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경주마 이야기
신현길
늙은 경주마가 있었다. 지난 6년 동안 106경기에 출전하였으나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다. 중앙경마장도 아니고 마이너리그 중에서도 최하위의 경마장인데도 꼴찌는 항상 그의 차지였다.
몇 년 전에 일본을 달구었던 ‘하라우라라’라는 이름의 경주마 이야기다. 꼴찌임에도 그의 인기만은 정상을 누렸다. 그가 출전하지 않으면 경마장의 흥행이 떨어질 정도로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 경마장 입구에는 그를 캐릭터로 해서 만든 인형이나 열쇠고리가 없어서 못 팔정도라고 하였고 신문에서는 이 꼴찌 전문 말을 히트상품의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전국으로부터 몰려드는 사람들로 경마장은 만원을 이뤘다. 그들의 손에는 하루우라라의 스탬프가 찍힌 마권이 쥐어졌다. 솔직히 하루우라라가 우승할 확률은 거의 없었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왜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을까.
그들은 말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몸도 작고 늙은 데다 체력까지 떨어진 하루우라라는 지지부진 하다가도 반드시 한번은 전력 질주함으로써 ‘자신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느 경기에서나 꼭 한번만큼은........그것이었다. 관중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았지만 뭔가 잘 풀리지 않는 자신을 그 말에서 보았고 말을 응원하는 동안 스스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새로운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그에게.......
지나온 일생을 생각해보면 실패할 이유도 퇴출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경주마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투사였고 전사였다. 전 생애를 통해 최선을 다해 살지 않은 때가 없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경주마란 무엇인가. 앞에 무엇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고, 곁에 무엇이 있는지 한눈팔지 않고 눈가리개를 한 채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숙명의 존재가 아니던가. 그는 자신의 운명에 순종했고........ 그렇게 성실하게 살다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줄로 믿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일이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았다. 꼴지였다. 이 사실을 너무 늦게야 알아차렸다. 이미 나이 들고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때에 이르러서야 그는 스스로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왜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걸까.
그럴지언정....... 이제 와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세상이 모두 버려도 그 자신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 다시 시작하자. 그제야 깨달았다. 삶이란 외부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란 것을. 자신의 과거전적과 싸웠고 그동안 지녀왔던 습관과 기술과도 싸웠다. 무엇보다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좀 쉬고 싶다’며 포기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과 질긴 싸움을 해야만 했다. 힘들 때마다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 날, 사람들은 이상한 말을 보게 되었다. 죽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끝까지 달리는 독종을 보았다. 저 늙은 말이 미쳤나보다. 저러다 쓰러지겠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놀라웠고 감격스러웠다.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눈물 나도록 서럽게 달려 나가는 희망을 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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