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토마임 / 박선님
플라타나스 거리를 걷는다. 희끗희끗한 등걸 위로 지독한 외로움이 물구나무 서 있다. 무성한 잎새들 사이사이로 혹독한 공허가 보인다. 표정 없는 플라타나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무수한 사연 주렁주렁 달고서 안으로 안으로 잦아든다. 소슬한 가을 바람이 통째 흔들고 지나간다. 우수수 떨어지는 형형색색의 사연들이 발밑에 나뒹굴며 이리저리 채이다가 돌부리로 솟아오른다. 어쩌다가 넋을 놓고 걷는 사람, 술에 취한 사람, 마음이 공허한 사람 등등, 빈틈 보이는 사람 있으면 턱턱 걸려 넘어지게 한다. 그래서 세상사 모든 것이 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케 하고, 인생은 그 자체가 고행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플라타나스 거리에 나서면 언뜻 판토마임을 연상한다. 그렇다. 플라타나스는 세상을 무대로 무언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웅 바람이 흔들고 지나가면 하얀 분칠을 한 얼굴로 우뚝 서서 처절한 몸짓을 해댄다. 몸짓이 언어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말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이럴때는 나도 판토마임을 하고 싶다. 누군가는 말했다. 표현은 침묵보다 아름답다고. 표정없는 얼굴로, 하지만 온 몸에 말을 실어서 절절한 몸부림으로 내 마음을 드러냈으면 싶다. 꾸밈과 기교, 위선을 훌훌 떨쳐버리고 순수함으로 돌아가 온 몸으로 나를 표출해 내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래서 언어로는 의사소통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뛰어넘고 싶다.
때로는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을 겪고도 가슴 깊이깊이 꾹꾹 눌러두고서 몹시 힘들어 할 때가 있을 것이다. 특히 여자는 보고도 못 본척 들어도 못 들은척하며, 입 무겁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의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수없이 말해주었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의식은 고슴도치 가시처럼 기를 쓰고 돋아난다. 지혜와 알맞은 용기로 적절하게 조율 해 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몇 배로 외로움만 커간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말을 하기 싫어서 더욱 고독해지고 외로워지는 것이다. 플라타나스 넓적한 잎이 너울너울 손짓을 하면서 마임을 한다. 동물들이나 곤충들의 순수한 몸짓이 생각난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말을 잃어버릴 때나 할 말이 너무 많아 말이 하기 싫을
때에 나는 플라타나스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내 모든 겉치레를 훌훌 벗어버리고 세상을 무대 삼아 판토마임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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