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이 움직인다
고 윤 자
우리 집에는 꼭 필요한 물건들만 존재한다. 비능률적인 요소는 되도록 치워버린다. 식구도 많고 모두가 바쁘기 때문이다. 살아갈 힘을 주는 맛있는 음식이 있고, 외부로부터의 추위와 더위를 가려주는 문명의 이기도 있다. 더러움을 말끔히 씻어내 주는 빨래 기계며 재미와 오락으로 정신적 피로를 덜어주는 정말 놀라운 물건도 갖추어져 있다. 아이들이 있어 하루하루가 얼마나 보람되고 행복한지를 우리들에게 꼬박꼬박 인식시켜 준다. 모두들 쓸모가 있고 자기의 기능에 충실한데, 그저 존재만 할 뿐 역할은 없는 물건이 딱 하나 있다. 남편이다.
남편이 출근을 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챙기고 구두를 손질한다. 국물이 없으면 식사를 못 하는 주인의 버럭 하는 성정을 위해, 전날 저녁부터 미리 국은 준비되어 있다. 상에 올리는 차례도 까다롭다. 차가워야 좋은 음식과 따뜻해야 하는 음식을 구분하여 순서대로 대령한다. 가장 늦게 행차하는 것이 방금까지도 가스레인지 위에서 사정없이 끓고 있던 몹시 뜨거운 국이다. 아무리 바빠도 뜨겁지 않으면, 아예 입조차 대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곧장 일어서서 장롱 앞으로 간다. 깨끗한 옷을 입으면 강의가 더 잘된다는 이유로 하루에도 몇 번씩 땀만 차면 벗어 놓는 와이셔츠들이 어느새 말끔히 다려져 일렬로 옷장에 걸려 있다. 아내의 노고가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보다는 으레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당위론 쪽이다. 옷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남편은 거울 앞에서 만족한 듯 이리저리 훑어보고 현관을 향한다. 스쳐가는 그의 몸에서는 가족 모두에게 이미 익숙해진, 고급스런 향수 냄새가 배어 있다. 구두는 벌써 나아갈 방향으로 앞을 보고 있고, 잘 닦여져 길이 난 가죽가방이 마루 끝에 기다리고 있다. 강의를 위해 준비가 끝난 몇 권의 책과 노트, 서류파일 등이 보인다. 남편은 그저 이나 닦고 아내가 들려주는 출근가방만 끼고 나가는 것이 할 일의 전부다. 아이들과 나는 이런 남편을 장승이라고 불렀다. 동네 입구에서 아무런 역할도 없이 여러 사람의 숭배를 받고 있는 장승, 그의 일련의 행동이 장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은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다. 수컷은 짝짓기를 담당할 수 있도록, 암컷은 이세를 양육하도록 특화된 유전자를 부여한 것이다. 여성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게 된 양육과정은 남성과 여성이 장기적인 부부관계를 맺음으로써 보완이 시작된다. 남성이 도구를 이용해 사냥활동에 나서는 동안, 여성은 안정적인 생산 활동에 기여하면서 성과를 공유하는 분화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집 장승과의 계약에는 분화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전혀 활동에 기여하지 않으면서 역할을 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하는 것이 흡사 마을 입구의 장승이다. 지역 간의 경계를 나타내고 방향을 가리키며 그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것이 장승의 임무 아닌가. 우리 집에는 임 씨라는 가족 구성원이 살고 있고, 이 구역에서는 장승의 권력이 상존하고 있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음을 존재로써 나타낸다. 가끔 인생과 도덕과 가정교육에 대해 방향 지시만 할 뿐이다. 그렇게 무노동과 부동의 남편이, 몇 해 전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존재 자체로서 대표하고 있는 장승의 역할마저도 힘이 들었던지 그만 훌쩍 세상을 버렸다.
그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둘째 아들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시골에 있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느라 밤을 새워서인지, 오는 길에 순간적으로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중앙선을 넘은 차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 상황에서도 아들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기적이라고 쑤군대는 사람들 뒤에 무서운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버티고 서 있는 애비장승이 있었다.
이혼의 아픔을 극복하느라 미국으로 떠난 셋째 아들은 먼 곳을 돌아 돌아 한국에서도 찾기 어려운 착한 규수를 만났다.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그가 육신을 가져야만 이룰 수 있는 짝을 찾아 맺어주었다. 이번에도 장승이 그 착한 규수의 눈을 가리고, 사랑에 눈이 멀도록 강력히 개입을 한 것 같다. 그 곳에도 자식의 사랑에 눈이 먼 바보가장이 버티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완전히 비이성적이라며 웃어넘길 일을 찰떡같이 믿게 될 때가 있다. 그런 것이 실제로 비이성적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사실적이지 못한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이러한 이성을 초월하는 초이성(超理性), 예컨대 실재보다 더 큰 그림 안에서만 이해되는 그런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신앙은 그런 곳에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사랑의 심연이 완성되는 순간, 버드나무 둥치를 안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남편의 기적을 만난다. 버드나무 둥치는 몇 개의 지병을 갖고 맘속에 끄지 못한 불길들이 있다. 노래를 하지 않는다고 누가 둥치를 음치라고 하겠는가. 장승은 이젠 우리들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인다. 우리 가족이 당하는 어려운 일에 매순간 그가 곁에 있고, 일일이 참견하고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낀다. 어느새 남편은 나의 신앙이 되어 가고 있다.
장승이, 그냥 가만히 서서 존재하는 일을 그만두고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후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