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생목(生木)
황성진
지명이 내일 모레인 나로서는, 이제 내가 그토록 자랑스레 여겼던 것 중 하나를 잃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근래 그 자랑을 과용한 탓일까. 한 때 천리안이라 부리던 나의 눈이 자꾸 침침해지는 것이다. 아니 침침의 정도를 넘어 아예 활자 보기가 두려울 정도이니, 정녕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이란 단어가 그저 남부끄러울 뿐이다. 당초의 그 풋내는 다 가시고, 그래 남은 것이 이리 요지부동의 아픔뿐인가 싶어 가슴이 아려 왔다. 젊어 좌우 시력의 합이 무려 4.0에 가까웠고, 새 ? 그 ? 이 ? 위로 터짐 ? 아래로 터짐…, 하며 눈을 간고도 대답하던 그 유일의 시절은 이제 지나 버린 것이다.
최근에는 안목 필요함을 느끼고 좀 더 세밀히 공부한답시고 책도 읽었는데, 아 글쎄 그것이 원인이 되어 눈의 여행자가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닥치는 대로 수많은 책을 읽었다. 도서관은 물론이고 학습관에 쌓인 책들을 두서 없이 읽어댔던 것이었으니, 그래 정신의 눈은 황홀히 밝아졌으나 육체의 눈은 차츰 말라 가게 된 것이다.
아내는 노안이라 했다. 그래, 걸핏하면 책 좀 그만 보고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며 야단이다. 정말인가. 나는 눈 침침 머리 침침의 허울좋은 그 침침의 벽을 넘고자, 금주 주말은 아예 집구석에 처박혀 나오질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한답시고 부석거리며 뛰어다녔고, 빨랫감이 탈수되었던지라 모처럼 놈들을 툴툴 털어 널었다. 그리고는 정원 채마밭에 심은 채소를 아예 이 잡듯이 뒤져 벌레를 잡아냈다. 채소의 잎과 채색이 비슷하여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그 벌레. 그 놈들을 두드려 방치고는 송송 뚫린 가녀린 잎들을 보았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처럼 처연히 이파리를 뻗은 모습이 안쓰럽게만 보였다.
부석한 손놀림을 마치자 아내는 감자를 쪄 놓았으니 와서 먹으라 했다. 햇감자랄 토실토실 맛도 좋다며 그것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벌린 입 사이로 감자의 속살이 하얀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감자를 입 안 가득 집어 넣었다. 터벅한 맛이 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숨이 탁 멎는 듯한 이 느낌. 이것이 바로 숨 넘어간다는 말의 진실이구나 생각하며, 아내가 떠 온 물을 들이키고서야 겨우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십여 분 지났는가 싶은데, 생목이 올라왔다. 예의 감자가 위액에 버무려져 시큼하게 올라온 것이다. 눈도 침침한데 소화기관마저 이젠 제 기능을 못하는가 싶어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육신의 기관이 이러할진데 정신의 기관이야 오죽하겠는가 싶어 더더욱 아늑해지는 거였다.
그러면서 엊그제 보았던 작가 박능숙의 ‘보(保)’ 라는 수필이 생각났다. 아니, 그 수필의 주인공 ‘나’가 생각났던 거였다. 그녀도 이리 턱 숨이 멎었으리라.
‘보(保)’ 는 출가한 딸을 위해 고향의 산물을 꾸려 오시는 친정 어머니의 해잔한 사랑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친정 어머니의 보퉁이에는 늘 고향의 산물이 들어 있어서 봄이 오고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작가는 보퉁이를 태반에 비유하면서 그 속의 산물이 양수가 되어 자신을 키우고 있음을 묘사한다. 바로 양수 속의 공간이 현상의 우(優)와 열(劣), 강(强)과 약(弱), 미(美)와 추(醜)를 바로 볼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출가한 딸을 위한 친정 어머니의 사랑처럼 그렇게, 철철철 삶의 지혜가 되어 그렇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사는 세계라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은 억겁의 연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아니 천만 가닥 덕지덕지 늘어진 인연의 끄나풀이 그들의 연을 만든다 한다. 작중 화자와 친정 어머니의 만남도 그것의 하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기에 자복한 양수의 삶이 영위되었던 것이다. 그 삶의 자리가 비록 아련할망정 그것은 인연의 가닥가닥이 응어리 진 것이었으리라. 그 응어리가 바로 사라의 산물일지니, 하여 그 어느 풀보다 더 끈끈한 접착력을 보였으리니.
사랑을 한다는 것은 목이 메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사랑이 결실을 얻고, 얻지 못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란 한낱 현상에 불과하며, 실제는 늘 내면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네가 만나 서로 주고받고를 거듭하면서 소화를 통해 영양을 섭취하기도 하고, 생목을 통해 토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주는 것과 받는 것은 결국 얻어야 될 것과 버려야 될 것을 의미한다 해도 무방하다. 지명 가까운 내 시력이 천리안에서 십리안이 된 것도, 밭머리 채소의 처연한 이파리도, 따지고 보면 다 생목과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는 순환궤도 위에서 나와 채소의 순리가 궤도 이탈하였음을 의미함이니, 자연 생목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친정 어머니의 보 속에서, 열, 약, 추의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리라.
그러니 우리네가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생목과 같은 것이다. 사회라는 양수의 진위가 참과 거짓의 기준이 되어 혹은 편화를 내리기도 혹은 혼란을 주기도 하니 말이다. 그 기준점이 되는 곳에 모태가 있음이니, 우리들은 애써 그 시원의 진리를 수양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하여 진리로서의 가치는 절하되면 생목의 길을 통하여 세계의 밖으로 밀어내고, 하여 우와 강과 미의 세계를 위해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할 것이다.
아내는 내 등을 토닥였다. 앙증맞은 작은 손이 어깨며 등허리에 닿는 느낌이 너무 좋아 나는 그대로 있었다. 감자 따위야 이미 다 넘어갔건만 그냥 걸려 있는 채 있었던 것이다. 시력은 차츰 사위어들고 아슴아슴 쉰을 바라보는 목쉰 나이, 그 아픔이 다 넘긴 감자의 지대를 떠받치고 있는 거였다. 환영처럼 생목이 올라오고 그 위로 어머니의 보자기를 타고 오르는 아련한 비린 소리가 동동거리며 들려 왔다. 그 사이로 생목의 애잔한 아픔이 코끝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그룹명 > 수필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좋은수필]밤마다 호랑지빠귀처럼 울며 헤매고 있을 그 사람을 위하여 / 한승원 (0) | 2014.09.28 |
---|---|
[스크랩] [隨筆] 해바라기(197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 오창익(吳蒼翼) (0) | 2014.09.14 |
[스크랩] [隨筆] 행복은 조촐하다 / 윤재근 (0) | 2014.09.14 |
[스크랩] <112>`까막눈` 억식이의 報恩 /윤묘희 (0) | 2014.09.12 |
[스크랩] <113>수인번호 257번 /김형구 (0) | 2014.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