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소리
정혜옥
복숭아밭을 지나자 저만치 학교의 지붕이 보였다. 내가 어린 시절에 다녔던 산골 초등학교이다. 눈에 익은 산과 들, 학교 앞을 지나가는 강물과 신작로, 모든 것이 반갑고 정겹다. 학교 옆 교장관사로 가는 밭두렁 지름길도 그대로 있다.
밭두렁 위로 올라섰다. 지난날 검은 무명치마를 펄럭이며 우리는 잘도 이 길을 뛰어다녔었다. 그때의 촌 가시내로 돌아간 듯 나는 그 언덕길을 빠르게 걸어갔다. 발에 채이는 풀꽃의 모습도 그때와 변함이 없다. 작고 귀여운 옛 친구를 다시 보는 듯하다.
지금 우리는 아버지의 백일 탈상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앞서가신 어머니를 따라 마침내 이 세상을 훌훌이 떠나가신 아버지,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함께 누렸던 추억을 찾아 나는 지금 이 산골에 와 있다. 어쩌면 부모님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는 이 땅을 거닐어 보고 싶어 차를 돌려 일부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방학 탓인지 운동장이며 교실이 텅 비어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우뚝 서 있는 학교 건물, 그러나 옛날의 낯익은 목조 건물이 아니다. 교무실 창문 밖에 매달려 댕그랑댕그랑 소리를 내던 놋쇠 종이며 우리가 살았던 교장 관사도 보이지 않는다.
마침 지나가는 남자에게 우리 아버지에 대해 물었다. 그 사람은 이 학교를 다녔지만 그런 옛날의 교장 이름은 모른다 하며 출세한 어떤 졸업생이 돈을 내어 새 학교를 지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러면서 낡은 교장 관사도 그때 탕탕 부수어 버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집이 서 있었던 자리를 찾아보았다. 이미 그곳은 돌자갈만이 뒹구는 밋밋한 땅으로 변하여 있고 우리가 가족사진을 찍었던 들찔레 덤불도, 학교로 빠져나가는 사잇문도. 그 문옆에 있던 샘터도 보이지 않는다.
마루 끝에 서서 건너다보던 산과 들은 그대로 있는데 들고나던 문이며 경계를 이루던 방과 벽은 무너지고 없다. 이제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무엇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또 내가 여기에 살았음을 증명하여 줄 것인가.
문득 한낮의 고요를 헤치며 소리가 들려 왔다. 풍금소리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풍금소리. 아직도 이 학교에 풍금이 남아 있다니. 그 옛 풍금이 그때의 소리를 내고 있다니. 나의 마음은 갑자기 기쁨으로 차오르고 옛 기억의 울안으로 빠져든다. 그 풍금소리는 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탕탕 부수어져 버린 옛집과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풍금소리를 되살려 준다.
어머니는 학교가 비어 있는 일요일 같은 땐 자주 빈 교실에 들어가 풍금을 치셨다. 푸른 다늅강이니 사하라 사막이니 오동나무 같은 노래를 악보도 없이 치셨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우리는 어머니의 풍금소리가 들리면 하던 놀이를 내던지고 달려가곤 했다. 칸칸이 교실의 문을 열어 마침내 찾아낸 어머니, 산골 아이들의 흙냄새가 남아 있는 빈 교실의 적요와 서늘한 냉기가 다시 생각난다.
노래 한 구절 치시고 먼 들을 내다보고 또 노래 한 구절 치시고 먼 산을 바라보던 어머니. 그때 어머니의 마음은 이 세상 어느 높은 곳을 꿈꾸고 있었길레 그리도 아련한 눈빛이 되셨을까.
그 풍금 곁에서 배운 노래가 기억난다. ‘오동나무 비바람에 잎 떠는 이밤, 그리웁던 네 동무가 모였습니다’ 또는 ‘이 비가 개이고 날이 밝으면 그리웁던 네 동무가 흩어집니다.’하는 노래이다.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흥얼거릴 때면 어머니의 풍금소리가 귓전에서 들려온다.
넓은 오동잎에 내려앉는 비바람. 방의 등불 밑에 모인 옛 동무들, 마침내 비가 개인 날의 더욱 푸르름과 밝은 날의 삶과 헤어지미 이런 것들의 의미가 기쁨도 되고 비애도 되어 가슴에 젖어온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가 풍금을 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교실의 창가에 기대어 서서 보고만 계셨다.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어머니의 세계. 그 정신적인 영역을 지키고 있는 듯. 풍금을 치시느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어머니의 야윈 어깨며 저고리의 등판 같을 것을 바라보기만 하셨다.
그때 나는 빈 칠판에다 흰 분필로 그림을 자주 그렸었다. 풍금 앞에 앉은 어머니의 옆모습이며 창문 밖으로 어른거리며 날아가는 새떼 같은 것을 그렸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너는 다음에 화가가 되어라.’하셨고 아버지는 ‘풍각쟁이’‘환쟁이’ 하며 어머니와 나를 놀리곤 했다.
그때 어머니의 가슴속에 너울거리던 아름다운 감성은 적막한 산골에 갇혀 흐르지 못하는 강물처럼 고여만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마침내 풍금소리로 풀려나 빈 교실의 창문을 넘어 먼 산과 들로 흘러흘러 간 것이 아닐까.
갑자기 풍금소리가 뚝 그쳤다. 온 천지가 깊은 고요 속으로 빠져든다. 어머니의 풍금소리는 어느 곳으로 숨어 버렸을까. 나는 그 소리를 찾아 빈 학교와 운동장을 둘러본다. 그러나 그 넓고 큰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운 것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어머니의 풍금소리를 삼켜 버린 새 건물과 여름 한낮의 뜨겁고 긴 침묵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우리가 여기 어울려 함께 누린 삶이 한바탕 꿈이었던가. 한자락 환상이었던가. 오후의 햇살을 받은 새 학교의 창문이 일제히 황금빛으로 번들거린다. 그 모습이 매우 낯설고 도도하다.
나는 그 도도함과 침묵을 못견디어 하며 다시 한번 그리운 풍금소리가 들려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