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배웅
이문자
사부작사부작 오시는 걸음에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았었다. 염천이 힘겨워 목을 빼고 기다렸던 가을! 님이 듯 반가워했더니만 어느새 입동이 코앞이란다. 온 산천에 신명나게 들불을 지피더니 지치기라도 하셨나. 찬비라도 맞으면 초췌한 행색이 되어 금세 저 삽짝을 벗어날 것 같다. 나도 하루쯤은 단풍처럼 타고 싶었던 건데 어쩌다 눈 맞춤 한 번 못 하고 지낸 건지. 이게 아니지 싶으면서도 그걸 어쩌지 못하는 소심.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가을님만 야속하다 싶어 일탈을 감행했던 거다.
실로 얼마만인가. 골짜기 한적한 숲길을 돌아 표고 8백의 고개를 오른다. 단풍은 이미 절정을 지나 있는데도 늦가을 빛은 묘하게도 사람을 달뜨게 하는 마법을 지녔다. 주체 못할 아쉬움도 물 흐르듯 하다 보면 위안이 되는 건지도 모를 일. 철늦게 나선 객을 위해 이쯤에서 기다려 주는 온정이 고맙기 그지없다.
명품 고갯길이 ‘만추’를 제목으로 서사시를 쓰나 보다. 그 마지막 연에서 머뭇머뭇 다듬고 있는 시어에 뭉클 가슴이 젓는다. 편한 길을 두고도 이 굽잇길을 오르내렸을 길손들, 함께 물들었을 황갈색 숲이며 풍성한 치마폭을 둘렀던 산록은 조락을 서두르는지 핼쑥해진 표정이다. 두 팔 벌려 영접한 가절(佳節)이 어느새 이 등성이를 넘어서고 있을 줄이야. 까닭 모를 심사가 이날따라 유난스럽다. 고독의 계절이 이별을 고하느라 건네는 말이 서글픔을 부추기는지 모른다.
초당(草堂)선생의 가곡 〈대관령〉을 4부 합창곡으로 채우고 반정(半程)에 오른다. “그려도 움직이는 한 폭의 비단”이며 “내 인생의 보슬비”라 했던가. 사계를 따라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비단 한 폭’에 홀려 맘먹고 오르는 길이 시 이상으로 가슴을 출렁이게 한다.
차에서 내려서니 사위에서 냉기가 엄습한다. 여느 때와 달리 사임당 사친시비(思親詩婢)가 덩그러니 수척하다. 여인네라면 누구든 가슴에 지닐법한 시와 마주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북촌-오죽헌 마을의 홀어머니 그리던 그니 마음이나 내 심중이나 다를 바가 없을 터. 사위어가는 나이에 새삼 사무칠 것이 무얼까 싶어도 여기에 서면 그리움 하나를 들춰낼 수밖에 없다.
“우리 세월도 금방이야!” 이 자리에 함께 섰던 선배님 모습이 아삼하다. 함께 하는 중에도 두 번째 책은 언제 묶을 거냐고 채근하셨지. 작품집을 기다리다 빈손으로 떠나신 선배님께 송구스러움 반에 그리움 반이 겹쳐 목울대가 뜨겁다. 가신님 말씀대로 세월이 금방이건데 난 정말 허송세월을 한 것일까. 청맹과니였을까. 온 가을을 경황없이 보내고도 근원 모를 이 공허감은 도대체 무언가 말인가.
자식들 순풍, 순풍 낳아 기르던 세대 마냥, 문간엔 하루가 멀다고 작품집이 답지하는데 책 묶는 일은 저만치 밀쳐놓고만 있는 사람. 발등에 떨어진 불이 더 급하다고 여긴 오산 때문이었는지. 아님, 일을 핑계로 태만이었던 것인지… 이따금 모아진 글 주머니를 들쳐보면서도 책 내는게 능사가 아니라 했던 내 자존심. 결코 부끄럽다 여긴 적은 없는데 난 정말 딴전을 부리고 있었던가.
10여년을 함께 꿈꾼 일이었기에 나라도 나서야 했던 것일 뿐. 애면글면 이어온 가치를 날려버릴 수 없어 감당했던 일이니 상념에만 갇히지 말자고 자신을 추스른다. 앞으론 영악해져 ‘나’를 차선으로 미루는 일은 더 이상 없기로 하자고 주문을 건다. 밀린 숙제를 풀어야 한다고.
고갯마루 정상께로 눈길을 돌린다. 거기! 등성이를 타고 유연한 곡선으로 이어진 겨울 나목의 행렬. 천공을 배경으로 하늘 화선지에 그린 두루마리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노련한 화공이 가늘디가는 붓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수묵화가 선계인양 펼쳐져 있다. 지닌 것들을 모조리 털어내고서야 진면목을 드러내는 겨울 숲은 이미 가을을 건너 동면으로 접어들었다. 머잖아 매섭게 불어칠 칼바람도 거뜬히 이겨낼 결기인 듯. 오연한 모습으로 선 자태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피안. 범접 못할 강골 선비의 기개인 거다. 내 안에 슬며시 피어오르는 체념이 오늘 여기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고 말하는 듯. 고개가 아프도록 선경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둔다.
생애의 겨울이 목전에 와 있는 나이다. 반가이 오신 손님을 보내기 아쉬워 옷자락을 붙잡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저 산마루에 당도해 있는 서릿발 계절처럼 머물러주지 않는 것이 세상살이 이치이거늘. 코앞의 일에만 급급해 밀린 숙제를 놓치긴 했어도 후회는 말 일이다.
떠나려는 계절이 아쉬워 무슨 핑계로든 나서야만 했던 날. 내가 만나야 했던 건 저 겨울 숲의 비장함이거나 ‘가을 앓이’를 그만 두라는 권고였을 듯싶다. 허접한 넋두릴랑은 접어두고 저 겨울 숲의 동면처럼 충전의 시간을 지나면 사는 일도 명징해진다는 타이름일 지도 모른다. 어정쩡한 심사를 평정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다시 올 태동의 봄을 준비할 엄동설한도 내가 맞이할 임이 아니겠는지. 저만치 던져두었던 숙제를 뇌리에 다져 넣으며 고갯길을 돌아내린다. 잿빛 그림자가 짙어진 걸 보니 가을님이 정말 떠나시려나보다.
가을님 오실 적엔 님이 듯 반겼더니/온 산천 불 지르고 몸져눕고 마는가
그대에게 물든 가슴 아직도 꿈속인데/잡은 손 뿌리치고 잰걸음에 떠나시면
쌓인 그리움 어찌 하라고 어찌 하라고/서러운 사연일랑 들어주고 가시게
(서러운 사연일랑 들어주고 가시게)
가을을 배웅하며 그렇게 노랫말 한 편을 적었었다.
lmja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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