어 부적처럼 머리맡에 붙여둔 그의 글은 A4 한 장 가득했다. “나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산소도 정중히 사양합니다. 심폐소생술도 정중히 사양합니다. 비 위관도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 인간답게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붓 펜으로 정성 들여 쓴 간곡한 부탁의 말이었다. 그 아래에 글 쓴 날짜와 본인의 서명까지 넣어 코팅해 둔 한 장의 종이, 바로 사전 의료 의향서였다.
  사양의 글을 머리맡에 붙여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읊던 그가 오래지 않아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가족들 모두 그의 뜻을 존중해 짚불처럼 잦아져 가는 그를 조용히 배웅했다. 슬픔 가운데서도 떠나는 이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울음을 참던 그들이 참 대단해 보였다.
사랑하는 이가 우리 곁에 좀 더 머물러 주기를 바라며 연명 치료를 하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어쩌면 힘든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간혹 환자가 미처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지레 포기하는 예도 있기는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생의 마무리이겠는가.
  기쁜 마음으로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참 축복받은 것이리라.
  며칠 전, 품위 있는 죽음이라는 기사 속 ‘웰 다잉 십계명’이 마음을 끌었다. 첫 번째 버킷리스트 작성하기, 두 번째 건강 점검하기, 세 번째 법적 효력 있는 유언장 자서전 작성하기, 네 번째 고독사 예방하기, 다섯 번째 장례계획 세우기, 여섯 번째 자성의 시간 갖기, 일곱 번째 마음의 빚 청산하기, 여덟 번째 자원봉사하기, 아홉 번째 추억 물품 보관하기, 열 번째 사전의료의향서 작성하기였다.
  불치에 가까운 병을 얻어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산속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던 어느 교수는 그곳에서 탐욕과 집착이 만병의 근원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 보면서 마음을 내려놓는 일, 바로 하심(下心)의 자세가 늘 필요한 것 아닐까.
  당하는 죽음이 아닌 스스로 맞이하는 그것을 위해서는 사전의료의향서를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리라. 문상은 어떻게 받아라, 돈은 받지 마라, 간단한 관을 써라, 수의 대신 깨끗한 옷을 입혀 화장해달라는 장례 의향서도 덧붙여서 말이다.
  “죽음은 문이야. 문을 열고 나가면 다음 세상으로 나가는 거지. 인생의 마지막 안식처는 남이 정해 주는 거야”. 영화 ‘굿 바이’ 대사가 위안이 되는 봄날 저녁이다.

 

 

 

출처 : 청람수필
글쓴이 : 호숫가(윤상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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