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의 월인문자(月印文字) / 김용옥
-2015년 해양문학상 수상작품 -
동병상련(同病相憐)일까. 고독과 영혼의 시선을 사랑하는 사람끼리 시절인연을 만들어 동행하는 것은 인생행로의 복락이다. 복된 동행이란 각자 자신의 구속을 벗지 않으면서도 동행에게 구원의 시간을 주는 존재다.
산다는 건 어쩌면 낙원을 저 높이 올리고 지옥을 깊이 파는 일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두 번 살 수 없는 시간의 축적이며 항상 처음으로 살아보는 것이므로 매년 매시간 서툴고 불완전한 때문이다. 그 불완전 속에 헤맬지라도, 삶은 이 광막한 대지 위에 여전히 서툰 발을 내딛는 용기이며, 그 불완전 속에 정신이 아름다운 사람과 연을 맺어 무언無言의 소통을 하는 환희를 만끽하는 과정이다. 시절인연이 로맨틱한 이유다.
삶의 최대변수인 시절인연-로맨스를 끌고 온 건 바다였다.
나 또는 우리는 인생길처럼 구불구불 돌고 돌아 이름도 생소한 사천군 비토리의 별학도에, 우연하게 찾아들었다. 오직 남녀 두 사람 한 부부가 50년간 둘이서만, 서로 기대고 살아온 섬 별학도. 섬 속의 섬. 푸른 바다 건너 외따로 있는 파란지붕이 괜스레 나를 기다려주는 것처럼 간절히 가 보고 싶더니, 그 뜻대로 이뤄졌다. 그 밤 내내 추석명절 열이레달빛을 전신에 은사銀絲처럼 휘감으며 심중 깊이깊이 월인문자月印文字를 지우고 쓰고 지우고 썼다. 밤바다에선 정지된 시간 같은 시간흐름의 신묘한 향기가 무한공간을 감싸 돌았다.
덩시렇고 붉게 떠오르던 달이, 해시亥時=한밤중 10시를 건너가자 반공중천에 성큼 올라 백설로 빚은 공처럼 희고 작아진다. 드디어 만월이 은실을 실실이 풀어내는 것이다. 어둑한 그림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월광에 홀려 쏘삭거리는 듯이 별학섬의 소나무숲을 돌아 바닷가 방파제로 허위허위 이끌려갔다. 달빛 흥건한 바다에 취한 감흥과 서정도 잠시, 저절로 시선과 말이 끊겼다. 사람은 한 자리에 더불어 있으면서, 내심으로 홀로 뿔뿔이 헤어지고, 천지엔 적묵寂黙만이 가득했다.
나의 눈부처와 법문은 오직 달빛 쏟아지는 밤바다. 자유자재로다. 풍미風味한 백화주百花酒 한 잔의 정취에 이태백인들 못 될까... 저 밤바다 위로 서슴없이 훠이훠이 걷는다 믿음의 사도인 양... 밤바다에 달빛 윤슬이 가슴아래 옷고름처럼 흔들리네...저 달을 따서 머리에 원광圓光처럼 두르리... 바닥에 주저앉은 발바닥과 엉덩이가 천만근 쇳덩이보다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밤바다를 핥고 다가드는 바람소리와 밤잠 뒤척이는 새가 간간이 우는구나... 애간장을 긁는구나... 파란波瀾의 생을 견뎌온 여자에겐 밤바다의 영험한 소리들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암반巖盤처럼 쉬이 부서지지 않는 과거의 비애가 내 굽은 등을 칼날처럼 그어댄다... 그러나 그 속절없는 것들.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무엇을 잊지 못하랴... 좍좍 검은 금이 간 마음을 암덩이마냥 꺼내 밤바다에 홱 던져버렸다. 그 순간 나는 그윽한 월광의 태곳적 말씀을 받아쓰는 밤바다와 일심동체가 되었다. 나는 밤바다다.
처음엔 월색이 하얗다, 바람내가 상큼하다, 밤바다가 잔잔하다는 둥 무의식적으로 평범한 생각을 받아쓰기 시작했다. 무릎에 팔을 껴서 얹고 턱을 괴었다. 월광이 번득이는 해수면海水面에 하얀 상형象形을 끊임없이, 새로이, 일렁일렁, 생동하게 짓고 있다. 저 곡曲지고 울렁이는 달그림자. 아, 저건 월인문자月印文字다! 월광이 밤바다에 새겨 쓰는 문자다! 신음이 새어나왔다. 저 월인문자를 읽어보리라! 머릿속에선 ‘베토벤의 월광곡’이 연주된다. 저 월광과 밤바다의 교향交響이라니! 한참동안 일심으로 집중하니 사바의 소리가 멀어지고 저절로 무념무상에 빠진다. 내가 사라졌다.
의식을 일깨워 월인문자를 해독하려 안간힘을 쓴들 내가 그 의미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해도, 그 문자의 신묘한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다. 지상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중추절 열이레날 밤의 시공이 딱 멈춘 것이다. 저 단순하면서도 변화무쌍한 월인문자가 인생이다! 무슨 수로 인생을 알랴. 무슨 묘수로 인생을 말하랴. 알리라는, 안다는 착각과 자만, 교만을 집어던져라. 인생이란 그 어느 누구에게나 저 월인문자다. 불립문자다!
바닷가의 모래와 자갈을 건드리며 방파제에 부딪는 물소리에 귀가 울었다. 영속할 듯이, 똑같은 속도와 높낮이로 무표정하게 밀물져 오던 백색잡음白色雜音조차 점 점 점 차르르찰차르 스르르스으스 사라져간다. 어디선가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월광곡의 마지막음을 장엄하게 짚어낸 그 여음처럼 적묵寂黙의 소리가 들려온다. 성덕대왕 신종이 대지를 어루만지는 웅혼한 울림이 점점 확실하고 깊게 들려온다. 해저음海底音! 오, 이 둥글디둥근 소리 원음圓音! 우어어어엉 지구가 뒤척이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구가 우주공간에서 궁구는 선재세계先在世界=universalia anterem의 소리임에 분명하다. 어쩌면 가장 완전한 세계라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눈감고 듣던 소리일지도 모른다. 26년 전, 뉴질랜드의 피오르랜드 호수에서 듣던 태고의 소리가 되살아 들려왔다. 비로소 나는 한 점 티끌도 없는 에덴=Eden에 안긴 것이다. 나는 텅 빈 열락悅樂이 되었다.
한 줄기 월광으로 그려내는 저 무한한 언어를 어찌 다 낚으랴. 다만 인생이란 환상이고 사색이며, ‘나’는 내가 읽어야 할 단 하나의 인간이다. 이 밤, 나 하나가 완전한 우주다.
월광이 밤바다에 일렁일렁 곡선曲線의 문자를 무량하게 짓는 동안 내 비록 그 한 단어 한 의미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괜찮다. 괜찮다. 인생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도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그 시간은 피안의 세계였다. 월인문자처럼 끊임없이 새 생명이 시작되고 새 생명이 소멸되는 변화와 부활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였다.
오래도록 별학도 밤바다에 쓰인 변화무쌍한 월인문자를 기억하리라. 인생이 더러 겸손해지리라. 인생이 더러 깨끗해지리라.
<김용옥 시인 수필가>
전북 익산 출생
중앙대개 영문과졸
1988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추천 문덕수)
시집 :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는》, 《세상엔 용서해야 할 것이 많다》 외.
수필집 : 《生놀이》, 《틈》, 《아무것도 아닌 것들》, 《생각 한 잔 드시지요》 《살아야 하는이유》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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