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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물사랑 글짓기 수상작
테오리아2
2014. 8. 2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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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년 / 제 22 회 (문예분야) 글짓기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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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명 : 고향 개울에 관한 단상(斷想)
- 입선_박정순 / 주부
- 내 고향인 전북 장수(長水)군 천천(天川)면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긴 강이 있고 하늘 내려앉은 듯한 개울이 흐른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고향 산내들 곳곳의 지명 유래나 전설 대부분이 물과 연관되어 있다.
대표적이라 할 장수읍 수분리(水分里)의 경우, 물이 나뉜다는 지명대로 물뿌랭이의 한 가닥은 섬진강으로 향하고, 뜬봉샘에서 발원한 다른 물줄기는 크고 작은 골짝 물을 합치며 진안 용담호를 들렀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단물길 금강 천리를 이룬다.
어른들마저도 지리산 줄기네, 덕유산 자락이 맞네, 각각의 주장대로 우기지만 딱 부러지게 결말나지 않는 산마을에서 우리학교엘 가려면 골짝 지름길을 한참 내려오고도 냇물을 더 건너야 한다.
개울 이쪽은 마을 규모가 변변치 않아 다리 놓을 엄두를 안 내는지라 우리들은 황새늦새끼 종아리마냥 야윈 종아리로 물을 건너다니는데, 그 학교 뒷강에 관한 추억들 중에 특히 잊을 수 없는 성장기의 사연 하나가 내 가슴속에 아롱무늬 져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갓 부임해 우리 반을 맡은 선생님은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학교 뒷강으로 몰고 나가셨다. 물속에 사는 생물들을 관찰하고 직접 잡아보기도 하라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체험학습일 터였다.
하지만 시골 자연생태에 대해서만은 도시에서 온 선생님보다 아이들이 한참 스승이었다. 우리가 개울에 들어가 이것저것 잡아오면 선생님은 신기해하며 이름을 물어 노트에 기록하기 바빴다.
나는 좀 더 진귀한 것으로 선생님 관심을 받고 싶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어름치를 잡기로 했다. 개울 중간쯤의 큰 바위를 근거지로 살아가는 어름치들을 본적이 있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있다. 제법 큰 어름치가 바위틈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 어름치는 이 강에서 내가 본 물고기 중 가장 특별하다.
온몸에 나있는 줄무늬와 검은 점들, 동그랗고 또렷한 눈,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함께 들먹여지는 아가미, 뽐내듯 흔드는 지느러미랑 꼬리... 흥분으로 내 작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린다.
녀석을 사로잡으려고 걸음을 떼는 순간, 거친 물살에 벗어진 고무신이 물에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쫓아가 잡으려고 해도 역부족이다. 어느새 신발 한 짝은 여울을 타고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근처에서 바라보던 선생님과 아이들이 달려왔지만 소용없었다. 그 와중에도 신발을 잃어버린 아쉬움보다 한 짝 남은 고무신 앞코가 찢어진 것이 더 부끄러웠다.
졸지에 맨발이 된 나를 위해 선생님은 학교아저씨 편에 읍내에서 운동화를 사다 신겨주셨다. 내 생애 처음 신어보는 운동화였지만 다른 아이들에겐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이튿날, 신발값에 대한 답례로 엄마가 급히 만들어서 선생님 드리라고 손에 들려준 쑥떡을 숫기 없는 난 아이들에게 뺏기듯 다 나누어주고 말았다.
여름이 왔다. 아침에 학교 올 때는 괜찮더니 엄청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학교 뒷강은 어느새 황톳물로 변했고 수업은 중단되었으며 물 건너 쪽에 사는 아이들은 남자 선생님들이나 마중 나온 어른들 등에 업혀서 물을 건넜다.
강가로 나온 선생님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나를 업은 다음 물에 들어섰다. 비록 좁고 야위긴 했어도 아늑하고 따뜻한 선생님의 등, 허리를 휘감듯 사나게 흐르는 물살과 싸우며 선생님은 겨우겨우 개울을 건넜다.
선생님 등에서 내려온 다음에야 난 움찔 놀랐다. 선생님의 발등 살갗이 찢어지고 빨간 피가 흘러나오는 거였다. 빗물에 씻겨도 자꾸 배어나는 핏물.
그때야 난 알았다. 탁하게 흐르는 황토물 밑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뿌리 뽑힌 나무며 돌들이 마구 굴러 내린다는 것을. 그것들에 발을 다쳤지만 선생님은 내색하지 않은 채 나를 무사히 건네 놓은 것이다. 어둡기 전에 어서 가라고 내 등을 민 선생님은 다시 그 황톳물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난 강가 버드나무 밑에 몸을 숨기고 서서 선생님이 되 건너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친 물살에 휘둘리면서도 무사히 강을 건넌 선생님은 내가 잘 가고 있나 확인하려는 듯 돌아보시고는 절룩거리며 학교 쪽으로 걸어가셨다.
그제서야 이유 없이 내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왕버들 밑동을 붙든 채고 한참을 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얗고 예쁘던 발이 큰 상처로 피가 흐르다니...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 곱고 아름다운 천사인데.
간간히 뿌리는 비보라 속에서 주먹으로 눈물을 훑어내며 집에 오도록 식구들은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서러웠다.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 발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한동안 절룩거리며 다니셨는데도 난 한 번도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하질 못했고 선생님은 이듬해 전근을 가셨다.
그로부터 수십 년.
지난 추석 귀향한 김에 강엘 나갔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발등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을 담임선생님에 대한 추억이며, 이미 폐교돼 추억액자 속에나 간직된 모교를 바라보는 마음 또한 코끝이 맵도록 아련하다.
석양녘의 자락 빛이 은사슬처럼 일렁거리고, 햇살그물 사이로 비늘을 하얗게 반짝이며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이 마치 한 줄금 소나기 빗방울이 후둑후둑 물에 듣는 것처럼 눈 어지럽다.
물꽃이 핀다. 물꽃이 진다. 해늦이 강을 가로 건너온 산 그림자가 강물에 몸 섞으며 수면 속으로 스며든다. 그 산의 은밀한 숲 냄새가 바람결에 묻어왔다.
이윽고 어둠이 내렸다. 하룻밤에 물소리가 여러 번 바뀐다는 여울. 지금쯤이면 세 번은 바뀌었으려나. 큰 바위를 휘돌아 흐르며 새살거리는 물소리는 화음(和音)이지만 소음에 눌려 강은 꽤 소란스러웠다.
장관이다. 옛 할머니가 보름이면 달구경 나오시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비늘구름한테 포옹 당했다가 한참만에야 벗어난 달이 여울에 내려와 몸을 씻고 있었다.
어름치가 올라오는가. 떼를 이루어 강을 거슬러 오르는가. 그래. 나도 연어가 되어 여기 와있다.
이 물 내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련다. 저 물소리를 귓속에 담아가련다.
이곳에 고향 강이 있고 강물엔 지금도 성장통 멈추지 않은 내 유년의 추억이 남아 흐르기에.
출처 : 수필쓰기
글쓴이 : 파랑새(최미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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