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판
칠성판
칠성판을 내관의 아래에 놓는 풍습은 칠성신앙에서 유래하고 있다. 칠성은 남두칠성과 북두칠성이 있다고 믿어왔는데, 남두칠성은 생(生)을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사(死)를 관장한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칠성신앙은 도교의 신앙대상이었던 것이 불교에 수용되어 사원을 칠성각이 세워지기도 한다.
원래 칠성판은 5分 두께의 송판에 7개의 구멍을 뚫어서 흑회(黑繪)나 종이로서 그 상편을 붙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종이를 붙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출토된 칠성판은 길이와 폭 가장자리가 마모되어 정확한 치수는 알 수 없고 현재 남아있는 길이는 146cm, 폭은 24∼26cm이다. 두께 1.5∼1.7cm의 판자에 7개의 구멍을 뚫어 북두칠성의 모양을 만들었다. 구멍은 지름 3cm정도이며 육각형모양으로 각이 져뚫려있다. 바닥면에는 석영과 같은 검정색의 투명물질을 촘촘히 박은 흔적이 보인다. 은하수를 상징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북두칠성과 수명
설화 전승집단은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란 저마다 정해진 수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운명으로 해서 '단명할 사람과 장수할 사람'이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단명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하늘이 정해준 수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런 유형의 민담 중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이 '북두칠성'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옛날 어느 문벌 좋은 집에 손이 귀해서 삼대 독자가 있었다.
어느 날 동냥 왔던 중이 삼대 독자 어린아이를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이 아이는 아깝게도 열아홉 살밖에 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의 부모는 크게 놀랐다. 삼대 독자도 외롭기만 한데 그 아이가 열아홉 살밖에 살지 못한다면 대가 끊어질 염려도 있으니 태산 같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의 부모는 그 중을 쫓아가서 이 아이의 명이 길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러나 그 중은 나는 그러한 힘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차 사정했으나 나는 수명을 알 뿐이고 명을 길게 하거나 짧게 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부모들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계속 애원했다.
아이의 부모가 너무 애원을 하니 그 중도 감동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소년의 생명을 더 길게 할 것인가.
부모의 애원이 너무 절실하므로 감동이 되어, "그러면 내일 아침 남산에 올라가면 스님들이 바둑을 두고 있을 터이니, 그들 앞에 가서 자꾸 살려 달라고 부탁해 보시오. 그러면 무슨 수가 있을 것이요."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이튿날 일찍 남산 꼭대기로 가보았다. 과연 두 노승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소년은 다짜고짜로 살려 달라고 사정을 했다. 두 노승은 들은 척 만 척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 노승은 유순해 보였다. 소년이 너무나 열심히 사정을 하고 조르니, 얼굴이 유순해 보이는 노승이 험악하게 생긴 노승에게 사정이 딱한 모양이니 살려주자고 말했다 그러나 험악하게 생긴 노승은 좀처럼 동의를 하지 않았다. 두 노승은 살려 주자거니 그러지 말자거니 서로 다투다가, 험상궂은 노인이 주머니에서 명부를 꺼내더니 '十九年'이라 적은 위에 '九'자를 하더 더해서 '九十九년'이라 고쳐 놓았다. 그래서 그 소년은 19년의 단명을 면하고 99세까지 오래 장수하게 되었따.
이때의 두 노승 중에서 얼굴이 노운 노승은 남두칠성이며 얼굴이 험상궂은 사람은 북두칠성이었다. 북두칠성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일을 담당한다고 한다.
<북두칠성과 수명>은 우리의 민간신앙의 하나인 성수신앙과 관련된 설화이다. 성수는 신으로써 숭배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 이변현상을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하였다. 성수설에 따르면 중요한 별은 칠정, 사요, 남두육성, 북두칠성이다. 이중 북두칠성을 중히 여겼다. 옥추경에 따르면 북두는 하늘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하늘의 중심이 되고 사계절을 운용하는 위로는 천자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명, 복록, 부귀, 생사, 복록, 유명에 관한 일을 모두 총괄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수신앙은 도교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에서 유입될 때 우리의 문화와 융화, 습화하여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동냥왔던 중에 의해 19년밖에 살 수 없다는 거슬 알게 된 소년이 "남산 꼭때기"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을 찾아가 "열심히 사정"하여 99년까지 장수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단명할 운명과 장수할 운명이 정해졌다는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운명을 알고자 하는 여러 가지 방법- 손금을 보거나 관상을 보는 등-을 고안하게 되었다.
<참고>
김용덕, '민속도교사상', "한국의 민속사상", 집문당, 1996.
임동권, "한국의 민담", 서문문고 1996.
이영수, '인간 수명담의 일고찰', "인하어문연구 3", 1997.
(출처 : '북두칠성과 수명' - 네이버 지식iN)
칠성각
칠성신을 모시는 불교의 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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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전각을 그 중요도에 따라 상단·중단·하단으로 나눌 때 하단에 속하는 전각이다.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다.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정면 1∼2칸, 측면 1칸으로 대부분 규모가 작지만, 삼성각이라고 해서 칠성신을 산신·독성과 함께 모실 때는 칠성만을 모시는 전각보다 크게 짓기도 한다. |

우리는 뱀이라고 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떠 올릴까?
구약성서에는 뱀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교활한 동물로 이야기하였으나, 신약성서에는 “뱀처럼 신중하고 비들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였다.
구약성서 <민수기>에도 뱀이 나와 모세와 야훼가 자신들을 비난하는 히브리인들에게 불뱀을 보내 다다수가 물려 죽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그 뱀을 쳐다보면 다 나을 수 있다고 한다. 모세도 청동 뱀을 만들어 그 뱀을 바라보는 자들은 다 소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그리스 신화나 이집트 유적 등에서 뱀의 등장을 많이 볼 수 있으며 모두 신격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렇게 기독교에서도 뱀을 신앙의 상징물로 보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영향이라 생각한다. 그리스에서는 뱀을 의약, 예술, 시와 많이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뱀과 가장 관련이 있는 민족은 바로 우리 동이족일 것이다.
그 예로 고구려 고분에 나오는 복희와 여와의 벽화에 인두사신을 한 벽화와 뱀을 신으로 숭배하는 사상이 널리 펴져 있다.
뱀을 칠성에 비유하여 모시며 굿을 하는 제주도의 <칠머리 당굿>이라는 일곱 뱀을 위하는 굿이 있는가 하면 전국 어디서나 단지에 뱀을 상징하는 주저리를 틀고 곡신을 넣어 그 단지를 업양단지라고 부르며 뱀을 가신으로 모시고 있다.
뱀에 관한 기록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많이 나온다.
신라의 나해 이사금 때 뱀이 사흘을 울고 난 뒤 일 년 후 왕이 죽었다는 이야기며, 박혁거세 죽음에 대한 예견, 경문왕은 뱀과 함께 잠자기를 좋아했다는 기록 등 수없이 많다.
뱀은 주술적으로 재생 혹은 영생, 그리고 재물과 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것은 뱀이 허물을 벗기 때문으로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 난다는 의미를 가지기 떄문일 것이다.
뱀이 집 밖으로 나가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뱀이 나가려고 하면 못나가게 달래서 다시 집어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바로 뱀이 복과 재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신화나 전설 속에는 뱀이 사람으로 둔갑하여 인간과 정을 통하는 이야기나 은혜를 갚는 이야기와 뱀이 복수를 하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풍물을 칠 때 굽이굽이 휘돌면서 논다. 또 장소를 이동하거나 신명나게 놀 적에도 그냥 일자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빙빙 돌거나 뱀이 꽈리를 틀듯이, 뱀이 기어가는 형태로 풍물을 친다. 이런 행위는 이 풍물이 풍이족 문물이고 복희가 풍씨 집안의 사람이기 때문이지만, 뱀은 바로 우리 민족이 최대의 신으로 모시는 칠성의 화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뱀은 12지신 중 하나로 한자로 사巳라고 한다.
<회남자> 천문훈을 보면 사巳는 “생기어 이미 정해지다”라는 뜻으로 싹이 터서 이미 만물이 그 형상을 이루고 번무繁茂의 최절정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뱀은 양陽으로 오행은 화火를 나타낸다.
뱀 띠생은 무武 보다 문文이 가깝다. 성품이 고상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도덕관념이 강하여 윗사람을 공경하고 언행이 바르다고 했다. 인덕이 없어 남을 믿다가 낭패를 보는 수가 많으며 실속이 없고 일생 남이 모르는 근심을 가지고 산다고 했다. 고진감래라 초년이 좋으면 말년이 어렵고 초년이 어려우면 말년이 좋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교훈적인 것 같다.
뱀띠와 잘 맞는 띠는 닭띠와 소띠 그리고 원숭이 띠다. 그러나 돼지 띠와 상극으로 무슨 일이든 같이 하면 끝이 좋지가 않다.
우리 민족이 신성한 동물로 여겼던 뱀이 요즘은 한낱 정력제로 널리 알려져 뱀탕이 인기를 얻어 산에 뱀이 사라지기 일보 전이라고 한다.
이렇게 뱀을 먹으면 정력이 좋아지고 몸이 건강해 진다는 이야기는 평안도 맹산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잔치 집에 구걸 온 거지에게 뱀이 빠진 술을 먹이고 그 거지가 앓고 있던 병은 물론이고 몸이 튼튼하게 되었다는 민담에서 비롯되었다.

칠성거리
현재 굿거리 중에서 제일 큰 거리라고 하는 칠성거리는 칠성제석거리 혹은 제석거리로도 불린다. 여기서 제석은 현재 불교의 신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제석은 불교의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조상 삼신할머니를 말한다. 천지인을 말하고 한인천제, 한웅천왕, 단군왕검을 다른 말로 부른 것이다.
<무당내력>에 보면 “제석은 단군성조를 말하고 이를 삼신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즉 제석(帝釋)은 곧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의 5세 한인천제의 이름이 석제임(釋堤壬) 한인이 계시는 것을 보아도 이미 석이라는 의미의 문자는 한국시대에 사용하였다고 봐야 한다.
또한 단군왕검이 석가모니보다 약 1900여 년 먼저 태어나 제석으로도 불렸건만 언제부터인가 제석은 불교의 신으로 구분되어졌다. 그러나 칠성제석거리는 삼신할머니와 한인, 한웅, 단군왕검을 칠성과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단군시절에 팔가(八加) 중 학가(鶴加) 제일 먼저 시작을 하여 학가(鶴加)가 담당한 굿이 아닌가 한다. 학가가 제일 먼저 시작하였다고 보는 것은 칠성거리의 춤사위에서 학이 날개 짓을 하면서 나는 형상을 나타내는 듯한 춤사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칠성제석거리는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의 칠성제석거리에서 중(僧侶)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 불교가 성행하면서 시류에 밝은 어떤 무당이 승려의 영향을 받아 슬쩍 같다 붙인 것이 계속 이어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민족은 칠성신앙을 믿는다. 무가에도 있듯이 칠성의 종류는 많이 있다. 이것은 여러 칠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인 칠성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한다. 우물가에도 칠성님이 계시고 장독대에도 칠성님이 계신다. 산에는 바위칠성이 계신다. 칠성님은 인간의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고 있다.
우리 할머니들은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장독대에다 정한수를 떠놓고 칠성님께 빌었다. 이는 장독은 낮에는 빛이 잘 드는 곳이며 밤에는 달빛이 바로 비추는 곳이다. 이곳에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것은 정한 수에 곧장 칠성이 비춰지기 때문이다. 또 우물가에서 칠성을 비는 이유는 우물을 바로 칠성이 비춰지기 때문에 우물이 바로 칠성이고, 우리 나라의 우물들은 원형보다는 정(井)자 형태의 우물이 많은데 정(井)자가 바로 칠성을 뜻하기 때문인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절 토기에 우물 정(井)자의 표시가 있었다고 광개토대왕의 문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광개토대왕의 문장이 아니라 칠성을 섬기는 고구려의 문장인 것이다. 즉 칠성이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아마 우물 정(井)자가 들어 있는 토기들은 칠성님께 제를 지낼 때 사용하였던 토기들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서도 우물 정(井)자가 새겨져 있는 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구려군이 일본에 진출하여 그곳에서 칠성님께 승리에 대한 감사의 제를 올렸다고 볼 수가 있다.
우리들은 죽어서도 칠성님에게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시신을 안치하는 칠성 판이 그렇고 송장을 일곱 매듭으로 묶는 것 또한 칠성님을 나타낸다. 그러나 지금의 칠성 판에는 일곱 개의 별이 없다. 칠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어서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일깨워 준 칠성에서 태어나 칠성으로 돌아간다는 칠성신앙을 송두리째 까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칠성신앙에서 비롯된 숫자가 3과 7이다. 우리만 일곱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 3이란 숫자는 특히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좋아한다. 물론 일본도 3이라는 숫자를 우리 못지 않게 좋아한다. 우리는 3이라는 것이 생활, 의식 음악, 환경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3이라는 숫자는 가장 안정적인 숫자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삼신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을 하며 또 삼신을 믿고 있는 사실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인간에게 명을 주는 삼신과 명을 이어주고 복을 주고 죽음을 관장하는 칠성신과 우리의 뿌리인 한인, 한웅, 단군왕검을 받드는 굿거리이니 제일 큰 거리일 수밖에 없다.
충청도 영동지역의 칠성거리 무가에는 삼황이라는 말이 나온다. 노고담의 <무사강론>을 보면, “삼황은 하늘의 주재자인 천황과 땅의 주재자인 지황, 그리고 사람인 인황인 것이다. 이들을 모두 주재하는 것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곧 우리의 삼신이 되시니 ‘자(子)방인 북쪽하늘을 열어 양기를 태어나게 하시니 이를 천황이라 하고 축(丑)방인 북동북쪽을 열어 음기를 태어나게 하시고, 인(寅)방인 동북쪽을 열어 음기와 양기를 조화시키는 인황을 태어나게 하셨다.’ ”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음양조화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 삼태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삼태성은 북두칠성을 보좌하는 별로서 머리부분과 꼬리부분에 하나씩 있는 삼공(三公)을 말한다. 오래된 무당들이
사용하는 명도에는 반드시 해와 달 그리고 북두칠성이 즉 천부삼인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 명도가 많이 있다. 명도에 해와 달 북두칠성이 빠져 있는 것은 하느님의 직인이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즉 가짜 엉터리 명도라는 것이다.
북두칠성은 동북 간방의 하늘에서 뜬다.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는 방위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가 동북 간방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토종들이 우수하고 지구상 식물의 종자가 되는 것이다. 토종학회에 따르면 외국의 종자회사들이 우리 나라의 수많은 종자를 수집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한다. 현재 우리가 우리의 굿을 천대하고 멸시하듯 우리의 토종을, 종자를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이 비추는 동북 간방에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칠성이 우리의 큰 신으로 모셔진다. 그러나 칠성제석거리가 이상하게도 불교의 냄새를 짙게 풍기면서 자꾸만 변질되어 불사거리라고도 한다. 현재의 칠성거리는 무당이 장삼을 입고 바랑을 메고 염주를 목에 건 중의 복색을 하고 굿을 한다. 또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도 한다. 이는 정말 잘못된 것으로 칠성의 의미를 모르고 삼신의 의미를 모르는 무당들에 의하여 아니면 불교의 잠식에 의하여 변질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잊어버린 굿이다. 우리의 굿이 살아남기 위하여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하더라도 너무나 많이 왜곡된 아주 잘못된 부분들이다. 언젠가는 칠성제석거리의 무가를 제대로 다시 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당금애기씨 이야기 등 칠성제석거리와 관련된 많은 부분들이 불교화되어 있다. 이런 많은 부분들을 우리들 스스로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칠궁(육상궁)과 청와대
우리 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의기양양하게 청와대에 입성을 하였지만 나오실 때는 하나같이 비참하게 생을 마치거나 국민의 지탄을 받는 사람으로 전락하여 물러나게 되니 나라의 비극이요 청와대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러한 청와대의 비극이 칠궁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 옆 인왕산 길로 다니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청와대 담장 안에 있는 기와집 몇 채, 청와대의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이 몇 채의 기와집이 무엇인가 궁금해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곳이 바로 육상궁 즉 칠궁이다.
그러면 칠궁이 무엇이며 왜 청와대 안에 있는 것이냐? 칠궁은 본래 조선시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숙빈묘라고 부르며 세워졌다. 구중궁궐의 종의 신분인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눈에 들어 성은을 받은 덕에 영조를 잉태하게 되었고 장희빈의 투기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한 많은 삶을 살다 간 최무수리 즉 최숙빈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으나 1753년 영조 29년에 육상궁으로 개칭하였으며 그 후 일곱 분을 모셨기 때문에 칠궁이라고 하였다.
칠궁에는 돌아가신 후 왕으로 추대된 원종(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의 생부)의 어머니 인빈 김씨, 조선왕조 후궁 중에 대표적인 인물인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장희빈), 영조의 어머니인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돌아가신 후 왕으로 추대된 진종(영조의 장자인 효창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조선조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어머니 순빈 엄씨 등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선왕조의 임금과 정비인 왕비는 죽어서 종묘에 위패가 모셔지지만, 왕의 생모이지만 후궁은 세상을 떠난 후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고 별도로 위패를 봉안하는 곳을 마련하였는데 그곳이 칠궁이다.
지금의 청와대 터는 옛날 경복궁의 일부였으나 일본이 조선총독부 관사를 그곳에다 지어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여 왔는데 본래 그 터의 주인은 칠궁에 계신 일곱 분이다.
조선시대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칠궁에 제를 지내 영령들을 위로하여 드렸다고 하는데 조선이 망하고부터 지금까지 누구 한 사람 칠궁에서 제를 지낸 적이 없으며, 또한 제를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는 처지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종교를 떠나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청와대에 들어가실 때는 칠궁에다 제를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반인들이 전세방을 얻어 가도 사는 동안 잘 부탁한다고 주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법인데 하물며 5년 동안 집세도 한 푼 내지 않고 들어가 살면서 주인을 나 몰라라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칠궁에 계신 일곱 영령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조선의 임금이 되었으니 당연히 종묘에 위패가 모셔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후궁이라는 굴레 때문에 종묘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칠궁이라는 경복궁 후미진 곳에 따로 위패를 모셔졌으니 한이 맺혀도 이만저만 맺힌 것이 아닐 것이다. 살아서도 구중궁궐의 엄격한 법도와 많은 후궁과 정비의 시샘과 음모 속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어 보지도 못하고 도리어 왕자를 낳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모자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감수하여야 했던 그 수모와 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죽어서도 자식이 한 나라의 임금이 되었지만 본인은 경복궁 후미진 곳에 모셔졌으니 그 한인들 오죽하겠는가?
제3공화국 시절 당시 청와대에 근무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인왕산 길을 내면서 칠궁을 건드리지 않고 그 옆으로 도로 계획을 세웠지만 자기의 별장이 도로에 포함된 어느 재벌과 당시의 책임자의 장난으로 칠궁의 담을 헐고 길을 내고 난 뒤 그 해 8월15일 문세광 저격사건이 일어나 온 국민이 존경하고 국모의 모범을 보여 준 영부인께서 서거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칠궁의 대문을 경호 책임자가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방향으로 대문을 다시 세우고 난 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니 우연이라고 그냥 가볍게 넘겨 버리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오뉴월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일곱의 여자가 살아서도 한 많은 삶을 살았건만 죽어서까지 경복궁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자손들로부터 제사밥 한 그릇 못 받는 세월을 원망하며 독을 품고 있는데 남의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일곱 영령들에게 인사도 없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주인집 담장을 헐어 길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 대문까지 마음대로 바꾸어 놓았으니 그래도 후손이라고 참았던 한과 분노가 폭발을 하였으니 국가의 지도자를 데려간 것이 아닌가 한다.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 공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가 어렸을 때 간혹 칠궁으로 들어가곤 하였는데 그곳에는 항상 들어갈 때마다 찬바람이 불고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어른들이 그곳에는 출입을 못하게 항상 만류를 하였다고 한다.
옛적에는 천자에 오르게 되면 하늘에 자신이 천자가 되었음을 고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천자로 있는동안 나라의 번영과 태평을 기원했다. 한 무제가 천자에 오르고 난 뒤 태산에 올라 하늘에 고한것을 봉선(封禪)이라고 한다. 필자는 우리도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반드시 하늘에 고하였음 한다. 자신의 임기동안 국가의 번영과 더블어 안위와 태평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가 자신들의 신께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함께 기도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하면 반드시 칠궁에다 제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칠궁의 일곱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를 올린다고 하여 이 땅에 사는 후손된 몸으로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며 종교를 들먹이며 외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생각한다.
청와대에서 직접 제를 올리면 더 이상 좋을 수 없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곤란하므로 이씨 종약원에 일임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종묘도 일 년에 한 번씩 종묘제례를 드리고 있으니 칠궁에 계신 분들도 당연히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합당한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1세기에 무슨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냐고 할 줄 모르나 모든 것은 시대의 환경에 따라 결정될 일이지만 나는 칠궁에 계신 일곱 분의 분노에 찬 모습이 자꾸만 느껴져 두렵기만 하다. 언제 우리 무교인들이라도 칠궁에 계신 일곱 분을 위하여, 아니 나라의 안녕과 대통령의 임기 동안의 만수무강과 훌륭한 업적을 남기시어 퇴임식에서도 당당히 어깨를 펴고 취임식 때보다 더 많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으로 사저로 돌아가 남은 여생 행복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하는 칠궁제를 지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북두칠성은 우리의 별
칠성을 잃어버린 우리들
칠성신은 우리 민족이 존재하면서부터 삼신신앙과 더불어 믿어온 신이다. 칠성신이라고 하면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다놓고 자손들의 무병장수와 복을 비는 모습을 제일 먼저 연상하게 된다.
무교의 굿거리 중에서 칠성굿을 가장 큰 거리로 치고 있으며 굿 또한 웅장하다. 그러나 우리 고유의 신 칠성님도 불교의 신으로 변한지가 오래 되었다. 오히려 무당들이 칠성거리를 불사제석거리, 또는 불사거리로 부르고 있으니 불교가 오랫동안 조금씩 바위를 뚫듯이 무당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 칠성이라고 하면 북두칠성을 떠 올리게 된다. 북두칠성은 우리 민족이 유별나게 사랑해 온 별자리다. 삶의 길흉화복을 모두 북두칠성에서 시작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가(巫歌)에는 동두칠성, 남두칠성, 서두칠성 북두칠성, 이라 하여 칠성이 있는 위치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부른다. 이것을 28수(28宿)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 칠성님이라 하면 북두칠성을 말한다. 또 장소마다 칠성을 붙여 칠성신의 종류는 많이 있다. 이것은 여러 칠성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인 칠성님은 어느 곳이든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물가에도 칠성신이 있고 장독대에도 칠성신이 있다. 산에는 바위칠성이 있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고 있다.
우리 할머니들은 자손들이 큰일을 앞두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장독대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칠성님께 빌었다. 이는 장독대는 낮에는 빛이 잘 들고 밤에는 달빛이 바로 비추는 곳이다. 이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것은 정화수에 곧장 칠성이 비춰지기 때문이다. 또 우물가에서 칠성을 비는 이유는 우물에 바로 칠성이 비춰지기 주므로 우물이 바로 칠성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우물들은 둥근형보다는 정(井)자 형태의 우물이 많다. 정(井)자가 바로 칠성의 선기옥형 즉, 칠성의 국자 모양에 해당한다. 우물 정(井)의 우물형태는 곧 사정(四政)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선기옥형은 옛날 고대 사람들이 별을 관측하는 도구를 나타내는 말이다.
선기옥형을 달리 천상옥경이라고 부리기도 하는데 삼신 즉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다. 그곳에서 칠정을 베풀어 하늘을 다스렸는지도 모른다. 하늘의 정치를 본받아 인간들도 땅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을 칠정에 두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칠성신께 많은 공을 들였다. 인간의 생명은 삼신께서 주시지만 인간들의 수명장수와 길흉화복은 칠성신이 관장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칠성신을 믿고 있으며 무교에서는 제일 큰 신으로 받들며 굿거리 중 칠성거리를 제일 큰 거리로 여기고 있다. 칠성신에 대한 우리 민족의 신봉은 불교에도 영향을 끼쳐 각 사찰마다 칠성각을 세우게 되었다.
노중평의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에 「북두칠성은 항상 동북 간방(艮方)에서 떠서 서남 곤방(坤方)으로 진다. 이 방위를 귀방(鬼方), 즉 귀신의 방위라고 한다. 북두칠성이 이렇게 귀신의 길을 매일 한 번씩 지나간다. 귀신의 길은 신명이 활동하는 길이다. 간방은 신명이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므로 표귀방(表鬼方)이라고 하고 곤방은 신명이 숨어서 활동하므로 이귀방(裏鬼方)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간방에 속해 있으므로 표귀방에 있다. 그 범위는 함경도의 검덕산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이 갈라지는 각곳산에 이른다.」고 말한다. 북두칠성이 표귀방에서 떠서 이귀방으로 지므로 한밤에 귀신이 나타났다가도 닭이 울면 사라진다는 설화가 생겨났다. 또한 전국 사찰의 칠성각이나 산신각의 위치를 보면 칠성이 뜨는 동북 간방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대웅전이 자리한 방위도 반드시 동북 간방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의 유명한 사당을 보면 하나같이 모두 칠성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간방에 앉히고 곤방을 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먼 옛날 중국 땅이 동이족의 활동무대였고 사당을 지은 주인도 바로 우리 선조인 동이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동북 간방, 즉 칠성이 떠서 지는 길은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는 방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동북 간방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토종들이 우수하고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의 종자가 되는 것이다. 토종학회에 따르면 외국의 종자회사들이 우리나라의 수많은 종자를 수집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한다. 우리나라의 토종은 품질이 우수하고 맛이 독특한 것이 모두 동북 간방에서 칠성의 정기를 받고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북 간방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이유는 동북 간방을 지키는 신명이 곧 칠성신명이기 때문이다.
칠성신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각 별마다 하는 역할도 각각 다르다.
제1성은 천추성(天樞星) 또는 생기탐랑성(生氣貪狼)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도리를 펼치는 별로, 천제의 임무를 수행하는 별이다. 북극성과 함께 하늘의 중심을 잡아준다고 하는데 이 별에서 황제를 탄생시킨다고 한다.
쥐띠에 태어 난 인간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2성은 천선성(天璇星) 또는 천을거문성(天乙巨門)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창고요, 복 주머니의 원천이 되는 별이다. 임금의 족보를 관장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왕족의 족보를 선원보(璇源譜)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천선성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천선성은 인간의 식록을 주관하므로 칠성님 전에 복을 비는 이유가 바로 이 별 때문이다. 우리가 설날 복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이유와 섣달그믐에 팔았던 복조리 등은 바로 이 별의 감응을 받아 복을 받기 위함이다.
소띠와 돼지띠에 태어난 인간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3성은 천기성(天璣星) 또는 화해녹존성(禍害祿存)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복을 받은 만큼 화도 함께 받게 하는 별로서, 인간이 평생을 노력하여 살 만큼 되었다고 안심할 때 일시에 재물이며 생명을 앗아가는 역할을 담당한 별이다. 흔히 주변에서 “살 만하니 죽었다”는 말은 녹존성에서 장난을 친 것이다. 인간이 살 만큼 될 때까지는 수많은 고생도 하였지만 남에게 못할 짓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이 때 남에게 덕을 베풀지 않으면 이 별에서 그 사람을 데리고 가게 되는 것이다. 즉 칠성판을 상징하는 별로서, 인간의 죽음을 관장한다.
호랑이띠와 개띠에 태어 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4성은 천권성(天權星) 또는 육살문곡성(六煞文曲)이라고 하는데 육살이란 경양(擎羊), 타라(陀羅), 화성(火星), 영성(鈴星)의 네 살성과 천공(天空), 지겁(地劫)이라는 두 흉성을 합친 것을 말한다. 이 별은 하늘의 권력을 잡는 별이다. 이 별에 조응하면 권력은 잡으나 요절하는 수가 생긴다고 한다. 세조 때 남이장군과 중종 때 조광조가 여기에 해당되나 이 별의 정기를 타고나야만 크게 출세할 수가 있다. 권세를 좌우하는 별이다.
토끼띠와 닭띠에 태어 난 사람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5성은 옥형성(玉衡星) 또는 오귀염정성(五鬼廉貞)이라고 하는데 북두칠성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하늘의 형벌을 시행하는 별로서 중심을 잘 지키면 세종대왕과 같은 명군이 나와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그렇지 못하면 연산군이나 스탈린 같은 사람이 나온다고 한다. 민가에서 이 별에 조응하면 효자와 망나니가 나온다.
용띠와 원숭이띠에 태어 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6성은 개양성(開陽星) 또는 연년무곡성(延年武曲)이라고 하는데, 자미궁의 방어를 책임지는 별로서 북두칠성 중, 힘이 가장 강력하다고 한다. 또 악살과 흉성을 물리치며 오른손에 천부인을 들고 있다 한다. 천둥 번개를 치도록 명하며 하늘의 모든 별을 부릴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서, 이 별은 인간의 수명을 무쇠에 돌 끈 단 듯 길게 늘려 주는 별이다. 특히 노인들이 이 별에다 빌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하는데 칠성님께 명을 비는 이유이기도 하다. 뱀띠와 양띠에 태어 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7성은 요광성(搖光星) 또는 파군절명성(破軍絶命)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기운을 관장하는 별로서 특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별이다. 옛날 임금들과 장군들은 요광성을 군사의 신(軍神)으로 모시고 초제(醮祭)를 지냈다. 초제를 가장 먼저 지냈던 왕이 14대 한웅천왕인 자오지천왕 일명 치우천왕 일 것이다. 말띠에 때어 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그리고 북두칠성은 일곱 개의 별이 아니라 9개의 별이다. 우리가 육안으로 잘 볼 수 없는 2개의 별이 더 존재하고 있다. 이 별은 칠성의 첫째별인 천추성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좌측에 있는 별을 보성(輔)이라 하고 우측별을 필성(弼)이라고 한다. 이 두 별을 합쳐서 좌보우필성이라 한다. 이 별은 천추성을 보필하는 별인데 여기서 우리는 보필(輔弼)이라는 단어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은 칠성 즉 부두칠성과 오랜 세월 인연을 맺어 왔다 고조선 때에는 무덤인 고인돌 뚜껑 위에 북두칠성을 그려 넣었고 그 뒤를 이은 고구려 역시 무덤 속에 북두칠성을 크게 그려 넣었다. 이어서 고려도 그러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북두칠성을 새겨 넣은 칠성판이 등장하게 되었다.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 칠성판 위에 누워야 편안히 염라대왕을 통과하고 칠성님 품으로 돌아 갈 수가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칠성은 우리에게 수명을 관장하고 복을 주기도 하지만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도 관장하고 있다.
단군 이후 우리 역사상 북두칠성을 가장 숭상했던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북두칠성을 나라의 징표로 삼았다. 임금 스스로 자신을 북두칠성의 화신으로 생각하여 국강(國罡)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절 토기에 우물 정(井)자의 표시가 있었다고 광개토대왕의 문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광개토대왕의 문장이 아니라 칠성을 섬기는 고구려의 문장인 것이다. 즉 칠성이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아마 우물 정(井)자가 들어 있는 토기들은 칠성님께 제를 지낼 때 사용하였던 토기들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서도 우물 정(井)자가 새겨져 있는 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구려군 이 일본을 정복하여 그곳에서 칠성님께 승리에 대한 감사의 제를 올렸다고 볼 수가 있다.
북두칠성을 주술적인 말로 ‘괴강(魁罡)’이라고 하는데 ‘괴강’의 괴(魁)자는 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귀(鬼)자와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두(斗)자가 결합한 문자라고 한다. 즉 칠성의 신명에 잡혔다는 뜻이다. ‘괴강(魁罡)’을 ‘국강(國罡)’으로 고쳐 부른 분은 바로 유명한 광개토대왕이라고 말한다.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괴강(魁罡)의 강(罡)은 사정(四政)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사정이란 자(子:정북)․오(午:정남)․묘(卯:정동)․유(酉:정서)의 네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천지를 바르게 지키고 세운다는 뜻이다. 즉 북두칠성의‘천추’‘천선’‘천기’‘천권’을 말하는 것이며 이 네 별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공간을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 하는데 이는 똑바른 정사를 의미한다.
또한 선기옥형이 자시(子時)쯤 부터 땅을 향하게 된다. 이때부터 땅위의 모든 물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게 되는데 북두칠성 정기를 많이 받고 적게 받음에 따라 물의 맛과 질이 달라진다. 밤에 별과 달의 빛을 받고 새벽이슬에 젖은 물을 으뜸으로 치는 이유가 바로 북두칠성의 선기옥형의 기(氣)를 받은 물을 말하는 것으로 북두칠성의 기를 가장 많이 받는 자리를 천일생수(天一生水)하는 자리라고 한다. 이물을 수정자가 내린 북극수라고 하여 가장 좋은 물로 쳤다. 종가 댁에 우물이 집안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바로 북극수를 얻기 위함이다.
북두칠성을 음두성과 양두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음두성은 남두육성을, 양두성은 북두칠성을 말하기도 한다. 남두육성은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신명이고 북두칠성은 생명을 거두어 가는 신명이라고도 말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칠성신이 인간에게 복을 주는 칠복신(七福神)으로 변하였다.
칠복신의 명칭을 살펴보면 대흑천(大黑天), 혜비수(惠比須), 비사문천(毘沙門天), 변재천(弁財天), 복록수(福祿壽), 수노인(壽老人), 포대(布袋)라고 부르며 명산 입구마다 많이 모셔져 있으며 상아나 옥으로 형상을 만들어 모시는 가정도 많이 있다. 어찌 보면 일본인들이 우리들보다 더 칠성신앙을 숭배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우리들은 죽어서도 칠성님에게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시신을 안치하는 칠성판이 그렇고 송장을 일곱 매듭으로 묶는 것 또한 칠성님을 나타낸다. 그러나 지금의 칠성판에는 일곱 개의 별이 없다. 칠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죽어서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일깨워 준 칠성에서 태어나 칠성으로 돌아간다는 칠성신앙을 송두리째 까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칠성신앙
(참고: 노중평저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칠성신앙'이라는 매우 특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 칠성신앙은 고대 이래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고유 신앙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이 우주에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야 한다. (얼굴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옛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장독대 위에 정안수를 떠 놓고 '칠성님'에게 소원을 빌어 왔다. 우리 조상들은 인간의 길흉화복은 물론 수명까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칠성님이 주관하고 있다고 믿었다. 북두칠성은 우리 조상들이 믿던 삼신 상제님을 별로 나타낼 때 붙여지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칠성신앙은 신교신앙의 하나였다.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표현들로서는 칠성님 외에도 칠성신, 칠성여래(如來), 칠원성군(七元星君)등이 있다.우리 조상들은 북두칠성을 섬겼다.
북두칠성은 배달국과 단군조선시대, 그리고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별이었다. 고조선 시대에 만든 고인돌의 뚜껑돌 위에 이미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고구려 왕릉의 천장 벽화에서는 북두칠성의 형상이 다량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 상단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 중원 누암리 출토 제기(祭器) 등 각종 고구려 유물에서는 정(井)자도 함께 발견된다. 소설가 최인호씨가 96. 8 SBS가 방영한 「왕도의 비밀」에서 고구려의 상징 문양으로 제기한 우물 정(井)자는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것이다. 최인호씨는 이 井자를 백두산 천지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井을 땅에 적용시킬 때는 맞을 것이나 하늘에 적용시키면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광개토대왕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하늘 북두칠성의 자손 즉 천손민족으로 적고 있다. 고려시대 고분에도 북두칠성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우리는 제 5부 예언편 격암유록과 토정비결에서 말세 도탄의 위기에서 사는 방법으로 한결같이 석정 水(石井: 돌우물 물) 또는 석정곤(石井崑)이 거론된 것을 알았었다. 이 석정수는 바로 북두칠성의 정기가 고인 우물이다. 석정곤의 곤(崑)은 곤륜산의 약자다. 옛날 사람들은 북두칠성이 상조금궐 하부곤륜(上照金闕 下覆崑崙: 칠성경)이라고 하며, 위로는 금궐(호천금궐: 옥황상제가 계시는 곳)을 비추고 아래로는 땅의 중심인 곤륜산을 비추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이 곤륜산은 북두칠성의 정기가 비추어지는 지구 모든 산의 조
종(祖宗: 아버지격)이다. 명나라 사람 주장춘은 곤륜산의 제4지맥의 왕기(旺氣)가 백두산 지맥을 통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증산(甑山)이 모악산 아래에서 출현한다고 하였다.
...중략
북두칠성에 얽힌 얘기를 하다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우물 정(井)자 얘기까지 발전했지만, 아뭏튼 북두칠성은 우리 한민족의 열렬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살펴 기록으로 남긴 가장 큰 이유도 북두칠성을 숭상한 데에 있었다.
북두칠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가지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요 세계 최초의 나라인 환국은 7명의 환인이 3301년 동안이나 통치했는데, 이 7대에 걸친 7명의 환인들은 북두칠성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절에 가보면 대웅전 뒤편에 칠성각(또는 칠성당, 칠성전)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 사찰내에만 존재하며, 원래 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것이다. 이 전각은 한민족의 칠성신앙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사찰내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옛날 마을에 있던 칠성당도 바로 북두칠성의 성신을 모셔놓고 기원하던 사당이다. 민가에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장독대 한 옆이 칠성당(칠성단) 자리가 되어 정안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던 터전이었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중국 한족은 동이족의 주성인 북두칠성을 신앙하다가 진(秦)나라 이후 중원을 지배하고 동이족을 북방으로 몰아내면서 금성을 주성으로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이라는 널판을 관 밑바닥에 깔고서 그 위에다 시신을 눕혔다. 여기서 죽는 것을 '칠성판 짊어지고 간다'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 칠성판은 널판에다 북두칠성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아래와 같이 7개의 구멍을 뚫거나 먹으로 표시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례풍습은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만의 독특한 풍습이다. 이것은 그 영혼이 본래 온 고향별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맨 먼저 지내던 초례(醮禮)는 칠성님께 드리는 인사였다. 우리나라 역대 임금들이 지내던 초재(醮齋)도 칠성님께 올리는 인사와 기원이었다. 이 칠성신앙인 초재는 조선 중종·명종조에 유명무실해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로는 김유신(등에 칠성무늬), 강감찬 장군(문곡성), 정몽주(어깨 위 칠성모양의 검은 점 7개), 안중근(가슴에 흑점 7개, 그래서 칠성이 응했다 하여 '응칠'이라고 불렀다) 등이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과 북두칠성을 호위하는 28수(宿) 별자리를 본 따 조경한 독창예술품인 동시에 북두칠성 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의 대표작품이었다.
우선 광화문 앞과 경복궁 안에 있는 해치('해태'라고도 호칭)는 자미궁(자미원을 궁궐에 비유한 표현)의 남쪽 하늘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경복궁 근정전 실내는 자미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내전 안의 장식 색깔은 자미원을 상징하는 검붉은 자주색, 비취색이다. 임금의 용상 뒤에 있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는 용상이 해와 달의 음양과 다섯 개 산의 목화토금수 오행(五行) 즉 하늘의 칠정(七政)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한편 천장에는 용 두 마리가 각 28개의 발가락(하늘의 28수를 상징)으로 여의주(임금)를 호위하고 있다.
일월오악도
창덕궁의 인정전 실내도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형상이다. 소요정(逍遙亭) 네 개의 기둥에 일곱자씩 쓰인 글귀는 자미천을 묘사한다. 소요정 앞의 어정(御井: 임금샘)은 북두칠성 모양을 나타내는(자미원을 태을천 太乙天이라고도 한다) 을(乙)자 모양으로 물길을 팠다. 소요정의 북쪽에 있는 청의정은 삼신신앙의 바탕인 원방각(○□ )형으로 지었다. 소요정의 동쪽에 있는 정자는 이름을 아예 천지인 삼신을 뜻하는 태극정이라고 지었다.
이와 같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시대의 고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하늘의 궁궐, 자미궁을 본 따 지은 대궐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민족 고유의 칠성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나라와 민족을 지탱하던 정신적 지주였던 칠성신앙을 몰아내기 위해 칠성신앙의 대표작인 경복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총독부를 지으면서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칠성신앙을 포함한 온갖 전통신앙을 탄압하여 없애 버렸다. 오늘날 우리의 전통신앙을 미신으로 보는 것은 근대에 와서 서양 기독교의 영향외에도 일제의 이와같은 음모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총독부는 95. 8. 15일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철거되어 지금은 옛 모습대로 복구되었다. 민족정신의 정기를 바로 세운 쾌거였으나, 궁궐만 복구하였을 뿐 아직도 우리는 경복궁 조성에 간직되어 있던 진짜 의미인 칠성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은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대다수 한국인은 경복궁에 그런 의미가 있었는지 조차 잘 모르고 있으니 또 한번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북두칠성과 북두칠성이 속한 태을천(자미원)이 우주에서 어떠한 위치와 역할을 하기에 우리민족이 오랜 기간 그렇게 열렬히 신앙하여 왔고 궁궐조성에까지 그대로 모방하였는 가를 알아보자(중국에서도 북경의 자금성은 자미원을 본 뜬 것이고, 자미원의 색깔인 자줏빛 옷은 황제 이외에는 입지 못하는 황제의 색깔이었다). 제 3부 Ⅳ장 우주 근본자리(태을천)의 우주영파 편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오늘날과 달리 독특하게 분류했다(고대 천문학).
하늘의 중심에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태을천)이 있고, 그 밖으로 28수(宿) 안의 태미원과 28수 밖의 천시원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천문의 분포를 3원, 28수 그리고 300의 성좌(별자리)와 1,460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자미궁은 하늘의 핵심으로 상제가 머무는 곳이며, 이러한 자미궁은 제후격인 28수(동서남북 각 7개)의 호위를 받고, 28수는 28수대로 해와 달, 목, 화, 토, 금, 수성의 7개 별인 칠정(七政)의 호위를 받고 있다. 하늘이 구천까지 전개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자미궁을 구천(九天)궁궐이라고도 하며, 이를 본따서 땅의 궁궐을 구중(九重)궁궐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늘의 모든 별들의 중심(자미원)에는 북극성이 자리잡고 있고, 바로 가까이에서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모시고 그 주위를 24시간을 두고 한 바퀴씩 돌면서, 하늘의 뭇별을 다스리고 있다. 북두칠성은 자미원에 흩어져 있는 각 별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별들을 연결하는 힘은 북두칠성이 보내는 중력의 힘이다. 북두칠성은 자미원 밖으로는 28수와 태양계 별들을 다스린다. 북두칠성을 따라서 28수와 오위(五緯: 목, 화, 토, 금, 수성)가 따라 움직인다. 모든 별들은 이 북두칠성의 힘에 이끌려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북극성은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의 중심이다. 태양계는 태양계의 모든 별들을 거느리고 태양계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북극성 주변을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즉 태양계는 북극성 주변을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즉 태양계는 북극성이 주재하는 우주에서 볼 때 하나의 점인 것이다. 이 우주는 제 마음대로 도는 것이 아니고, '5·7·1 묘연(妙衍)'의 천부공식에 의해 정연하게 움직인다. 즉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운행관계도 5·7·1 묘연하고, 북두칠성 자체의 존재구조도 5·7·1 묘연하며,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28수(28수의 중심엔 작은 곰 별자리로 불리는 북극5성이 떠 있다)와 북극성의 관계 또한 5·7·1 묘연하다.
다음은 지구와 북극성의 관계를 살펴보자.
북극성은 우주의 북쪽 끝인 황도북극에서 동쪽으로 23.5도 각도인 천(天)의 북극에 떠 있다. 지구의 축은 이 북극성 을 향하여 23.5도 기울어져 있으며 태양 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반복한다. 문왕팔괘를 보면, 하늘(乾)이 서북쪽에 있고 땅(坤)이 서남쪽에 있는 데 이것은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는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말한다. 지구는 황도 북극을 향하여 스스로 바로 서려고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북극성과 반대편의 23.5도 각이 되는 곳에 있는 직녀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세차(歲差)운동을 한다. 또한 북극성도 항상 같은 위치에 있지 않고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126. 천의 북극과 황도 북극〉
우리는 제 3부에서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는 것은 별자리 28수의 배치가 3양 2음 운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또한 3양 2음으로 양의 기운이 음의 기운보다 많아 선천인류 역사가 남성이 주도하는 분열과 발전의 상극의 과정을 걸어왔다는 것도 배웠다.
천문(天文)이란 하늘의 글월이란 뜻이다. 하늘에 글자가 써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는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들에 대한 어떤 예시(豫示)가 천체의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선조들은 본 것이다. 즉 우리 조상들은 신교 정신에 따라 하늘에는 절대적인 주재자가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祭天)의식이 오늘날 우리 생활속 깊이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천지인 합일 사상에 따라 인간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야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하늘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영혼이 돌아갈 고향으로 믿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빛이 1→3(삼원색)→7(일곱 무지개)로 전개되고 우리 몸이 1→3(삼혼三魂)→7(칠백七魄, 7개 챠크라)로 짜여 있듯이, 우주도 1(우주 본체)→3(자미원, 태미원, 천시원)→7(북두칠성 또는 4×7=28수)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아셨다. 즉 북두칠성을 천제(天帝)를 대변하는 별로 보았고, 하느님의 자손인 한민족으로선 죽어서도 원래 왔던 하느님 고향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 아무런 망원경도 없이 하늘을 보고 오늘날 봐도 놀랄만큼 정확한 천문도를 작성하고, 그 수 많은 별자리와 천체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별자리를 그냥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혜안을 가지고 보았다. 예로부터 도인들은 무슨 별을 봐야겠다고 응념하면 낮과 밤에 상관없이 해와 달, 별들을 관측하였던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에 앞서 고구려를 침입한 수나라의 우문중장군에게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천문을 연구해서 천도에 따라 방책을 세웠고 땅의 이치를 깨우쳐 신묘한 전술을 개발하였다)라는 편지를 보내 철수를 미리 권고한 단적인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선조들은 천문지리에 통달했다(5세기말-6세기초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우리나라- 고구려- 에서 제작된 것도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 선조들의 천문법은 인간과 천체는 하나라는 철학에 근거한 법이었다. 일식과 월식이 인간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하늘의 별은 지상 인간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즉 천지인 합일사상 또는 인간은 소우주라 생각하신 것이다.
고조선의 감성(監星)에서 시작해 신라와 고구려의 첨성대, 고려의 태사국과 서운관, 조선의 관상감으로 수천년간 내려온 천문학 전통이 끊기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서양식 천문학과 별자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특히 일제는 우리 고유의 천문학을 정책적으로 축소 왜곡시켰으니, 우리의 왕립 천문대는 1904년부터 일개 측우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제는 또한 우리 겨레가 별에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생각들을 미신이라는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별자리, 특히 북두칠성 신앙은 제 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한한한 비밀과 사명에서 발췌>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칠성신앙'이라는 매우 특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 칠성신앙은 고대 이래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고유 신앙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이 우주에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야 한다. (얼굴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 |
우리 민족이 수천년 믿어온 칠성신
북두칠성은 우리 조상들이 믿던 삼신 상제님을 별로 나타낼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칠성신앙은 신교신앙의 하나였다.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표현들로서는 칠성님 외에도 칠성신, 칠성여래(如來), 칠원성군(七元星君)등이 있다.
북두칠성은 우리 민족이 유별나게 사랑해 온 별자리이며, 삶의 길흉화복을 모두 북두칠성에서 시작 된다고 믿었다. 칠성님은 인간의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고 있다.
무가(巫歌)에는 동두칠성, 남두칠성, 서두칠성 북두칠성, 이라 하여 칠성이 있는 위치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부른다. 이것을 28수(28宿)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 칠성님이라 하면 북두칠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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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들은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장독대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칠성님께 빌었다. |
우리 할머니들은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장독대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칠성님께 빌었다. 이는 장독은 낮에는 빛이 잘 드는 곳이며 밤에는 달빛이 바로 비추는 곳이다.
이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것은 정화수에 곧장 칠성이 비춰지기 때문이다. 우물가에서 칠성을 비는 이유는 우물에 바로 칠성이 비춰지기 때문에 우물이 바로 칠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우물들은 둥근형보다는 정(井)자 형태의 우물이 많다. 정(井)자가 바로 칠성의 선기옥형 즉, 칠성의 국자 모양에 해당한다. 우물 정(井)의 우물형태는 곧 사정(四政)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선기옥형은 옛날 고대 사람들이 별을 관측하는 도구를 나타내는 말이다. 선기옥형을 달리 천상옥경이라고 부리기도 하는데 삼신 즉 하늘님이 사시는 곳이다. 하늘의 정치를 본받아 인간들도 땅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을 칠정에 두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칠성님께 많은 공을 들였다. 인간의 생명은 삼신께서 주시지만 인간들의 수명장수와 길흉화복은 칠성님이 관장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칠성님을 믿고 있으며 무교에서는 제일 큰 신으로 받들며 굿거리 중 칠성거리를 제일 큰 거리로 여기고 있다.
북두칠성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역사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요 세계 최초의 나라인 환국은 7명의 환인이 3301년 동안이나 통치했는데, 이 7대에 걸친 7명의 환인들은 북두칠성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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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했기 때문에 사찰내에 수용되었던 것 |
절에 가보면 대웅전 뒤편에 칠성각이는 전각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 사찰내에만 존재하며, 원래 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것이다. 이 전각은 한민족의 칠성신앙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사찰내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옛날 마을에 있던 칠성당도 바로 북두칠성의 성신을 모셔놓고 기원하던 사당이다. 민가에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장독대 한 옆이 칠성당(칠성단) 자리가 되어 정안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던 터전이었다.
중국 한족은 동이족의 주성인 북두칠성을 신앙하다가 진(秦)나라 이후 중원을 지배하고 동이족을 북방으로 몰아내면서 금성을 주성으로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이라는 널판을 관 밑바닥에 깔고서 그 위에다 시신을 눕혔다. 여기서 죽는 것을 '칠성판 짊어지고 간다'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 영혼이 본래 온 고향별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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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칠성의 일곱 성을 인격화 |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맨 먼저 지내던 초례(醮禮)는 칠성님께 드리는 인사였다. 우리나라 역대 임금들이 지내던 초재(醮齋)도 칠성님께 올리는 인사와 기원이었다. 이 칠성신앙인 초재는 조선 중종·명종조에 유명무실해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로는 김유신(등에 칠성무늬), 강감찬 장군(문곡성), 정몽주(어깨 위 칠성모양의 검은 점 7개), 안중근(가슴에 흑점 7개, 그래서 칠성이 응했다 하여 '응칠'이라고 불렀다) 등이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과 북두칠성을 호위하는 28수(宿) 별자리를 본 따 조경한 독창 예술품인 동시에 북두칠성 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의 대표작품이었다.
우선 광화문 앞과 경복궁 안에 있는 해치('해태'라고도 호칭)는 자미궁(자미원을 궁궐에 비유한 표현)의 남쪽 하늘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경복궁 근정전 실내는 자미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내전 안의 장식 색깔은 자미원을 상징하는 검붉은 자주색, 비취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