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부터 발끝까지 올 화이트로 치장해 본 것은 딱 한 번.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였다. 전문가의 섬세한 손길로 완성된 메이크업, 한 올이라도 흐트러질 새라 스프레이를 반 통쯤 쏟아부은 빳빳한 머리카락, 그 위에 고정시킨 티아라. 부풀린 페티코트 위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다음, 하이힐로 키를 10cm 넘게 높이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도 놀랐다. 내가 나 같지 않아서. 마치 왕족이라도 된 듯 눈 깜짝할 새에 신분이 상승한 듯했다.
신부를 태운 자가용이 예식장 주차장에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신랑이 뛰어왔을 땐 더했다. 문을 열어주려다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던 신랑의 눈빛에서 놀라움과 찬탄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도 이제까지 만나온 여자가 낯설듯 나 또한 그가 낯설었다. 이발소에서 단장한 머리와 새 양복이 그렇게 촌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특히 헤벌쭉 웃는 얼굴이 더 그랬다. 왕족도 모자라 여신이라도 본 듯 눈부셔 하는 남자가 내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민이라는 것에 울컥 실망스러운 기분.
차 문이 열리기까지 수초밖에 안 되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펼쳐진 파노라마가 얼마나 무궁무진했는지 그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곁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을 맹세하고 있는 여자가 사실은 자신을 은근히 깔보고 있다는 것을.
착각은 자유란 말은 예식 시간과 비례했다. 내가 서 있을 곳이 어느 나라 왕궁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쯤은 되어야 할 것 같은 꿈. 그런 행복한 꿈을 꾼 시간은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오전 11시에 시작한 예식이 끝나는 정오, 마법을 끝낸 것은 종소리가 아닌 신촌 모 웨딩숍 직원이었다. 아침엔 하녀처럼 그리도 극진히 모시더니 상냥한 표정을 거두고 기계적으로 드레스를 벗기기 시작했다. 아니, 높은 데 있는 나를 바닥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렇게 입도 벙긋 못하고 내 지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둘둘 말려 쇼핑백에 처박힌 웨딩드레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나의 고귀한 신분!
그날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결혼’이라는 만만치 않은 여정을 위해 마련한, 마지막 성찬이 아니었을까.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에서 빛은 고사하고 보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한참을 살아보고 나니, 웨딩드레스는 그저 매혹적인 미끼였다는 생각이 든다. 고귀한 신분은커녕, 결혼이라는 의식 —시작은 알 수 있지만 끝나는 시간은 저마다 다른 길고도 긴 행사-에 바치는 제물의 예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신의 의상이 아니라 양이나 흰 소를 대신한 것이 웨딩드레스였다는. 30여 년쯤 지나니 그런 허무와 냉소에 빠지기도 하는데, 나만의 생각일지.
그 후로 흰색 일색인 옷은 입어본 적이 없다. 웨딩드레스가 미끼였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다.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위치까지 올려준 예복 덕분에 잠시 누린 착각은 나쁘지 않았다. 뇌리에 남은 남편의 표정을 떠올리며 ‘내가 특별히 당신과 살아준다’는 오만한 감정을 사탕처럼 빨면서, 세월에 빠져나간 당을 보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설령 제물이었다 한들 나만 제물이었을까. 그도 그 의식에 바쳐진 제물이긴 마찬가지인 것을.
지금까지 흰옷을 자신 있게 입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흰색이 지닌 반사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얼룩질까 봐 먹는 것도 앉는 것도 조심스럽게 하는 색, 무결점의 고집에 부응할 만큼 조신하지 못한 탓에 흰색이 주는 긴장감을 아예 사절해 온 것이다. 무엇 하나 튀면 금방 오점으로 드러나는 색이니 결점 많은 나는 감히 흰색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흰색이 먼저 튀어 들어온 것도 있다는 사실. 검은 머리에 섞이기 시작한 파뿌리가 그것이다. 그것은 세월의 다른 이름. 남편과 나는 동지애로 뭉쳐 우정 호를 타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잘 견뎌왔다. 그러는 사이 순백인 웨딩드레스도 세월 따라 다른 색을 흡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흰색에 빨강색이 섞이면 분홍이 되고 파랑색이 섞이면 하늘색이 되듯, 어울려 다른 색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그 다른 색이 자식이라는 엄청난 결과물이라는 것도.
3월에 어깨를 다 드러내놓은 드레스를 입고도 꽃샘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긴장했던 나는 그때는 웨딩드레스가 날개처럼 가벼운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실크나 시폰 소재로 만들어 아무리 가벼운 드레스라도 그 옷만큼 무거운 옷은 없다는 것을 살면서 알게 되었다. 옆에 선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약속이고, 앞으로 맞이할 생명에 대한 예의이며, 성숙한 어른이 되겠다는 결심….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의 의미까지 담은 옷 이상의 옷이니까.
그 무거운 옷을 용감하게 입었던 나를 새삼 칭찬한다. 그리고 넌지시 일러둔다. 앞으로 몇 번 더 흰옷의 무게를 견뎌야 할 날이 있다는 것을. 가깝고도 소중한 사람과 이별할 때 입을 소복이 그것이다. 부모님을 보낼 때, 그리고 어쩌면 웨딩드레스 옆에 섰던 남자를 먼저 보내야 한다면 그때 입을 예복…. 그 흰옷은 마네킹에 입혀 진열된 적이 없는, 상조회에서 보내는 누워 있는 옷이다. 소복이 모양을 갖추고 바로 설 때, 그것을 입은 여자는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 선다.
나는 그 소복을 두 번 입었다. 아버지를 보낼 때, 그리고 시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스물셋, 서른 살에 입었던 소복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다시 못 볼 이별 앞에서 아직 젊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소복 입을 날이 몇 번 더 남았다는 것을 침착하게 받아들일 자신은 없다. 더구나 남편에게 동지애밖에 안 남았다는 농담을 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의 공포에 가깝다. 마음 같아서는 내 앞에 그 옷이 놓이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싶고, 새삼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더듬어 잡게 된다.
여자는 흰옷을 입으면서 철들고 성숙한다. 여자가 일생에 몇 번 특별한 날 입을 옷에 스민 흰색은 만남의 색이며 이별의 색이다. 시작의 색이고 끝의 색이다.
그러니 여자에게 흰옷은 옷이 아니다. 한 생의 마디마다 찍는 점이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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