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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희 웃음과 울음

테오리아2 2012. 7. 2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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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울음

이주희

사람은 대개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운다. 그러나 더러는 기쁠 때 우는 사람도 있으며, 슬 때 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보면, 웃음과 울음을 꼭 희비와 관련지어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 하기도 하고, ‘웃는 얼굴은 화살도 비켜 간다.’고 한 말에는 웃음을 찬양, 권장하는 뜻이 담겨 있으나, 이와는 반대로 ‘치자다소(痴者多笑)’이라고 한 말에는 웃음을 천시, 경계하는 뜻이 담겨 있다.

웃음의 이러한 양면성은 울음에도 적용된다. 속담에 ‘봄 꿩이 제 울음에 죽는다.’ 한 것을 보면 데데한 일에 함부로 울어서는 안 될 것 같고, ‘노여움을 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울음’이라고 한 연암(軟巖)의 말을 곱씹어 보면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웃음과 울음의 이러한 양면성은 모두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기뻐서 웃고 슬퍼서 우는 것을 상정이라 할 수 이으니, 굳이 기쁠 때 울고 슬플 때 웃는 사람의 행위를 범상타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첫돌 갓 지난 내 외손자 병일이는 울기도 잘하고 웃기도 잘한다. 배가 고파도 울고 잠이 와도 운다. 또 어른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잖은 일인데도, 어떨 때는 금방 숨이 넘어갈 듯이 까르르 자지러지게 웃기도 잘한다. 어린아이는 이렇게 천진무구하여 웃음과 울음에 가식이 없다. 얼굴에 웃음이 깔리면 그저 좋아서 웃는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고, 울 때도 욕구 불만이거나 몸이 아프기 때문에 운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기쁨과 웃음, 슬픔과 울음 사이에 상관성이 매우 높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양자 간의 상관관계는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은 꼭 기쁠 때만 웃는다든지 슬플 때만 운다는지 하는 법은 없다.

기쁠 때 우는 사람은 다감한 사람이요, 슬플 때 웃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다. 기뻐서 우는 울음은 웃음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감격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슬플 때 웃는 웃음은 웃음에 묻어 있는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자칫 성자 풍의 대인쯤으로 대접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보다는 차라리 기성의 풍습이나 상식 따위를 무시하려는 냉소주의자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희로애락을 쉽게 얼굴에 드러내지 아니하는 사람을 군자라고 해 왔다. 하지만 기뻐도 웃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는 목석연한 사람만 모여서 산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무미건조해지고 말 것인가.

인간은 언어를 가진 유일한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말없이 짓는 잔잔한 미소가 열 마디의 ‘기쁘다’는 말보다 더 강렬한 기쁨의 표현일 것이요, 소리 없는 오열이 백 마디의 ‘슬프다’는 말보다 더 절절한 슬픔의 표현일진댄, 웃음과 울음은 이와 같이 감정 표현에 있어서 언어가 지닌 기능보다 더욱 강렬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영취산에서 보여 준 가섭(迦葉)의 미소가 그렇고, 시사의 어찌할 수 없음에 상심한 가태부(賈太傅)의 통곡이 그러하다.

굳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라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을, 불쇄이별간(不灑離別間)이라고 읊조린 선인의 심지를 흉내 내지 못할진댄, 웃을 일에는 웃으면서 살고, 울고 싶을 때는 울면서 사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웃을 때는 같은 값이면 가가하면서 대소할 것이요, 장부비무루(丈夫非無漏)라 하였으니 슬플 때는 두 손바닥에 눈물이 가득해지도록 울어 볼 일이다. 쌍가마 속에도 눈물은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반은 웃음이요 반은 울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