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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제4회 한국해양문학상 수상작 한기홍씨의 "출항기

테오리아2 2016. 1. 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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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기出港記

 

 

그러니까 출항은

이제 막 씻김굿을 털어낸 갈망 따위들이

그악한 노스텔쟈 침향을 입술에 바르고

해신海神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

 

망망한 새벽노을

그 장쾌한 해신의 치맛자락에 출어깃대를 높이 걸면

아득한 시대를 휘돌아오는 장관,

아라비안 카펫마냥 늠실대는

지중해 마케도니아 선단의 황금갑주 광휘가

21세기 고깃배 이물에 부서진다

 

나는 어부다

한 삼십 여년 뭍에서 황금을 ?다가 꺾여

꿈 따윈 페기 되고, 누항 오십 줄에

절망의 코뚜레에 워낭소리만 가득안고

이 두려운 창해에 내던져진

79톤 안강망 제3연근해호 갑판원

 

여명에 거뭇거뭇 선線들이 뭉뚱그려진

포구는 언제나 모태신앙처럼 안온한데,

방파제 너머 이어도횟집 아슴프레 처마 쪽으로

내 심안 주낙에 걸린 애절한 그리움 몇 가닥

환영처럼 출렁 인다

 

출어닷 출어

시나브로 짙어지는 새벽노을

선적물목 점호 마치고, 금빛 여명 등짝에 진

김선장 뾰족한 갈치 주둥이엔

만선기원 입어신고入漁申告가 싱그럽다

 

왜 그리 서글피 살아왔을까

포구가 주먹만 해졌을 때까지 우두망찰

갑판대신 멀어지는 육지를 보았다

사물의 속성은 굳어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게 유전流轉되기도 하는 법

아내와 아이들은 또다시 오지의 갈대처럼

아비를 기다리며 살겠지

 

어젯밤 포구 해당화모텔에서 부둥켜안은

가족들의 설운 등짝에선,

모질고 질긴 희망의 끈을 적신 오열이

인류의 역사같이 깊게 흘렀었지

이 왜소한 인간 하나의 포한이 이만큼이라면

정녕 이 바다의 질곡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 얼마나 깊을 것인가

 

쩌엉 쩡

아슴한 수평선 너머에 불콰한 해명海鳴이 지나간다

신비로워라

저만치 튀어 오르는 날치 떼 은빛 비늘이

이 세상 모든 영욕 위에 빛나고 있다

아 아아

살아야 하네, 힘써야 하네, 아름다워져야 하네

저 은빛 날개는 바로 내 꿈의 현신인 게야

강퍅했던 내면에 섬광처럼 투영되는

환희의 빛이여, 존귀한 삶의 오의奧義여

 

뿌우우 뿍

뱃고동 소리는 유심론唯心論이다

대양으로 나가는 길목엔 항상 흩어진 꿈들이 모인다

그래서 파도는 철썩 그리운 사람들 어깨를 친다

이제 양망揚網물목엔 황금조기, 바라조기, 깡치 말고도

그리움 한 상자 넉넉하리

서기어린 새벽 별, 인간의 길을 묻는다

저 광막한 우주대평원 안드로메다 성운 어느 바다

한 생령의 꿈도 나와 같으리

 

그러니까 출항은 해신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