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베고니아가 꽃잎을 열었다. 화분을 선물 받으면 식물을 키우는 능력이 젬병이라 다른 이에게 나눠줬지만, 봄인데 진료실이 너무 삭막하다는 간호사의 핀잔에 그만 덥석 들여놓고 말았다. 막상자리를 내어주니 괜히 신경이 쓰인다. 쌀쌀한 날씨에 얼까, 온도가 높으면 마를까, 물은 얼마 만에 줘야 할지, 사람도 영양제를 맞는데, 이 녀석도 영양제를 줘야 하는 건 아닌지, 여간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에이, 그냥 누굴 줘버릴까.’ 생각이 들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시하는 간호사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퇴근길에 생전 발걸음을 않던 꽃가게에 들렀다. 쭈뼛거리는 내 모습에 아내에게 줄 꽃바구니라도 사러 온 것으로 착각한 주인이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이 꽃 저 꽃을 보여주는데, 그게, 저…, 작은 베고니아꽃에 줄 영양제 하나 사러 왔다는 말에 주인의 얼굴엔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쭉 내밀어 영양제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어떤 것이 좋을지 물으니 대충 그중에 아무거나 하나 골라서 주면 된다고 한다. 하긴 10개 가격이 이천 원 정도니 팔아도 남는 게 없어 보이긴 하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값을 치르고 소중한 보물인 양 윗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얼마간 진료가 바쁜 중에도 창가로 눈이 가곤 했다. 기특하게도 손을 별로 주지 않았지만 어린 녀석이 꿋꿋이 자란다. 남향 창의 따가운 햇빛을 가리던 커튼도 가끔 열고, 아직 찬바람이지만 혹시 갑갑한 마음이 들까 하여 창문도 조금 열어 두었다. 물도 자주 주고, 어느 날은 기운이 없어 보이기에 간직해 두었던 영양제 한 통을 화분에 푹 꽂아 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녀석은 기운을 차리질 못했다. ‘그래! 아이들도 자랄 땐 양분이 더 필요한 법이야. 영양제도 주고 물도 더 자주 줘야겠어.’ 하지만 그게 탈이 된 줄은 축 처진 녀석의 어깨를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조바심 나는 마음이 발걸음을 꽃가게로 달리게 했다. 녀석을 품에 안고 가게로 들어서는데 주인이 내 얼굴은 본체만체고 손에 든 화분만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이고, 이 아이가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을 많이 했구나.”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는데 한 귀로 흘려듣던 주인은 내게 퉁명스레 그냥 두고 가면 며칠 후에 연락을 준다고만 짧게 답했다. 무언가 더 물으려는데 꽃가게 주인은 이미 화분을 손에 들고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여러 번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죄책감 때문인지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보호자의 마음이 이런 거겠구나. 내게 가족을 맡겨둔 채 가끔은 진료실 문 앞을 기웃거리던 환자 보호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마다 난 밀린 환자 탓을 하며 자상하지 못했고, 간호사를 시켜 회진 때 만나자는 말만 남겨두고 그나마 짧은 그 시간 동안에도 궁금해 따라오던 분들을 성의 없게 대하지 않았던가.
‘그 죗값을 지금에야 톡톡히 치르는구나.’
한 주가 끝나갈 무렵엔 비가 잦았다. 습관적으로 바라보던 창가에 빗방울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리고 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공허함이 주는 시간은 길기만 했다. 비가 그치기가 무섭게 꽃가게로 갔다. 스마트폰에 남겨진 문자 메시지 때문이었다. 주인의 얼굴이 밝았다.
“이 아이가 살려고 했는지 맡겨진 다음 날부터 조금씩 몸을 움직이더라고요. 물도 받아먹고, 햇빛 쪽으로 가려고도 하고….”
꼬박 열흘 동안 아이를 침대 옆에 두었다고 했다. 자기도 마음이 안 놓여 그랬다는 그녀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고마운 마음을 표하려고 지갑을 열었지만, 주인은 손을 내저었다. 무슨 아이를 살리는 데 돈을 받느냐고, 그냥 살아준 것만 해도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발길을 돌리는 순간까지 주인은 물 주는 방법, 햇빛은 언제 쓰는지, 영양제를 주는 시기까지 꼼꼼히 챙긴 후에도 미덥지 못하단 표정으로 내 손에 연락처가 담긴 명함까지 건네주었다.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조금 전 심폐소생술로 회복한 환자를 대학병원으로 이송하면서 진료비를 청구할 때 행여 빠뜨린 게 없도록 철저히 하라고, 돈을 보낼 계좌번호를 다음 날 문자로 보내주라고 직원에게 신신당부하고 나오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생명을 살린 것은 똑같은데, 아! 난 꽃가게 주인과는 다른 마음을 먹었구나.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소중한 것에 그동안 저울을 들이대고 살아왔던 것 같다. 한쪽으로 무게가 기울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바로잡기 위해 난 어느 쪽을 포기했던가? 그러면서 물질보다 소중한 것을 잃고 있었는데 미처 깨닫지 못했구나, 사랑이 그랬고, 열정이 그랬으며, 기쁨이나 행복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나이가 들어 감정이 무뎌진 탓이라고, 너무 반복된 일상이다 보니 싫증이 났다고 그럴싸한 이유를 붙였지만, 실상은 가치 있던 일이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평범해진 순간 그것은 내 어깨를 짓누르며 빨리 벗어야 할 짐이 되어버렸던 것을. 그냥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맙다는 꽃가게 주인의 말이, 대가보다는 생명이 더 소중했던 그녀의 행동이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미 나는 열정과 사랑이 식어버린 의사(醫師)를 흉내내는 어긋난 의사(疑士)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 앞으로 노력한다면 욕심이 비워진 화분에 더 아름답고 소중한 꽃을 피울 수는 있을지?
돌아오는 길, 비 갠 봄날의 햇살이 따사롭다. 그새 제법 무거워진 화분에 눈이 간다.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품에 안긴 베고니아꽃이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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