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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들다 / 길상호

테오리아2 2016. 4. 1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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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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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들다 / 길상호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벌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출처] 길상호시인 시편|작성자 사리꽃



길상호시인 시편 영상시 읽기

2007.05.25. 20:29

복사 http://blog.naver.com/pgema1/100037836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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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청림문학 동인. 2004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그 노인이 지은 집> 당선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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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들다 / 길상호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벌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사진 <오마이뉴스>


 

                                                                                        

    감자의 몸 / 길상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 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곶감을 깎는 일 / 길상호


햇볕 잘 익은 마루에 모여 여인들이

처마에 매달아 둘 감을 깎는다

좀처럼 떫은맛을 버릴 줄 모르는

단단한 기억들을 가지고 나와 사르륵

깎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날을 빠져나온 껍질은 어느새

기억을 더듬는 뒷길 되어 몸을 뒤튼다

 

가끔 빈 소리로 농담이 오고 갈 뿐

누구도 자신의 길에 눈을 떼지 않는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샘이 다시

터질 것 같은 자그마한 떨림이

그들의 가슴을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손마디 까맣게 물들고 저녁이 와서

깎은 감을 실에 꿰어 일어날 때

그들의 손에 들려질 것은 더 이상

떫은 감이 아닐 것이다, 처마 밑은

한 사람씩 준비한 연등으로 환해지리라

 

가을 햇살 숨어들어 검붉게 불을 밝히는,

스스로의 눈물로 밝아지는 등

여인들은 어두웠던 기억을 밝히기 위해

저마다의 연등을 깎고 있는 것이다

[출처] 길상호시인 시편|작성자 사리꽃



 

집들의 뿌리 / 길상호


어디로 이어졌는지 아직 다 걸어보지 못한 
골목들은 거기 감자처럼 달려 있는 집의 뿌리였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골목은 
기쁨과 슬픔을 실어 나르던 체관과 물관이었다 

다 허물어져 알아볼 수도 없는 이 집에 들어 

대문을 열고 드나들었을 사람들 떠올려보면

지금은 떨어져 버린 기쁨과 슬픔의 열매가 보인다 
막 화단에 싹틔운 앵두나무에는 나무를 심으며 
앵두꽃보다 먼저 환하게 피었을 그 얼굴이 있다 
마루에 앉아 부채질로 하루를 식히다가 발견한 
그 붉은 첫 열매는 첫입맞춤의 맛이었을까 
그러나 저기 마루 밑에 버려진 세금고지서 뭉치, 
대문에 꽂힌 저 종잇장을 들고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는 누렇게 변색된 나뭇잎 하나 걸려 있다 
체납액이 커질수록 가뭄처럼 말라가던 가슴은 
지금도 금 간 흔적을 지우지 못하리라 

어쩌자고 골목은 나를 빨아들여 
사람도 없는 이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오래도록 먼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으면 
내가 드나들던 집에 나는 기쁨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물기 잃은 잎처럼 시들해진다



 

상처가 부르는 사람 / 길상호 


도마 위에 쓰다 남은 양파 조각들

아침에 보니 그 잘린 단면에 날벌레들이

까맣게 앉아 있다, 거기 모여 있는 벌레들은

식물의 먼 길 바래다 줄 저승사자,

검은 날개의 옷을 접고 앉은 그들에게

칼자국이 만든 마지막 육즙을 대접하며

양파는 눈을 감는다 가슴에 차오르는 기억을

날개마다 가만히 올려놓는 중이다

매웠던 삶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양파는

팽팽했던 긴장감에서 벗어난다

벗기려고 애써도 또다시 갇히고 말던

굴레를 이제 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나에게도 상처가 불러들인 사람 있었다

그때 왜 나는 붉은 핏방울의 기억을

숨기려고만 했던 것일까 힘들게 온 그에게

술 한 잔 대접하지 못하고 혼자

방문 닫고 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지금 더욱 난감하게 갇히고 마는 것이다

속으로 혼자 썩어 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