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이 아프도록 따가운 날에는 비가 끝도 없이 쏟아지는 날에는’ 아무 생각 없이 혼자 흥얼거렸다. 갑자기 옆에서 따라 걷던 친구가 ‘휘날리는 깃발처럼 기쁜 날에는 떠나가는 기차처럼 서글픈 날에는’을 연결해 부른다. ‘어떤 날’이라는 가수의 ‘그런 날에는’이라는 노래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쉬운 가사도 아니다. 그런데도 응대해주니 새삼 코드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티키타카는 스페인의 장난감에서 나왔다. 양쪽에 방울이 달려서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리면서 딱딱 소리 내는 tiqui-taca에서 유래했다. 그 후에 축구경기에서 짧은 패스가 계속되는 것을 이르는 스포츠 용어가 되었다. 사전적으로는 탁구공이 빠르게 왔다 갔다 한다는 의미가 있다.
누군가 얘기를 할 때 한귀로 흘려듣거나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거기서 대화는 끝나버린다. 또 한쪽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대화를 하거나 호통을 치는 경우에도 소통은 성립되지 못한다. 거칠고 험한 말이 오가는 사람, 타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면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큰아이가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 때 표정으로 이어가는 대화를 했다. 얼굴로 감정을 표현하는 놀이였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작은 아이와 셋이서 종종 표정 대화를 나누었다. 행복, 분노, 슬픔, 놀람, 배고픔 등등 말이 없어도 셋이서 티키타카를 이루었다.
그랬던 큰아이와 요즘엔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꾸안꾸, 꾸꾸꾸, 슬세권이라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를 쓰면서부터이다. 아이는 내게 라떼는 말이야 하고 놀리기도 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대충 넘어가기도 하고 어떨 땐 쉬운 말로 하라며 역정을 내기도 한다. 아이와는 점차 티키타카가 되지 않았다.
‘그녀’라는 영화는 사람 테오도르와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의 교류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컴퓨터로 사람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작가로 정작 자신의 아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중이다. 외로움을 느끼던 그는 목소리뿐인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며 생활의 활력을 찾고, 살면서 놓쳤던 부분도 깨닫게 된다. 한 마디로 잘 맞는 커플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상대방을 외롭게 하는지,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에 대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현대인의 고독이 얼마나 깊으면 기계와 사랑을 나눌까 싶어 한편으로 쓸쓸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타지로 떠나간 요즘 종종 혼자만의 대화를 나눈다. 썰렁한 집에서 오늘 이러이러한 일들이 있었어 하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리곤 한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빨래는 다 널었니? 음악은 어떤 걸 들려줄까? 커피 한 잔 할래? 한참을 그러다 내가 뭐하고 있는 거야? 하며 피식 웃다가 멈춘다. 나도 인공지능을 하나 구입해서 대화를 나눠볼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와 보봐르는 평생을 연인이자 지적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독립적인 삶을 살았지만 또 더불어 함께였다. 샤르트르는 보봐르의 도움 없이 발간한 책은 단 한 권도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며 영혼의 교감을 나눈 사이로 유명하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중 그린 세한도는 원래의 크기는 그리 큰 작품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10미터가 넘게 되었다. 청나라 학자들의 감상문이 붙으면서 길어진 것이다. 벗의 그림을 보고 시를 적는 것이 그 시절의 문화였다. 바로 옆에 있어야 공감이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다. 예술이 어떻게 교류를 이루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런 경우가 있다. 이러이러한 소재로 글을 쓰려고 한다고 하면 이런 건 어떠냐며 벌써 아이디어를 내주는 문우가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채고 받아준다. 그녀의 얘기 끝에 내가 덧붙인다. 감정의 교류가 잘 맞는다.
얼마 전, 타지에서 근무하는 큰아이가 휴가를 내어서 경주로 내려왔다. 아이의 언어를 배우고자 인터넷도 찾아보며 혼자 나름 습득했다. 딸을 반갑게 맞으며 “너는 꾸안꾸 패션이 멋지구나. 엄마는 꾸꾸꾸야. 우리 슬세권인 집 앞에 편의점에 가서 라떼라도 한 잔 할까?” 했더니 깜짝 놀란다. 신세대가 사용하는 줄임말을 써보니 나름 재미도 있고 젊어진 느낌도 든다.
오래된 친구와는 말이나 제스처 뿐 아니라 노래로도 관계가 형성된다. 요즘처럼 사람 만나기가 두려운 때에는 문자로 서로의 쓸쓸함을 달래주기도 한다. 마스크 너머 변치 않는 티키타카를 애정하며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난 거기엘 가지. 파란 하늘이 열린 곳. 난 거기엘 가지. 초록색 웃음을 찾아’ *
<에세이문학 2021년 겨울호>
옥상의 시절
뭉게구름 같은, 옥상의 시절을 살았다. 통기타와 포크송과 여드름 듬성듬성 난 여고시절과 알 수 없는 방황과 반항 같은 것들이 거기엔 있었다. 별이 빛나던 밤에 옥상도 함께 빛났다. 내 여고시절을 키운 건 팔할이 옥상이었다. 웃고 울고 눈물 나고 가슴 저리는 것들. 가끔씩 주체할 수 없는 첫사랑 같은 것도 찾아왔다.
아이들 방학도 되고 해서 모처럼 친정을 찾았다. 주위로는 빽빽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 가운데 아직 재개발이 되지 않은 곳에 친정집이 있다. 내가 여고시절 때만 해도 넓은 공터에선 난전이 열렸다. 그런 곳이 하루가 다르게 회색빛 아파트 숲이 되어 간다.
옥상의 멤버는 다섯 명이었다. 독수리오형제가 유행하던 때였다. 명희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성격이 남자 같아서 우리들 중 우두머리였다. 봉희는 부모님이 시장에서 건어물가게를 했고 순정이는 아버지가 외항어선을 탔다. 영옥이는 공부를 잘해 반에서 늘 일등을 했다. 우리는 사나흘이 멀다 하고 옥상에 모였다. 청춘의 시절이었다. 망토 같은 꿈을 휘날리며 보이지 않는 악당을 쳐부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노랠 부르며 고래고래 소릴 지르다 가끔씩 연애편지를 돌려 읽기도 하면서.
런닝 차림의 이씨 아저씬 오늘도 어설프게 쌍절곤을 돌리고 있다. 휙휙 바람을 가르며 기합 소리도 섞어가며. 시멘트로 만든 역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어떤 날엔 라이브통기타공연까지 벌어진다. 내 친구들이 옥상에 놀러온 날이다. 아침이슬과 고래사냥과 개똥벌레가 물수제비를 그리며 밤하늘 멀리 퍼져나갔다. 그러면 옆집 아저씬 ‘제발 잠 좀 자자“며 옥상을 쳐다보며 짜증을 내곤 했다.
삼십년은 훨씬 넘었다는 감나무는 옥상까지 그늘을 드리웠다. 튀밥 같은 꽃이 필 때가 제일 좋았다. 항아리 뚜껑 위로 떨어진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새벽녘, 잠을 설치고 일어나 생감을 주워 동생들 몰래 보리쌀 독에 묻어두곤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홍시처럼 말랑말랑하게 익었는데 독을 열어보면 가끔씩 누군가 먼저 손을 대어 남아있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쩌다 떨이로 사온 수박을 먹을 땐 수박씨를 서로 멀리까지 날리려고 모두들 오리 주둥이가 되었다. 깔깔깔 소리가 안방까지 퍼지고 엄마는 파리채를 들고 와 여름밤에 잡아야할 모기는 안 잡고 우리만 잡았다.
지붕 끝에는 아슬아슬하게 아버지가 매달려 있다.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리며 아래쪽을 향해 소릴 지른다. “어떻노? 잘 나오나? 뭐라꼬?” 안방에선 동생이 고사리 손으로 채널을 돌려보며 “아직 안 나와요” 하며 애를 태운다. 그때 앞집 아저씬 창을 열고 자기네는 잘 나온다며 괜히 염장을 지른다. 박치기 김일 선수의 레슬링이 있거나 홍수환 선수 권투경기가 있는 날이면 잘 나오던 흑백TV가 그날따라 자주 먹통이 되었다.
몇 달 전 선을 본 구석방 언니는 외출이 잦았다. 서른이 되어 만난 남자라 상대방에게 푹 빠진 모양이었다.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고 가끔씩 문틈으로 콧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외출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빨라졌다. 어떤 날은 밤새 불이 켜져 있기도 했고 휴일이 되어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봉제공장에 다니는 공순이라며 남자 쪽에서 먼저 바람을 놓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파혼을 당하고 만 날 언니는 방안에서 꺼억꺼억 한 나절을 울었다.
명희는 아직도 가슴에 묻어둔 채로 산다. 옥상의 멤버 중 그녀는 가장 쾌활했다. 모든 스케줄이 명희에게서 나왔고 가끔씩 남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것도 그녀였다.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웬일인지 서너 달을 넘기지 못했다. 우리가 하나 둘 결혼하면서 동네를 떠나도 혼자 남아 학습지교사를 했다. 내가 첫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평생 혼자 살 거라더니 내년 봄 결혼한다며 들뜬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옥상의 멤버들이 모여 그날 축하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혼식을 채 한 달도 남겨두지 않고 명희는 세상과 이별했다. 평소에 지병인 폐병이 원인이었다.
여름 해는 길었다. 우리의 청춘도 라이브 공연처럼 길 줄만 알았다. 옥상의 멤버와 이씨 아저씨와 구석방 언니는 지금 다들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때는 나이 들어도 앞집, 뒷집에서 영원히 함께 살자고 다짐했었는데 그만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빨랫줄에 목장갑이 걸려있다. 아마도 아버지나 엄마가 채마밭을 가꿀 때 사용하나 보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엔 방마다 세를 놓아서 쟁탈전처럼 옷가지들이 퍼덕였다. 새댁부부의 뽀얀 아기기저귀와 이씨 아저씨의 예비군복과 구석방 언니의 젖은 주름치마가 태극기 휘날리듯 나부꼈다.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언제쯤 지긋지긋한 이곳을 벗어날까 생각했다. 사내들이 술 취해서 노래 몇 자락 불러재끼고 아무데나 갈긴 지린내와 아낙들의 악다구니가 골목에 넘쳐나던 동네였다. 제대로 연애도 못해본 나는 혼자 옥상에 올라가 멀리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바람에 살랑살랑거리는 원피스 입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럴 땐 교회종소리가 대답처럼 뎅그렁뎅그렁 울리기도 했다.
오랜만에 올라와 본 옥상이 이렇게 추억을 주는 건가. 내 머릿속에 꼭꼭 숨겨 두었다 왜 이제야 꺼내는 걸까? 갑자기 누군가의 구멍 난 런닝구가 보이고, 모기를 잡는다며 손바닥 치는 소리가 들리고, 제발 잠 좀 자자며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돌아보면 옥상을 가득 채운 것은 크고 웅장한 것들이 아니었다. 작고 이름 없는 것들이었다. 아련한 풍경들은 속절없이 열일곱 살의 여고생을 마흔아홉 살의 중년으로 데리고 왔다. 왜 그땐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을까.
텅 빈 옥상에서 두리번거려본다. 갑자기 순정이와 봉희, 명희, 영옥이가 한 목소리로 말한다. “기집애야, 니 어데 갔다가 이제 올라 오노? 우리 한참 기다렸다 아이가” 이씨 아저씬 연신 쌍절곤을 돌리며 땀을 뻘뻘 흘린다. 구석방 언니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사이로 아버진 아직도 안테나를 붙잡고 있다. “인자 잘 나오나?” 그러면 아래쪽에서 또 다른 소리도 들려온다. “기집애들 밤늦도록 몰려다니며 못된 것만 배운다. 퍼뜩 내려와 저녁 묵거라.”
여름밤하늘엔 별들이 촘촘 박혀 있다. 우리가 뱉은 수박씨처럼.
주름책
시간이 엮은 한 권의 책을 본다. 들일 끝내고 마루에 누워 잠 든 엄마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얼굴 가득 횡서로 기록되어 있는 구김을 읽어 내려간다. 밭이랑 같기도 하고 물결무늬 같은 문장들은 어떤 곳은 깊고 어떤 곳은 길다. 헤진 귀퉁이와 낡은 표지에 잠시 목이 멘다. 울퉁불퉁한 문단을 따라가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젊은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엄마는 광복되던 해에 태어났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어도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육남매의 맏이로 자라면서 부모 대신 형제들을 건사해야 했다. 다섯 동생들을 입히고 먹이는 것은 물론 혼사까지도 맡았었다. 결혼해서는 시댁 어른들 모시고 층층시하 시누이들과 사는 것이 녹록치만은 않았다. 붙여먹을 땅마지기도 적은데다 일가가 많아서 크고 작은 길흉사를 일일이 챙겨야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딸 넷을 내리 낳았을 때 시어른들의 따가운 눈초리였다.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된 내가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까. 당신의 주름은 내 이해의 바깥쪽에 존재한다.
언제부턴가 거울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났다. 하룻밤이 지나면 어제보다 파삭 늙어버린 듯 느껴졌다. 오늘의 나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입가에 팔자주름도 깊어진 거 같고 피부색마저 칙칙해졌다. 어느새 나의 청춘은 시간의 무덤 속에 묻히고 말았다. 젊음은 가고 받아들이기 싫은 늙음이 도래했다.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라지만 그 세월의 파도에 대책 없이 휩쓸려가는 것은 싫었다.
수용하기 힘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물리적인 방법들을 강구했다. 피부과를 다니고 마사지를 받았으나 주름은 조금씩 늘어나기만 했다. 운동이 좋다고 하여 열심을 냈으나 그것도 며칠 못가서 포기하고 말았다. 미용에 좋다는 음식을 이것저것 섭취하고 식이요법도 했지만 별반 효과는 없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데 내면의 모습보다 외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엄마에겐 그 나이에 비해 유독 깊고 짙은 주름들이 많다. 그것들은 시간이 흘러가며 생긴 것도 있고 관계와 관계가 이어져 만들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구겨져 있는 주름 사이사이엔 남편에 대한 뒷바라지며 자식을 향한 무한한 애정들이 숨어있다. 숱한 농사며 집안 대소사에 대한 걱정들이 한 줄 한 줄 획을 그어놓았으리라. 근심 하나에 주름하나, 슬픔 하나에 주름하나, 바람이 불때마다 비가 올 때마다 주름 하나씩. 켜켜이 쌓여 있는 주름들을 내가 다 읽어낼 순 없다. 감추어진 비의(秘意)들은 전적으로 엄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지켜본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도 교과서적이었다. 후회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줄로만 알았다. 남편에겐 현명한 아내였으며 자식들에겐 엄격했다. 자신에게 닥친 시간의 마디들을 아등바등 살아냈고 결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거라며 동네 사람들이 수군댔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촌음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서만 자신을 희생했다. ‘왜 그때 삶을 더 즐기지 않았을까’ 엄마는 요즘 자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가끔씩 엄마의 주름책에 밑줄을 긋고 싶어지는 곳이 있다. 초등학교 때 네 명의 자식 들 중 왜 유독 나에게만 엄했는지, 동생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을 때 며칠을 뜬 눈으로 병원에서 지냈던 일이며,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쓸쓸하게 빈 방을 쓸어내던 일이며, 치매가 걸린 후 혼자 당신이 견뎌냈던 외로운 나날들. 그 숱한 순간순간을 오래 음미한다.
요즘은 대개가 자연스런 늙음을 외면한다. 여러 가지 방법의 피부미용이 성행하고 약물도 넘쳐난다. 누구든 시간을 거스르며 팽팽하게 탄력 있는 젊음을 유지하려 한다. 시간과 관계들의 흔적이 모여 만들어낸 촘촘한 기억의 단층들을 그저 노화의 증거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형외과에도 주름을 없애고자 하는 문의가 많고 실제로 수술도 많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인생이 주름 안에 담겨져 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희로애락이 층층이 모여 있는데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취를 지워버린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선물인 주름은 아름답다. 그 안에는 웃음도 있고 적지 않은 눈물도 있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희망과 좌절이 교차한다. 비와 눈과 햇빛과 바람 같은 것. 외롭고 쓸쓸하고 가볍고 무겁고 길면서 짧은 것들. 그런 숱한 애환이 주름의 안쪽엔 있다.
주름은 시간의 축적이다. 오래된 것은 모두 깊은 여운을 남긴다. 곶감에는 햇볕과 바람이 녹아있고 하구의 강에는 상류를 힘겹게 지나온 물결이 일렁거린다. 비포장도로의 먼지에도, 매미가 벗어 놓은 허물에도, 시골 교회의 은은하게 울리는 풍금소리에도 결이 있다. 주름이 진다는 건 제대로 늙어간다는 것이 아닐까.
기쁨과 환희와 웃음이 만든 주름은 눈물과 한숨이 만든 것과는 다르다. 엄마에게 남은 생 동안 만들어질 주름은 눈물과 한숨이 만든 것은 없고, 웃음이 만든 것들만 훈장처럼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읽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에 잠길 그러한 순간들이 많기를 바란다. 나이를 먹는다고 모든 것이 현명하지는 않을 터, 나도 엄마처럼 살고 싶다.
고흐는 평소에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주인공들은 대개가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그의 고뇌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그리지 않은 그림’이라는 화가의 말처럼 엄마의 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훗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위하여.
세월이 흐른 뒤 내 딸도 와서 주름의 안쪽을 보여 달라고 할까. 그때 나는 어떤 시간의 흔적들을 꺼내줄 수 있을까. 오래되어도 진부하지 않고 낡아도 단정한 모습으로. 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엄마처럼 살고 싶어”라고 말 할 수 있게. 시간에 쫓겨 허둥대지 않고, 순간순간 나를 돌아보고, 내 자신을 즐긴다면 늙어도 아름다운 주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행간마다 향기 그윽한, 가끔씩 붉은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 한두 개가 있는.
엄마가 잠시 돌아눕는다. 주름들이 세로로 쏟아진다. 행간에 고여 있던 시간들도 따라 흘러나온다. 그것은 엄마의 문장. 길고 짧은 잠언들이 마룻바닥에 눕는다. 가끔씩 코도 골며 허벅지를 긁기도 하는, 저 오래된 주름책에게 경배. 나는 잠시 목례를 한다. 바람이 팔랑팔랑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모노톤에 물들다
하늘이 시나브로 바다와 몸을 섞는다. 립스틱 붉은 색조가 푸른 도화지 위에 가만히 눕는다. 노을이 소나무 숲에서 수평선까지 가득 번지면서 천천히 파스텔톤의 담채화가 된다. 한적한 시골 바닷가에 혼자 앉아 하루의 색깔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스며드는지 바라본다.
사진이나 영상매체에서 특별히 한 가지 색깔만을 부각시켜 보이게 하는 것이 모노톤이다. 때론 갈색으로, 혹은 흑백으로, 어떨 땐 보라색으로 연출해 심리적인 효과를 창출하는 기법이다. 색채나 문체의 단조로움이나 악기를 연주할 때의 단조로운 선율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갈래였다. 요즘 들어 부쩍 그랬다. 다 자란 아이들을 객지로 보내고 남편과 둘이 있으면 부산했던 마음이 안정될 줄 알았다. 하지만 뭔가 불안한 것들이 내 안에 똬리를 틀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회사의 업무는 갑자기 지루해졌고 남편과는 사소한 일로 의견충돌이 잦았다. 여럿이 있을 땐 혼자 있고 싶다가도 혼자 있으면 뭔가 떠들썩한 곳에 섞여들고 싶었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가져온 달력엔 유럽 여러 나라의 멋진 풍경이 담겨져 있었다. 그 중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는 장면은 주황빛지붕이 가득한 한적한 마을의 사진이었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그 색감들은 진한 것과 연한 것들이 적당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 곳 지방에서 생산되는 흙으로 구우면 그러한 색이 나온다는 설명이 조그맣게 곁들여졌다.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 내 안의 경계가 허물어지곤 했다. 언젠가 여행을 간다면 저 곳에 한번 들르리라 마음먹었다.
노을은 파도를 적시고 갈매기날개를 물들이다 구름을 채색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의 색채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걷거나 사진을 찍는다. 웃음소리가 모래알처럼 백사장에 흩어진다. 밀려오는 파도가 종종거리는 물새 발자국을 지운다. 조금씩 엷어지는 그림자를 옆에 낀 채 사람들은 조금씩 순해지기도 하겠다.
여유가 생기자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성악이며 미술, 시낭송 등 강좌를 욕심내서 신청했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은 요일 별로 배우는 종목이 달랐다. 일주일에 한 번 가거나 여러 번 하는 것도 있었다. 매일 동동거리며 여기 저기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 결엔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결국 얼마 못가 다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다 걷기 운동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종내는 힘이 들었다. 결국 나는 뭔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번잡하게 펼쳐놓기만 하다 포기하고 만 셈이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영화 <얼라이드>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스파이 부부의 이야기다. 불안감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고 자동차유리 밖으로 모래 폭풍이 휘몰아친다. 헛되고 헛된 것,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삶이었다. 다른 장면은 대부분 잊혀 졌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모래는 오래 내 뇌리에 남았다. 아득하고 뭔가 가슴이 저려오는 그 창백한 알갱이들은 가끔씩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떤 날은 꿈에서 죽은 친구가 나타났다. 분명 내 앞에 있는데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흰색인 듯 흰색 아닌 듯 한 색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Off white 라고 해야 할까. 지병으로 서른에 운명을 달리한 그 친구는 자꾸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다. 안개처럼 자욱한 그것은 입이 되었다가 귀가 되었다하며 허공을 떠다녔다. 꿈을 꾸다 깨어나면 산다는 것이 허무해졌다.
문태준의 시 ‘어두워지려는 순간’에는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 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버무린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바쁘기만 했던 낮의 소요들을 커다란 그릇에 넣어 어스름과 함께 섞으면 이윽고 날이 저문다.
먼 산엔 어느새 시월이 도착했다. 꽃과 신록의 계절을 지난하게 건너온 여정들이 단풍으로 버무려진다. 그것들은 어느 한 지점을 향하는 것 같다. 은행은 노랑으로, 감나무는 주홍으로, 상수리나무는 갈색으로. 각양각색의 나뭇잎들은 퀼트처럼 제 몸을 섞으면서 가을의 무늬를 직조해낸다.
앙리 마티스는 야수파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화법은 색채를 단순하게 표현하면서 대상을 잘 드러낸다. <초록색 찬장이 있는 정물> 이나 <붉은 색 실내> 라는 작품을 보면 입체적이지 않고 평면적이면서 화려한 원색이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뾰족한 모서리들은 둥글게 처리되어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듯 단순화 되어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들으면 신비롭고 몽환적이어서 복잡한 생각들이 다 없어진다. 연주는 플루트로 시작해서 오보에와 클라리넷, 하프 등과 합주로 구성되어 있으나 중간 중간 삽입되는 개개의 독립적인 음은 전체를 단순화시킨 듯한 느낌이 든다. 오후의 창가에 앉으면 시인 말라르메가 생각나고 양떼를 몰고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목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까지 살면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오른다. 타인의 책임으로만 돌렸던 모든 것들은 기실 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에 대한 서운함, 친구와의 갈등,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 등. 서로에게 부드럽게 스며드는 저 저녁의 화소들처럼 나도 내 안의 불화들과 이제 화해를 하리라.
어스름이 발목을 적신다. 서늘한 바람에도 오히려 몸은 따뜻해진다. 이제 수평선과 구름과 바다가 하나의 색으로 변해간다. 새와 바위와 사람들도 모두 어스름 속으로 섞인다. 부드럽고 은은한 회색의 모노톤 속으로 멀리 등대가 불을 켠다.
저녁 여섯 시의 측벽
노을이 진다. 직립의 풍경들이 측벽으로 눕는다. 저것은 잠시 옆으로 돌아 나온 벽의 생각. 어스름이 밀려오는 담장엔 측백나무가 길게 제 그림자를 기대거나 사철나무가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도 좋다.
저녁 여섯 시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낮 동안 사람들 틈에 섞여 지내다 비로소 자유를 얻는 순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엔 오래된 담장들이 많다. 대개 줄장미가 피었거나, 엄나무 한 그루가 불쑥 서 있거나,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녹슨 대문을 가릉가릉 붙들고 있다. 빛이 바랜 그 아래 서면 창문, 불빛, 저녁연기 등의 단어가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나는 또 측백나무 한 그루처럼 어두워지려는 벽에 가만히 기대어본다.
‘지영아 사랑한다’, ‘낙서금지’, ‘개 조심’. 입을 다문 채 벽은 분절음 같은 것들을 목에 걸어놓고 있다. 그 주변을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낡은 책의 표지 같은 담장엔 이제 막 도착한 포장마차가 의자를 꺼내놓는다. 그러고 보면 쓸쓸하고 가난한 것들은 대개 벽을 사랑하는 종족들인 것 같다. 가끔씩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자전거바퀴소리까지.
구조물 옆면에 있는 벽을 측벽이라 한다. 한 번도 중심이 되지 못하고 언제나 변두리만 서성거리는. 나는 아웃사이더라는 말이 좋았다. 비주류, 변방, 변죽, 가장자리, 보헤미안 등의 말만 들으면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나의 전생은 집시였거나 순례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옆면에 붙은 측벽처럼.
고등학교 시절 칠십 여 명 정도가 한 반이었다. 한 학기가 다가도록 담임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나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사고를 왕창 치는 아이도 아니었기 때문일까? 나는 호명되기를 바랐지만 언제나 괄호 밖이었다. 무리 속에 행인 3쯤으로 있는 존재였다. 열일곱, 열여덟 무렵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아닌 타인으로 시작해서 그 누군가로 끝날 듯 보였다.
졸업을 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면 나의 이십대는 해진 청바지처럼 늘 초라했다. 가장 큰 고민은 내 것이었고 친구들은 세상에서 제일 큰 거인이었다. 별 볼일 없다 싶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따돌리는 직장이라는 사회에서 스스로 투명인간으로 살았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움직이다보면 하루가 마감되었다. 퇴근 후, 골목을 걸어오면 캄캄한 어둠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럴 때 담장들은 내 처진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거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뉴욕의 거리에 스프레이로 그린 낙서화가 범람했다. 충동적이었고 장난스러웠지만 그림에 담긴 메시지는 무거웠다. 그 중심에 장 미셀 바스키아가 있었다. 그는 저소득층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반항기 가득한 청년이었다. 인종문제, 범죄, 마약 등 뉴욕의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들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거침없는 감정들은 측벽에 낙서로 채워졌다. 현대 문명의 탐욕을 조롱하던 그의 불안한 정신은 약물에 빠져 스물여덟에 요절하고 말았다.
결혼하고 난 뒤, 남편과 다른 지역에서 근무를 해야만 했다. 발령이 쉽게 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은 정말 우주 저 끝에 나 혼자 동떨어져있는 느낌이었다. 길을 몰라 헤매었고 사람을 몰라 외로웠다. 저녁이면 불 꺼진 창 아래서 망연자실 서 있었던 적도 많았다.
늘 신발을 끌며 걷는 친구가 있다. 뒤축도 꺾어 신다보니 석 달 만에 운동화가 하나씩 해졌다.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동안 지금까지도 그 버릇을 못 고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녀는 신발가게를 한다. 요즘도 만나면 추억을 공유하며 깔깔거린다. 채송화 한 송이, 떨어지는 낙엽하나에도 함께 웃고 슬퍼하던 소녀들은 벌써 지천명을 넘겼다. 삶은, 꺾인 운동화처럼 한 번 뭉개지면 얼마나 편안한지 모른다고 친구는 자주 희미하게 웃는다. 남편의 폭력 때문에 이혼한 그녀는 재혼이란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라며 손사래를 친다.
김희정 감독의 영화 <프랑스 여자>는 주인공이 현재와 과거를 오갈 때마다 긴 벽이 나온다. 벽을 지나쳐 나오면 분명 현실인데 다시 들어가 보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있다. 프랑스 파리의 폭탄테러현장에 있었던 그녀는 무너진 벽 사이에 갇혀 기절한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난다. 프랑스인 남편의 배신으로 인해 생기는 쓸쓸함이나 고독, 외로움의 감정들이 측벽처럼 잔잔하게 이어진다.
주홍빛 빗살무늬들이 건물 사이로 스며들어 저녁을 채색한다. 잠시 벽에 기대어 쉬는 사이 노을은 수채화를 그린다. 건물과 상점과 간판들이 그림 속에 들어와 눕는다. 사람들은 아다지오, 라르고, 렌토처럼 천천히 흘러간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부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남자, 보따리를 들고 가는 노인이 서로 엇박자로 비켜간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직립이 아니어도, 중심이 아니어도, 주인공이 될 수 없어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진지하게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또 다시 측벽 같은 순간이 오더라도 동일한 방법으로 견뎌 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담장에 기대면 가끔씩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개밥바라기별처럼 반짝이기도 했다.
어스름들이 모여 이제 저녁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옆모습을 어루만지는 측벽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약간의 회한과 슬픔과 눈물을 동반한다 해도. 서늘한 바람을 안으며, 고요와 소란을 지나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는 걸음으로 걸어간다. 지켜보던 측벽도 천천히 나를 따라 걷는다. 서로 곁눈질을 하면서 둘인 듯 하나인 듯.
풀솜할머니
아득한 옛날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기도 하다. 외가에서의 생활은 추운 겨울 날 난로처럼 따뜻하게 다가온다. 집은 언덕바지에 위치해있어 대청마루에서 저 멀리 신작로까지도 보였다. 집 앞의 꼬불꼬불한 골목부터 논과 또 그 너머의 풍광까지 안고 있는 그곳에 풀솜할머니가 살았다.
풀솜할머니는 외손에 대한 애정이 따뜻하고 두텁다는 뜻이다. 외할머니를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쓰인다. 내게 풀솜할머니가 계시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이제는 치매가 와서 그렇게 살뜰히 챙겨주고 아끼던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풀솜은 사전적 의미로 실을 켤 수 없는 허드레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이다. 비단을 만들지는 못하고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이다. 빛깔이 하얗고 가벼우며 따뜻하다고 하니 외할머니가 그랬다.
외할머니는 마당에 뜨거운 물을 부을 때도 땅이 놀라지 말라고 발로 쿵쿵 두어 번 찬 후에 쏟았다. 사물에도 인격을 부여하는 모습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지혜로운 것 같았다. 날이 흐리고 비라도 올라치면 당신은 아껴둔 밀가루를 밀어 칼국수를 해주었다. 나랑 동생은 국시 꼬랑지를 아궁이에 넣고 구워 먹었다. 칼국수보다 오히려 그게 더 맛났다.
할머니는 강압적인 엄마와 달리 우리와 대화가 통했다. 세상의 할머니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외할머니는 언제나 듣는 편이었다. 엄마가 야단칠 땐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는 것처럼 우릴 보호해주었다. 긴 밤엔 동생이랑 셋이서 민화투를 쳤다. 숫자를 제대로 모르는 당신은 번번이 우리를 이겼다.
외가에는 양잠을 했다. 외양간 옆에 방이 두 칸이 있는데 하나는 상할머니 방이고 다른 방에선 누에를 쳤다. 이모들이랑 나는 뽕잎을 한 아름 뜯어오곤 했다. 소와 누에가 있으니 파리가 들끓었고 상할머니는 사사건건 외할머니를 들볶았다.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건 살아있는 파리를 목구멍에 그대로 삼키면 불로장생한다며 죽이지 말고 잡아 달라 조르기까지 했다. 왜 그리도 며느리를 싫어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어진 카세트테이프가 떠오른다. 본업은 농사일이었지만 비단 천에 점박이를 만드는 지금으로 치면 알바를 했다. 방 한 구석에서 늘 하던 일이었기에 친구라고는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였다. 지금처럼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켤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고 트로트테이프만 주구장창 들으셨다. 너무 많이 들어서 테이프가 늘어나 제대로 된 노래가 나오지도 않았다. 지금의 풀솜할머니처럼.
그 시절엔 어느 집이나 그랬겠지만 딸들은 학교를 적게 보내고 아들들은 대학을 보냈다. 엄마나 이모들보다 외삼촌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지금도 번듯하게 산다. 큰외삼촌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뒤였다. 그 기업은 텔레비전 광고를 많이 했고 할머니는 거기에 나오는 멘트를 꼭 따라했다. 텔레비전이 귀한 시절이라 동네 할머니들이 모인 곳에서 아들 회사를 큰소리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우린 그럴 때마다 민망해서 볼륨을 높였다.
동네 입구에 사는 암포할머니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프다고 한다면서 며느리가 하소연했다. 어느 날은 다른 동네에 가 있기도 했다. 어릴 땐 그게 뭔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치매였다. 할머니는 늙어서 노망이 들었다고 얼른 죽어야 된다 그땐 그리 말했지만 정작 당신도 지금 같은 처지가 되었다.
온 마을 아이들이 패를 이루어 숨바꼭질을 하던 밤이었다. 숨을 장소는 뒷산으로 정하고 한 패거리는 술래가 되고 다른 편은 숨었다. 밤늦도록 숨었다가 찾다가를 반복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불을 보았다. 작은 나무둥치 같은 것에 꺼지지 않는 불이 활활 타오르며 날아다녔다. 언니들이 도깨비불이라 했다. 몸에 부대끼게 뛰어다녀서인지 그 불을 보아서인지 알 수 없지만 몸에서 심한 열이 났다. 병원도 약국도 없던 깡촌에 갑자기 아픈 나를 안고 할머니는 동네 어르신에게 달려가기도 했고 산에서 캔 약초로 달인 물을 먹이기도 했지만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며칠 밤낮을 끙끙 앓다가 깨어났을 때는 동이 트는 새벽이었다. 옆에는 몸을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는 할머니가 보였다. 어렸지만 순간적으로 핑그르 눈물이 떨어졌다.
어느 날, 집 앞에 퇴비를 만드는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무서웠다. 순식간에 이쪽 끝에서 타오르더니 저쪽 끝으로 옮겨갔다. 마치 도깨비불 같았다. “할매 할매 불이 난다 우짜꼬” 황급한 내 말에 양동이를 번쩍 들더니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빠르게 왔다 갔다 했다. 외할아버지는 물을 옮기며 쩌렁 쩌렁한 목소리로 연신 “불이야 불이야”를 외쳐댔다. 담벼락이 따닥따닥 붙어있던 동네 사람들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하나 둘씩 뛰쳐나와 물을 보탰다. 불은 잠잠해졌다 싶으면 이쪽에서 타오르고 이쪽이 잡혔다 싶으면 저쪽에서 다시 활활 타올랐다. 반나절 정도 지난 후에야 완전히 소진되었고 사람들은 검댕이 묻은 얼굴로 서로 수고했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보았다. 호리호리하며 키가 큰 당신의 젖은 몸은 알리시아 슈미트보다 섹시하고 우사인 볼트보다 날렵하다는 것을.
툇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던 날, 꽃상여가 동네를 한 바퀴 휘돌아 나갔다. 곡소리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하얗고 종이꽃이 달린 상여를 보고 물었다. 어린아이가 죽으면 상여를 저렇게 꾸민다고. 죽는다는 게 뭔지 몰랐지만 구경하는 내내 마음이 아렸고 노랫소리가 쓸쓸했다. 할머니의 표정을 봐서 그런 걸까.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때까지 볼 수 없었던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이 주름살 사이로 비쳤다.
후 하고 깊은 숨을 내 쉬어 본다. 오늘따라 할머니가 더 그립다. 힘들고 어려울 땐 언제나 당신을 생각한다. 당차게 삶을 헤쳐 나가면서도 넉넉하고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이번 주말엔 오래 못 뵌 풀솜할머니를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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