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강찬중의 잘 놉니다

테오리아2 2012. 7. 2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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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을 한지도 벌써 여러 해를 넘겼다. 가끔 친구들에게서 근황을 묻는 전화를 받는다. 대부분 “그래, 잘 논다.”하고 대답한다. 나이가 들어서 ‘잘 노는 일’은 건강의 척도이기도 하고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쯤 해넘이에 앉아 눈을 돌리면 벌써 영원한 산행을 결행한 사람도 있고, 병약하거나 다른 일로 고통을 당하거나 힘들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건 결과적으로 잘 놀지 못한 탓이 아닐까.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한 50여 년 전만하더라도 남녀가 유별하여 아이를 보는 일이나 살림에 대한 것은 대체로 남자의 몫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계실 때에는 관습에 눌려 자식을 안아 보거나 어르거나 한 기억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자라는지, 집에 쌀이 있는지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그저 밖으로만 헤매고 다녔다. 요즈음 세상이면 여러 번 쫓겨났을 게다.
이제 다른 일은 모두 접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애기를 보는 일’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친구들은 ‘어떻게…’라고 애절한 생각을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축복받은 일이다.
요즈음은 매여 있지 아니하니 어떤 일을 하든지 좀 여유가 있는 셈이다. 맏손녀는 주말에는 제집에 갔다가 월요일부터 같이 지낸다. 막내아들 내외는 혹시라도 딸과 소원한 관계가 될까봐 퇴근 후 시간이 나는 대로 늦게까지 놀아주고 갈 때가 자주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천륜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지만…, 왜 함께하면서 그 재롱을 보고 싶지 않으랴.
지난해에는 유치원 3세반에 입학을 시켰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너무 어려서 적응을 해낼까 싶었다. 집에서는 세수도 시켜주고, 옷도 입혀주고, 끼니마다 밥도 먹여야 하는데…. 그런데도 한번도 투정을 부린 일없이 잘 다니고 친구들과 잘 놀아주어서 그런 다행이 없다.   1년이 지난 지금 많이도 의젓해 졌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늘었다.  그리고 손 씻기, 밥 먹기, 잠자리는 조금만 도와주면 잘 해낸다. 본래 조용하고 유순한 성격을 타고났지만 하는 짓이 볼수록 귀엽다.
아침에 유치원 버스를 태우려고 큰 길에 나와 손을 잡고 횡단보도에 서면
“할아버지, 파란불이 켜지면 손을 들고, 오른쪽 왼쪽도 보고,…건너요”한다. 어린 유치원생은 손을 들고 건너고 어른은 지키지 않는 규칙……가슴이 뜨끔하다. 그리고 유치원 버스가 정차하는 곳에는 항상 또래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기다린다.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온 차례대로 줄을 선다. 지하철역이나 공연장에서의 어른들의 질서를 생각하면 실망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오후 2시쯤 버스에서 내린 손녀의 손을 잡고 집으로 온다. 걸어오면서 “오늘 재미있었어?” 하고 물으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오늘 작업한 것을 꺼내어 설명을 한다. 꾸밈없는 그 선한 웃음이 볼수록 기분이 좋다. 빵집을 지나온다. 할아버지의 옷을 당기며 쳐다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을 꺼낸다.
“할아버지, 군고구마 빵을 먹고 싶은데 사 주면 안 될까?”한다.
“그래”하면 “고마워!”한다. 조그만 일이라도 도와주면 언제라도 “고마워!”한다.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참 아름다운 말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은 지상명령이다. 유치원에서 집으로 오면 이 닦기, 손 씻기, 세수하기는 꼭 지킨다. 어제는 선생님이 밤 9시에 자면 키가 큰다며 베개를 들고 와서 곁에 눕는다. 참 신기한 일이다. 왜 해야 하는지 그 이유보다도 선생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그 마음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신뢰는 곧 사랑이다.
혼자 놀고 있으면 거실로 나와 채널을 돌려본다. 곁에 와서 앉으며
“할아버지, 다른 방송을 보면 안돼?”한다. 비디오테이프나 어린이 프로를 보자는 얘기다. 할아버지가 보고 나서 보라고 하면 손바닥으로 밀기 내기를 하잔다. 어쨌든 이 내기에서는  여태껏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리고 이기고 싶지도 않다. ‘이겼다’ 소리치고는 “당연하지”라고 말한다. ‘당연하다’라는 말의 뜻을 아는 것일까? 살아가면서 서로 꼬이고 매듭지어진 것들이 이렇게 쉬이 풀릴 수 있으면 얼마나 후련하고 가벼울까.          
어느 날은 베란다에 나와서 꽃망울이 다닥다닥 맺힌 ‘설화’를 가리키며 꽃 이름을  묻는데 “잘 모르겠는 걸”하고 대답했더니 그 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할아버지, 나는 5(5살)인데, 70(70살)이면서 그것도 몰라?”한다. 하루가 다르게 새말이 톡톡 튀어나온다.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하는 일이 적지 않다. 교육방송도 보고, 컴퓨터로 꾸러기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듣고, 아파트 놀이터에도 가고 …,참 일과가 복잡하다. 사뭇 곁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하다가 보면 잠시도 쉴 틈이 없지만 거짓이 없고 비뚤어지지 않는 그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오히려 크다. 늘 기쁨과 함께 하니 살맛을 더한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한 것일까?
지금 할애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일은 ‘애기를 보는 일’이 아닌 맏손녀와 ‘잘 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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