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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오덕렬

테오리아2 2014. 12. 1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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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 

 

                                                                                      오덕렬

 

   빛바랜 천자문이 사랑방 벽에 걸려 있다. 어쩌다 사랑방에 들어서 이 천자문과 마주칠 때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그것은 나에게 문자의 눈을 뜨게도 하였지만 거기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 때문이다. 두메산골에서 자란 나는 어릴적 산과 들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며 꼴베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해 봄 우리집 사랑방에 서당을 안쳐 글소리가 마을에 퍼졌다. 소 먹이기를 좋아하던 나도 잠시 서당방에 얽메이고 말았다. 이때에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책이 천자문인 것이다. 소를 몰고 쏘다니던 나는 글방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건성건성 놀기가 일쑤였다. 할아버지의 눈을 피하여 틈만 보이면 서당 아이들과 땅뺏기, 탄피치기에 재미를 붙였었다. 땀과 흙고물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정신없이 나대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어서 글 읽어라’하는 호령에는 모두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 일제히 초성을 뽑는다. 글 읽는 소리는 벌떼처럼 꾸역꾸역 울을 넘으니 동네가 온통 함께 글을 읽었다. 처음에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목청을 돋구었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모르는 글자에 부딪치니 맥이 빠지는 것이다. 옆에서는 눈을 감은 듯 뜨고, 책은 보는둥 마는둥 잘잘 외우고 있질 않은가. 

“하늘이 높음에 해와 달이 밝고 땅이 두터움에 풀과 나무가 자라는도다.” 

 낭랑한 음성에 한 자 막힘 없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런데 나는 책은 아니 읽고 천자문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왜 이리 재미도 없고 어려운 글자만 모여 있을까? 학어집(學語集)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웠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었다. 천자문 읽기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모르는 글자는 중얼중얼하면 읽는 척 책장만 앞뒤로 뒤적였다. 그러니 한지의 필사본인 천자문은 부풀어만 갔다. 모서리가 닳아 한두 자 읽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천자문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다. 책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 보기로 한 모양이다. 이런 천자문과 나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의 뜻도 깨치지 못한 채 서당이 파하여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책과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속에서 길을 찾고 삶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도 있지 않던가? 삶에 영향을 주었던 책을 다시 들춰 보면 갖가지 상념들이 함박눈처럼 내리기도 한다. 이럴 때면 울컥울컥 울음이라도 쏟아낼 수밖에 없게 된다. 되도록 이면 이런 책을 많이 간직하고 싶다. 

  나에게 수필을 쓰도록 부추긴 것도 한 권의 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글이 막히면 이 책을 꺼내 옆에 놓는 버릇이 있다. 곁에 두고 펴지 않은 채 슬슬 딴전을 피우는 것이다. 이곳 저곳에 안부 전화를 넣기도 한고 원고지는 한쪽으로 밀치고 손 가는 대로 수필집을 들추기도 한다. 그러다가 늘상 대하던 구절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아, 이것이구나! 잡히는 것이 있다. 오래 두고 읽어야 할 책이리라. 

  김일손이 한 퇴지의 글을 천독(千讀), 임백호가 중용(中庸)을 팔백 번 읽었다는 듯이 나도 그렇게 해 보리라. 

  이제와서 마음 속의 책으로 자리한 천자문 표지의 먼지를 털며 첫장부터 넘겨 본다. 닳아 없어졌던 모서리 부분은 기워져 새로이 쓰여진 글씨가 또렷하다. 마치 고매(古梅)에서 돋아난 새싹처럼 반갑다. 기워진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어려서 천자문 모서리를 닳게 하듯 내가 교단에 서는 동안 학생들은 나의 어느 구석을 닳게 하지나 않았을까? 그리하여 학생들의 시력에 장해의 요인이 된다면 큰일이다. 학생들이 나를 읽을 때 언제나 쉽고, 새롭고, 감동적이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닳아 없어진 모서리는 새로이 꾸며 교단에 서야 하리라. 

  학생들에게 잊혀지지 않은 한 권의 책으로 남기를 바란다. 삶의 모습이 담겨진 책으로, 대하면 언제나 영혼을 순수케 하는 책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천자문의 화두로 남아 있는 할아버지의 음성을 듣는지도 모르겠다. 

‘어서 글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