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ㅡ1970년대
<28>정호승과 김명인
정규웅 | 제128호 | 20090823 입력
1973년도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는 70년대의 다른 해에 비해 알찬 수확을 거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선작이 발표됐을 때 여러 작품에 대해 문단의 찬사가 쏟아진 것도 그렇지만 당선자 가운데 상당수가 데뷔 이후 잇따라 주목을 끄는 작품들을 내놓아 70년대 문단의 중견으로 발돋움한 사실로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시 부문의 김명인ㆍ정호승ㆍ김승희ㆍ김창완ㆍ이동순ㆍ유제하, 소설 부문의 박범신ㆍ이경자ㆍ최학ㆍ이청ㆍ이태호 등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 정호승과 김승희는 후에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서도 당선해 두 분야에서 활약했다.
이들이 등단 직후 똘똘 뭉쳐 ‘73그룹’이라는 문학 서클을 만든 것도 그와 같은 기대와 관심을 서로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향후 문학 활동의 초석으로 삼고자 하려는 집합된 의도가 숨어 있었다. ‘73그룹’을 만들면서 이들은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동인 활동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거의 실현되지 못했다. 이들 대부분이 가난한 시골 출신인 데다, 대학 재학 중 또는 졸업했더라도 아직 반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해 동인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조차 부담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덕수궁 근처에 있던 서울시 문화공보관에서 시화전을 연 것은 ‘73그룹’을 세상에 알리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비록 특기할 만한 동인 활동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73그룹’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70년대의 대표적인 시 동인지인 『반시(反詩)』 동인이 바로 ‘73그룹’을 모태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73그룹’ 멤버 가운데 김명인과 정호승이 시동인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김창완ㆍ이동순이 가세했으며, 막판에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출신인 김성영이 참여했다. 이들 다섯 명의 동인으로 구성된 ‘반시’는 1976년 6월 제1집으로 문단에 첫선을 보였다. ‘반시’는 8집까지 내는 동안 동인들이 많이 바뀌게 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동인으로 남은 시인은 김명인과 정호승이었다.
그런데 김명인과 정호승은 1973년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과정에서부터 묘한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그해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분야의 당선자를 가리는 작업은 꽤 난산이었다. 최종 후보에 오른 정호승의 「첨성대」와 김명인의 「출항제」를 놓고 김현승·김종길 두 심사위원의 의견 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당선작 결정이 자꾸 늦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우니 두 작품을 모두 당선작으로 내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전례가 없어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김현승의 의견을 좇아 당선자는 정호승으로 결정됐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발표 전에 각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자를 서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정호승의 「첨성대」가 이미 대한일보 시 부문의 당선작으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중앙일보의 당선은 김명인의 몫이 되었다. 똑같은 작품을 여러 신문에 투고하지 않는다는 것은 응모자들의 상식이며 불문율이었으나 아직 22세의 대학생이던 정호승이 이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김명인이야 시적 재능을 검증받은 셈이므로 언젠가는 등단했겠지만 정호승으로 인해 그 시기는 훨씬 늦춰질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아직 대학생이던 정호승과,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김명인은 네 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73그룹’의 지붕 밑에서 ‘시로서 시대적 절망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의 길’을 가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다. “시야말로 우리네 삶의 유일한 표현 수단임을, 시야말로 시대의 구원을 위한 마지막 기도임을 확신한다”는 『반시』 창간의 목적은 바로 이들에게 시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김명인과 정호승이 주도한 『반시』는 지금까지도 70년대를 대표하는 시 동인지로 평가되고 있다. 3집에 이르러 한완상ㆍ신경림ㆍ김우창 등 학계와 문단의 ‘거물’들이 동원돼 글을 쓸 정도로 『반시』는 관심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1979년 두 시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첫 개인시집을 상재했다. 김명인은 ‘문학과 지성’에서 『동두천』을, 정호승은 ‘창작과 비평’에서 『슬픔이 기쁨에게』를 각각 내놓은 것이다. 두 시집에 똑같이 문단과 독자의 관심이 집중됐고, 두 시인을 70년대의 대표 시인으로 우뚝 서게 하는 받침돌이 되었다.
정규웅
중앙일보 문화부장ㆍ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평론가로 추리소설집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첨성대
정호승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흐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 단 한 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잔불이 되었다
밤마다 할머니도 첨성대 되어
댕기 댕기 꽃댕기 붉은 댕기 흔들며
별 속으로 달아난 순네를 따라
동짓달 흘린 눈물 북극성이 되었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별 하나 질 때마다 한 방울 떨어지는
할머니 눈물 속 별들의 언덕 위에
버려진 버선 한 짝 남 몰래 흐느끼고
붉은 명주 옷고름도 밤새 울었다
여우가 아기무덤 몰래 하나 파먹고
토함산 별을 따라 산을 내려와
첨성대에 던져논 할머니 은비녀에
밤이면 내려앉는 산여우 울음소리
첨성대 창문턱을 날마다 넘나드는
동해바다 별 재우는 잔물결 소리
첨성대 앞 푸른 봄길 보리밭길을
빚쟁이 따라가던 송아지 울음소리
빙빙 첨성대를 따라 돌다가
보름달이 첨성대에 내려앉는다
할아버지 대지팡이 첨성대에 기대놓고
온 마을 석등마다 불을 밝힌다
할아버지 첫날밤 켠 촛불을 켜고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 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일관(日官)이 된다
지게에 별을 지고 머슴은 떠나가고
할머닌 소반에 새벽별 가득 이고
인두로 고이 누빈 베동정 같은
반월성 고갯길을 걸어오신다
단옷날 밤
그네 타고 계림 숲을 떠오르면
흰 달빛 모시치마 홀로 선 누님이여
오늘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나는 수놓는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었다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출항제
김명인
겨울의 부두에서 떠난다.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부두의 창고 어둑한 그늘에 묻혀 남몰래 우는
내 목숨 같던 애인이여.
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지난 봄 갈 할 것 없이 우리들은 성실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맨몸으로 떠나는 날의 새벽.
눈 내리는 세계
우리들의 항해일지 속 뜨거운 체험으로 끼워 넣으며
불손했고 쓰라렸던 사랑을 덮는다.
감동도 없이 붙들어 지킬 신념도 없이
한때 깊어 빠져가던 우리들의 탐닉,
일상의 식탁과 우울한 밤의 비비적거림이
한갓 구설의 불티처럼 꺼져가고 있다.
이제는 당당하게 떠나리라,
아, 실어 올린 全生涯는 제 나이만큼 선창 속에서 보채고
흰 가슴에 사나운 물빛을 켜들고
먼 바다로 달려가는 무서운 시간들.
내 의식의 깊이를 횡단해 가는
알 수 없는 설레임도 들리고 있다.
차가운 눈발의 동행 속에서
하얗게 서려 오던 유년의 숲,
꺾어진 꽃 대궁을 끌어안고
그때 눈물로 다스리던 가슴이여.
북풍처럼 사납게 몰려 와서
목숨의 판 끝을 쪼아대는 이웃의 이목 속에서 피 흘리고
문득 생사의 늪에 앙상한 채 버려지던 지난날,
마지막 한 방울의
숨어 있던 야성의 피가 깡깡 굳은 풍토병을 적시고
한 세대의 사슬을 의롭게 풀어내던 것을,
질기고 칙칙한 동면을 몰아세우고
우리들은 깊이 잠든 실속들을 마저 깨웠다.
불면으로 지새우며 밤새껏 항해도를 뒤적이며
버려진 모든 목소리를 새롭게 걸러내며
내 울음이 시대의 물목을 지켜서고.
이윽고 여명 속에 떨어지는 아득한 별빛,
우리들은 마침내 물빛 푸른 어장을 찾아내었던.
풀려나는 긴장으로 또 한번 감기는 눈꺼풀 속을
파고드는 새벽잠을 털어내고
성실한 두 팔로 기어오르는 불안을 뿌리칠 때,
우리들은 순수한 믿음의 항해 속
차고 맑은 파도처럼 떠도는 저 보이지 않는 역사의
새로운 부활을 감지한다.
끈끈한 적의를 안개처럼 피워 올리며
난파의 갯벌을 휩쓸며 바람은
한때 우리들이 열던 출항의 부두로 내리몰지만
허나, 굳센 믿음의 밧줄을 이어 잡으며
목숨의 한 끝을 건져내는 강인한 힘,
우리들은 불의 힘에 온몸을 태운다.
아직도 몰아치는 눈보라에 하염없이 쓰러지며
이마 위에 솟는 피만큼 검붉게
胸中을 행궈내는 식솔이여,
이제는 내 돛폭의 그늘에 마저 숨어라.
신성한 믿음도 밑바닥이 보이잖게
금린 밝게 떠도는 물빛, 아침의
아아, 무한한 폐활량.
우리들은 태어나지 않은 역사의 새로운 잉태 속으로 떠난다.
온 핏속에 또다시 떠도는 체험의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비로소 우리는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出港祭,
겨울의 부두에서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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