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저녁 식사를 마치면 주변을 산책한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없고 포근한 날이라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은 집이 곳곳에 눈에 띈다. 걷다가 창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의도치 않게 듣기도 한다. 이웃의 삶 일부가 열린 창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한적한 길을 걷다 창문으로 불그림자가 얼비치면 그 앞에 잠시 멈추기도 한다.
오늘도 그녀가 사는 2층 집은 불빛이 아늑하다. 거실에 켜진 주광과 백색 전구의 조화는 일터에서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집의 이상향처럼 느껴진다. 산보를 하다 그녀의 집 근처에 이르면 습관처럼 고개가 들려진다. 열린 창밖으로 들려오는 가족들의 웃음소리, 리코더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아이의 노래를 나도 모르게 따라 흥얼거리며 발걸음이 더뎌진다. 가족들의 경쾌한 웃음은 하루를 마감할 즈음의 행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주변을 더욱 환하게 한다. 노랫소리를 들으며 우리 아이들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지난날의 감상에 젖어보는 것도 그녀의 열린 창을 통해서다. 닫히고 어두운 창에서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정경이다.
반면 옆집은 잠에 취한 듯 꿈결처럼 조용하다.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없어 올려다본 창은 언제나 닫혀있고 커튼까지 드리워져 있다. 어두운 창문은 집의 장식품이나 붙박이처럼 여겨진다. 창을 열어젖히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을 집 안 곳곳에 들여놓으면 좋을 텐데. 환하게 열린 창을 보다 어둡게 닫힌 창을 바라보니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닫힌 창은 젊은 시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한 집에 두 여자가 산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 대신인 듯, 남편에 대한 어머님의 집착은 며느리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도 당황해하며 어머님께 동의를 구하려 했지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서운함이 아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짙어졌다. 남편도 어찌할 수 없었다.
부부 사이는 급속히 냉각되었고 시린 마음자리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남편에게 하소연하면 괴로운 표정으로 “인륜은 끊을 수 있어도 천륜은 끓을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듣는 한 마디는 세상이 나에게 등을 돌려버린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 힘들고 고달팠다. 지그럭거리는 불협화음으로 화목한 가정은 요원한 일처럼 여겨졌다. 때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이를 생각하니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해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셀 수 없는 번민의 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두려웠다.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이는 날이면 구석에 내 몰린 듯 웅크리며 지냈다. 검은 고독은 내면에 견고한 성을 쌓아 타인의 따뜻한 배려와 위로의 말조차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꽁꽁 언 마음은 상대를 밀어냈다. 타인이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면 친밀해진 이후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픔의 감정이 실제의 무게보다 더 크게 짓누르면 목울대를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경직되고 부닥친 삶은 악몽을 꾼 시간처럼 더디게 흘렀다. 한동안 스스로 예속된 틀에 갇혀 한정된 시야로 보이는 삶이 전부인 양 여기며 살았다.
세월이 흘러 첫째와 터울이 진 둘째 아이가 커가며, 어머님은 남편에 대한 집착이 다소 느슨해졌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손자 손녀의 재롱이 살갑게 다가오며 아이들을 끔찍이 여기셨다. 자식을 키울 때 몰랐던 사랑을 손자를 통해 또 다른 사랑을 알게 된 것이었다.
어머님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손자에게로 향해지며 버겁다고 여겨지던 삶에 서서히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시간은 순리대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했다. 닫힌 창으로 스며드는 대기의 흐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밀폐된 공간에서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 창을 열어젖혔다.
열린 창으로 바라 본 세상은 삶의 질과 사는 재미가 곳곳에 숨바꼭질하듯 숨어있었다. 창문으로 밀려드는 청량한 공기는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바람을 폐부 깊숙이 받아들이며 기분 좋은 공기가 온몸을 피돌기 하듯 순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흥의 접점은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닫힌 창에서 고착화 된 인식으로 바라보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 번도 맞닥뜨려보지 못한 슬픔에 속앓이만 했던 것이었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 파묻힌 기억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지난날은 헛된 얽매임에 불과했다. 한 줄기 바람에도 아파하고 고뇌했던 것은 부족한 나 자신과 힘겨루기였음을 뒤늦게 안 것이었다.
산책길을 되돌아오며 그녀의 집을 다시금 바라본다. 마음을 열고 누구든 환영한다는 듯 창은 열려있다. 바람, 공기, 사람의 시선까지도. 지금은 2층 창이 더 밝고 환하다. 그녀가 앞 베란다 창가에 책상을 두고 책을 읽고 있다. 이맛머리를 쓸어 올리고 책에 집중하는 모습은 짐작했던 것처럼 선한 인상이다. 평소 지나치며 눈인사를 나눈 사이다. 땅에서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지근의 거리처럼 다음에 만나면 무람없이 손을 내밀며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창 너머이지만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처럼 그녀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낀다. 오래전부터 마음으로 들인 사이처럼 열린 창으로 온화한 눈길을 보낸다.
'그룹명 > 수필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빨래를 널며/왕린 (0) | 2022.09.25 |
---|---|
콩나물국을 먹다가 /최운 (1) | 2022.09.25 |
기차는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정성화 (0) | 2022.09.25 |
마당/김해남 (1) | 2022.09.25 |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에 대하여/맹난자 (0) | 2022.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