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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부산/ 6월 18일, 수요일] 오봉산과 여근곡-참고자료

테오리아2 2014. 10. 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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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과 여근곡  

 

 

 

1. 여근곡은 경주시 서면 신평2富山 계곡에 솟아오는 작은 산이다. 정면에서 보면 여근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전체 모양을 둥글게 싼 부분은 소나무 숲으로 덮여있고, 그 안쪽은 관목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빽빽한 관목 숲 가운데 샘이 있다.

 

이 샘은 지금 동네 상수도의 수원지이다. 30여 년쯤 전 새마을사업으로 공사했다.

당시 동네 노인들은 샘을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반대했지만 젊은이들은 미신이라며 공사를 강행했다.

상수도 파이프를 설치하면서 샘의 신비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 샘을 작대기로 쑤시고 휘저으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믿기 때문에 샘물은 동네 어른들이 철저히 지켜왔다.

타동네 총각들이 이 동네 처녀들의 바람기를 부추기기 위해 몰래 이 골짜기에 들어와 작대기로 휘저었다고 한다.

마을 어귀 부처못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어 여근곡을 가리기도 했다.

 

2. '여근곡 전망대'에 서면 여근곡을 품은 오봉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오른쪽 능선은 임신한 여인이 누운 모습이다. 이 여인의 머리 부분이 오봉산 정상이며 나머지 4개의 암봉이 정상과 합쳐져 五峰山으로 불린다. '여근곡 전망대'에는 수석수집가인 박용 씨가 모은 여근과 남근을 닮은 희귀 수석이 많다.

마을 앞 고속도로(서울 기점 346.5km지점)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인다. 햇살이 잘 드는 오전에 잘 보인다.

 

 

 

3. 신평마을 앞에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가 향나무 밑에 목 없는 돌부처가 여근곡이 보기 거북한지 외면하고 있다. 신라 때 돌부처라 한다.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이 돌부처에 기도를 드렸다.

 

 

 

4. 연못가에는 높이 1.5m쯤 되는 펑퍼짐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알터가 있다.

 

5. 유학사 대웅전 왼쪽에 '여근곡 청정수'라 적힌 샘이 있다. 산속 여근곡 샘에서 호스로 끌어온 물이다.

 

 

 

6. <삼국유사><삼국사기>에 여근곡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1권 기이 제1 선덕여왕 知機三事 조에,

27德曼의 시호는 선덕여왕, 성은 김씨,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壬辰(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 미리 안 일 세 가지가 있다.

(첫째와 셋째는 주제와 관련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 閼川 · 弼呑 등에게 명하여 잘 훈련된 군사 2000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을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령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보니 부산 아래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다. 이들을 모두 죽였다. 백제의 장군 亏召란 사람이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있으므로 포위해 활을 쏘아 모두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였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개구리가 우는 것으로 백제 군사들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왕은 개구리가 성난 모습을 한 것은 병사의 형상이고, 玉門이란 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색깔은 희다. 흰색깔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에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백제군이 남근이므로 옥문곡이라는 여근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곧 죽게 돼 있으니 쉽게 잡아 죽일 수 있다는 풀이이다.

선덕여왕은 사내들이 그것도 몰라라 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신라의 전통사상에 이미 음양사상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신라인은 성교와 생사를 연결하는 인식을 보여준다.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George Bartaille<에로티시즘>에서 에로스는 작은 죽음이라는 말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조에도 기록이 있다.

…… 5(636) 5월에 두꺼비와 개구리가 때를 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로 모여들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두꺼비와 개구리는 성난 눈이니 이는 군사의 상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변에 玉門谷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들의 징조로 미루어 반드시 백제 군사들이 몰래 그곳에 침입하여 있는 것 같다하고 곧 장군 알천 필탄 등에게 명하여 이를 수색하여 토벌하게 했다. 알천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니.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옥문곡에 와서 복병을 설치하고 있으므로 알천 등은 적을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

 

<삼국사기>에는 백제군이 남근인지라 옥문곡이라는 여근으로 들어가면 곧 죽게 돼 있으니 쉽게 잡아 죽일 수 있다는 선덕여왕의 에로틱한 설명은 없다. 김부식은 이런 것은 아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김부식은 유교적 교양으로 무장된 사람이며 <삼국사기>는 관찬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女根谷에 대한 전승이 경주 지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모양이다.

 

6.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성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무를 베거나 오물을 버릴 수 없고 잡인의 출입도 금한다. 이곳을 더럽히면 재난이 온다고 믿었다.

한국전쟁 때 민둥산이 되어 가뭄과 기근이 심했다. 전쟁 직후 마을 제대군인들이 다시 보살피기 시작하여 울창한 숲으로 덮였고, 다시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백제군이 유독 오봉산 여근곡 인근인 건천땅에만 오면 이상하게도 힘을 쓰지 못한 것, 한국전쟁 때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경주 점령 직전에 한번 브레이크가 걸린 것도 모두 여근곡 음기 덕분으로 전해온다.

 

1996년 경주 서쪽의 건천땅 한 마을 뒷산에 큰 불이 났다. 북쪽 산자락에서 시작하여 반대편인 남쪽 기슭까지 온 산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불덩어리가 휙휙 날아다녀 반나절 만에 산 하나가 홀랑 다 타버렸다.

그러나 산의 한가운데 여성 성기를 닮은 한 지점은 신기하게도 불길을 피했다. 샘 주변은 매우 축축하여 근방을 적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근곡에서 보이는 들판도 원래 이름이 '썹들'이었지만 장난삼아 '씹들'이라고 짓궂게 부르기도 한단다.

 

7. 우리나라에는 여근 모양의 지형이 몇 군데 있다. 이런 곳은 명당이거나 흉한 자리로 사람들은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산세가 사람이 다리를 벌린 듯한 모습이면 흉한 곳이며, 정숙하게 오므린 모습이면 명당이다. 흉한 산세 아래에는 여자들이 바람기가 거세지고 남자들은 양기가 위축된다고 믿었다.

 

지금 마을 앞 여근곡이 바로 보이는 곳에 국도, 철도, 고속도로가 있지만 옛날에는 한양으로 오가는 길이었다. 조선조에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 보게 되면 재수가 없다고 하여 이 근처를 지날 때는 미리부터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고, 새로 부임하는 관리들, 싸움터에 나가는 장수들은 일부러 멀리 안강 쪽으로 돌아 경주나 그 밖의 임지나 전쟁터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여근곡 아래 사는 마을 주민들은 여근곡 산 반대쪽 들 건너 마주보는 산을 남성 산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주민들에게 전해오고 있다. 한때 앞산은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남근을 세우고 여근곡으로 접근해왔다는 것이다. 들을 건너려 할 때 마침 이 들을 지나가던 행금장이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호통을 치며 막대기로 그 돌출한 부분을 내리쳤다. 너무 세게 쳐 그만 돌출 부분이 잘린 채 앞산에 주저앉고 말았다. 현재 철도와 고속도로 중간에 길게 누운 언덕이 그때 잘린 남근이라 한다. 유학사에도 남근석을 세웠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신라의 기를 꺾기 위해 거대한 남근형 산을 잘라 철도와 도로를 냈다고 노인들은 말한다.

 

총각바위는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 발산리 대방마을에 있다. 대야면 소재지에서 버스로 약 15분쯤 가면 오른쪽 평야 가운데 있다. 높이 1.63m, 둘레 1.8m이다. 원래 이 바위는 마을 뒷산 암메산과 관련이 있다.

평야 건너 서쪽의 삼수동(삼시동)에서 해질녘에 이 산을 보면 여자의 음부가 저녁놀에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삼수동의 여자들이 바람이 자주 나므로 이를 누르기 위해 대방마을 입구 곧 암메산 골짜기 입구에 이 총각바위를 세웠다고 한다.

대방마을은 달팽이 모양의 샅이고, 가운데가 갈라져 계곡이다. 붉은 노을이 깔리면 황토의 대방산은 여근이 된다. 삼수동(군산시 운동장)에서 보면 잘 보인다.

 

전라남도 영암군 곤이시면 독천리 독천시장1929년 동면 용산리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독천 시장 옆에 이씨묘가 있다.

이곳은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를 쓴 것이다. 묘를 쓴 후 자손은 번창했으나 부녀자 들 중에 음란한 자가 많이 나왔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묘지는 여근형이고 그 국부에 해당하는 자리에 샘이 있었다. 샘은 지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자식은 번창하나 샘이 음수이기 때문에 음기가 작용하여 음란한 자식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대책은 이장을 하거나 음기를 중화하는 방법이다. 묘 앞에 양기가 가득 차게 하기 위해 한 달에 여섯 번씩 많은 남자들이 모이는 시장을 개설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후 음란한 자식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 富山城(사적 제25)朱砂山 · 五峯山(633m) · 吳老峯山 · 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729.5m富山(夫山)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싸 마련된 포곡식 산성으로서, 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주 서쪽의 교통의 요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정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산줄기 또한 모두 부산성이다. 산의 이름에 혼란을 보이고 있지만 오봉산 건너편 산줄기에도 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富山을 오봉산보다 큰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석축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 석재를 사용하여 안팎을 쌓아올리면서 내부에는 잡석으로 채우는 夾築法으로 쌓았다. 성 밖의 지형은 사면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를 위한 천험의 요새지이며, 성내는 평탄한 지형이 많고 물이 풍부하여 거주에 적합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무왕 3(663)에 정월에 쌓았다. 성은 둘레가 3600 , 높이가 7척이며 면적은 762,874이다. 산성 안에는 연못 1, 溪川 4, 우물 9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무너져서 형태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파손되어 무너진 성벽 돌이 산허리에 널려 있다.

성내에는 지금 성문은 4개가 터가 남아 있으며, 南門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그밖에 軍倉· 연병장터 · 朱巖寺터 등 건물터와 우물터 · · 暗門터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치성도 2개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 성을 夫山城이라 하고, 둘레가 2,7653척이라하고, 군창이 있었다고 하므로 조선 초기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전략의 요충지로서, 선덕여왕 때 백제 군사가 이 산을 넘어 玉門谷(女根谷)까지 침입한 일이 있은 후에, 도성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남산신성의 長倉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쌓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성은 서쪽에서 침입해오는 백제군을 막는 경주의 외곽성이며, 난리 때는 주민들의 피란처 역할도 했을 것이다.

 

이 성을 짓기 전인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산 아래 여근곡까지 침입했다가 토벌되어 500여 명이 죽었으며, 무열왕 때 이 성은 백제군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함락되어 신라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선덕여왕 시절에는 신라는 일시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자주 받았다. 여왕이 주는 연약한 이미지가 외세의 침략을 불렀을 것이다. 백제는 의자왕이 진흥왕 · 진평왕 때 입은 국치를 씻기 위해 국력을 기울였고, 고구려 역시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점이었다.

 

 

 

선덕여왕 때 여근곡에 침입한 백제군은 신라의 심장부를 일시적으로 강타하기 위해 파견된 별동대였을 것이다. 여근곡은 신라의 서라벌로 직결되는 수도 방어 일선지역이다. 백제 주력부대는 주로 충청도 보은, 옥천, 대전을 거쳐 대구를 관통하여 서라벌로 들어온다. 별동대는 서라벌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거창, 청도를 거치는 산간지대를 이용했다.

서라벌의 서쪽 최후 방어선은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선도산 뒷산인 선도산성이다. 여근곡의 뒷산이 주사산이고 이 산에 신라의 주성 가운데 하나인 부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전략상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부산성 안에는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군창을 비롯하여 절과 민가가 있었다. 이곳에는 주암사가 있었으며, 화전민들의 집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초등학교 분교도 있었다.

 

朱砂寺는 경주시 서면 천촌리 오봉산 정상에 있다. 신라 문무왕(661~681) 때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에는 朱巖寺라 했으며 신인종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영산전과 큰 방, 산령각이 있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모셨다. 탱화 한 폭이 있는데, 의상대사(625~702)라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창건 설화가 있다.

신라 때 한 도인이 이곳에서 신중삼매를 얻고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리라했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한밤중에 궁녀를 훔쳐 새벽에 돌려보내곤 했는데, 궁녀가 두려워 왕에게 아뢴다.

왕이 궁녀에게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라고 했다. 이어 병사들에게 붉은 모래의 흔적을 찾게했다. 붉은 모래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있고, 늙은 중이 바위에 한가하게 앉아있었다.

왕이 그의 요사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천 명을 보내 죽이고자 했으나 그 중은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외니 수만의 신중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은 무서워 달아났다. 왕은 그가 이인임을 알고 궁궐로 맞아들여 국사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절 이름을 朱砂庵이라 했다 한다.

 

법당 영산전 편액에 "崇禎紀元後 五壬午仲春"이라는 글이 있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毅宗 때(1628~1644)의 연호다. 壬午년은 숭정 15년, 1642이다.

 

 

고려 명종 때 문인 金克己(1150?~1204?)는 언젠가 주사암에 왔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 

 

迢迢雲際寺 멀고 먼 구름가의 절

異境隔塵凡 특별한 지경이 티끌세상과 격리되었네.

鳥道彎靑漢 조도는 구불구불 푸른 하늘에 오르고

蜂臺駕碧巖 봉대는 푸른 바위에 걸쳐 있네.

 

地靈潛洞壑 땅의 정령은 골짜기를 감추었고

天籟颭筠杉 하늘바람은 대와 삼나무를 스쳐가네.

縱望襟懷曠 멀리 바라보니 가슴이 시원하여

飄如馬脫銜 말이 굴레를 벗은 듯하구나.

 

<동경잡기> 제2권 불우조

 

 

 

 

持麥石은 주사암터 바로 북쪽에 있는 100명 정도 쉴 수 있는 너럭바위이다. 마당바위라고도 한다.

신라의 명장 金庾信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김유신 장군이 병사들과 쉰 곳이라고 한다.

 

 

 

주사암에서 산길로 오르기 전 임도를 따라 150m쯤 내려가면 부산성 안내판이 나온다. 이 안내판 뒤 배추밭은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3. 부산성은 제32孝昭王(692~702 재위) 때의 향가인 <慕竹旨郞歌>와 관련된 곳으로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 2권 기이 제2 효소왕대 죽지랑 조에,

32대 효소왕 때 화랑 竹曼郞의 낭도 가운데 得烏 급간이 있어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날마다 나오고 있었는데 한번은 10일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죽지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어디 있는지 물으니 어머니는 幢典(部隊長) 益宣阿干이 내 아들을 倉直으로 보냈으므로 빨리 가느라고 미처 그대에게 인사도 못했습니다고 하였다. 죽지랑은 그대의 아들이 사사로이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公事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하고 떡 한 그릇과 술 한 병을 가지고 노복을 거느리고 찾아가니 낭의 무리 137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 득오가 어디 있는지 물으니 문지기는 지금 익선의 밭에서 부역하고 있습니다했다. 죽지랑은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했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려 했으나 익선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使吏 侃珍이 추화군(밀양) 능절의 30석을 거두어 싣고 성안으로 가고 있었다. 죽지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고집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주도록 함께 청했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진절 舍知(신라의 관들 13)의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花主(화랑도를 관장하는 관직)가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운 마음을 씻어 주려 하니 익선은 도망하여 숨어버렸다. 이에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때는 한겨울 몹시 추운 날인데 성안에 있는 못에서 목욕을 시키니 얼어붙어 죽었다.

효소왕이 그 말을 듣고 명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오른 자는 모조리 쫓아내어 다시는 관청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이미 중이 된 자도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간진의 자손은 秤定戶孫(당나라 제도에 마을의 사물을 관장하는 秤定戶라 했다. 손은 의 오자로 보이지만 확실하지 않다)을 삼아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는 해동의 고승이지만 모량리 사람이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하며 노래를 지었다.

 

간봄 그리매 모든 것이 울 이 시름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 주름살 지니려 합니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 뵙도록 (기회를) 지으리

낭이여,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구렁텅이에 잘 밤 있으리.

(박노준 해석)

 

향가 <모죽지랑가>는 죽지랑이란 화랑을 찬양하고 사모한 넉 줄짜리(8구체) 향가이다.

익선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진 것은 진평왕 말년이거나 선덕여왕 초년인 630년 전후이고 이 향가는 지은 효소왕(692~702) 때는 아마 죽지랑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죽지랑이 세상을 떠나자 추모하는 마음을 노래하면서 젊은 시절 고마웠던 일과 자기에게 베풀어 준 따뜻한 사랑을 생각하며 지은 것 같다.

앞 두줄은 지난 날 죽지랑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상하면서 지금은 늙고 무력한 낭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나타나 있고, 뒤의 두줄은 그러한 낭이지만 잠깐민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한 심경과 이렇게 낭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은 비록 다북쑥 우거진 구렁텅이와 같은 험난한 길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작자 득오는 죽지랑이 젊은 시절 현역 화랑일 때 밑에 있던 낭도였다.

득오는 자기 고장 모량리를 다스리는 익선에게 매여 창고지기를 하고 토지 경작도 해야 했는데, 죽지랑이 힘써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익선은 득오를 관습에 따라 지배하기만 했지만 죽지랑은 득오를 육친과 같이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득오는 원래 낮은 신분이었는데, 익선 징벌의 계기를 만든 공로로 6두품으로 승격했을 것이다. 나중에 17관등 중 9등급인 급간의 지위에 올랐다.

 

죽지랑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조에서 신문왕조에까지, 열전 김유신 조에 단편적으로 보인다.

그는 술종공의 아들로 신분이 진골이다. 술종공은 진덕왕 때 김유신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던 이다. 아버지 술종공이 미륵상을 세운 뒤 그 공덕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벼슬이 17관등 중 제2등인 이찬까지 올랐으며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높이 숭앙된 인물이다.

 

역시 <삼국유사> 2권 기이 제2 효소왕대 죽지랑 조에 죽지랑의 탄생설화가 있다.

진덕여왕 때 술종공이 朔州都督使가 되어 임지로 가는데 이 무렵 삼한에 병란이 있어 기병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일행이 竹旨嶺(지금의 죽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술종공이 이것을 보고 탄복하여 칭찬하니 거사도 공의 위의가 놀라운 것을 보고 좋게 여겨 서로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었다.

공이 고을의 임소에 부임한 지 한달이 지나서 꿈에 그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공의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곳 사람들이 거사는 죽은 지 며칠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죽은 날이 공이 꿈을 꾼 날이었다. 공은 필경 거사는 우리집에 태어날 것이다하고 군사를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미륵을 하나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놓았다.

공의 아내는 꿈을 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죽지라 했다. 죽지랑은 김유신과 더불어 3국을 통일하고 진덕여왕 때 집사부의 으뜸 벼슬인 中侍가 되어 왕정의 기밀을 관장한다. 28대 진덕왕(647~654), 무열, 문무, 31대 신문왕(681~691) 4대에 걸쳐 대신이 된 사람이다.

 

삼국통일 이후 화랑단의 세력은 자체 내의 붕괴와 왕실의 견제로 급격히 하락한다.

지난 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화랑도 예전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문관 위주의 사회를 지향하면서 왕년의 화랑 출신 제상과 그의 낭도가 대단치도 않는 문관 출신의 벼슬아치에게 수모를 당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죽지랑이 낭도 137명을 거느렸다는 것도 삼국통일 이전 한 화랑이 천 명 단위의 낭도를 거느린 것과 비교해 보면 화랑의 세력이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량리(경주시 건천읍) 사람들이 공동으로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은 중앙 정부 직속의 화랑도를 육성하면서 지방의 세력가를 억누르는 조처였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왕과 조정의 화주가 취한 일련의 처리도 화랑에 대한 우대가 아니라 죽지랑 사건을 빙자하여 부족사회 때부터 차등을 두어온 모량부 세력에 대한 감정적이고 고의적인 탄압으로 볼 수 있다.

 

북지리 출토 석조반가상(보물 제997)은 북지리의 구안동 속칭 소복골거리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1965년 북지리마애불의 하반부를 발굴하러 왔다가 이 일대를 뒤진 끝에 마애불에서 1km쯤 떨어진 남쪽 구릉에서 찾았다.

金泉寺터로 알려진 이곳에는 마을사람들이 거북바위라고 불러온 돌덩이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반가상이다.

허리 부분에서 잘려 위쪽 형상은 알 수 없다.

아래쪽의 모습은, 날씬한 허리에, 실제 비례보다 과장되어 시각적으로 든든한 느낌을 주는, 반가부좌를 한 무릎, 다소 도식화되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늘어진 치맛자락, 두 발은 없어졌지만 발받침의 연꽃의 정교함 등이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돌조각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거꾸로 된 모양의 옷주름은 삼국시대 후기 불상들과 유사성이 있어, 대체로 삼국통일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높이가 1,6m인 것으로 보아 전체의 높이는 2,5m 정토로 추정된다. 반가상으로는 가장 크다.

북지리의 마애불좌상 옆에 있던 것을 1966년 경북대학교로 옮겨다 놓았다.

최완수는 죽지랑의 아버지 술종공이 세웠다는 미륵불로 보고있다.

 

 

 

한국의 성숭배

1. 성숭배란 남녀 성기 및 성행위의 상징물을 숭배하고 신앙하는 믿음체계이다. 성숭배는 성적 쾌락과 더불어 생명 탄생을 수반하는 성교에 대한 경외감에서 비롯된다. 성숭배 의례에는 그 숭배의 대상에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성 상징물은 그 모습과 거기에 대한 그들의 기원을 이루기 위해 신성성을 부여하였고, 그로 인해 집단에 의해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다. 성숭배는 본디 한 집단사회를 원초적인 혼돈 상태로 회귀하게 하여 창조적 에너지를 분출하고 대립자 간의 화합을 꾀하는 성격을 지닌다. 나아가 사냥이나 동물의 풍요, 어로 채집 및 생물의 다수확과 가족원의 확대에 따른 농업 노동력의 확보, 안전, 소망 성취, 행운을 기원하는 의례적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성숭배는 후대에 와서 개별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다시 공동체 신앙으로 정착되면서 세시놀이와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성과 관련된 신앙이나 놀이, 의례가 다양하게 생겨났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공동체의 단합을 위하여 성을 표상해 주는 성기를 앞세워 여러 가지 의례를 발달시켰는데, 이는 집단적, 개인적 기원과 결부되면서 정형화되어 갔다.

그리고 풍수지리와 음양조화사상과 결합되었다.

 

2. 성숭배는 성기숭배와 성교숭배로 나눌 수 있다. 성기숭배는 성기가 상징하는 생식원리를, 성교숭배는 성행위가 상징하는 생식원리를 숭배하는 신앙이다.

성기숭배에는 남성기 숭배, 여성기 숭배, 남녀성기 숭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주로 여성 집단이 신앙했으며 여성의 놀이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2-1. 남성기 숭배는 남근을 인공으로 조각하여 세우거나 그와 비슷한 형태의 자연암석을 신체로 삼아 숭배한다. 立石에다 성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입석에 조각을 가미하여 남근과 비슷하게 만들고 여성기 형태의 암혈이나 암석과 마주하는 곳에 자연암석 형태로 세우기도 한다. 자지바위 · 좆바위 · 남근석 · 돛대바위 · 삿갓바위 · 총각바위 · 아들바위 · 말바위 · 장수바위 · 소좆바위 · 말좆바위 · 기자석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남성기 숭배는 남근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인류의 보편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근석은 마을의 풍기를 순화하고 음란을 막고 청춘남녀의 순조로운 결합을 돕는다고 믿는다. 또 기자나 풍년, 풍어, 자손만복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악신으로부터 자신과 마을을 지켜주기 바라고 제사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훼손이 금지되어 있다. 욕설이나, 방뇨, 손가락질, 등을 하지 않는다 

 

충청북도 제천시 동산 남근석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 남근석

 

2-2. 여성기 숭배는 여성기와 모양이 비슷한 지형이나 옹달샘, 여성기를 상징하는 암석을 신체로 상정하여 신앙하는 형태이다. 여성기는 여근암 · 성기바위 · 씹섭바위 · 공알바위 · 처녀바위 · 암탑 등으로 불린다. 여성기의 수태 능력, 생산성과 풍요, , 대지, 물의 상징 등으로 공동체 의례의 대상신으로 신봉하며, 제의를 베풀거나 모방 성행위를 통해 목적하는 바를 기원한다.

이와 달리 여성기 자체를 불길하게 생각하거나 부정시하여 금기시하기도 한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구룡리 당산나무와 입섟

 

 

 

제천 무도리 공알바위는 마을 입구 도로변에 있다. 지름 150cm의 타원형으로 된 바위가 움푹 패여 있고, 그 속에 지름 1m쯤 되는 달걀 모양의 바위가 볼록하게 솟아 있어 여성 성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주민들은 이 바위를 신체로 삼아 매년 음력 정월 초이틀 자정에 동제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과 풍요을 빈다. 길 건너 20m쯤 떨어진 논둑 밑에 불쑥 솟아오른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올라서서 돌 세 개를 던져 그중 하나가 공알바위 속으로 들어가면 첫 아들을 낳는다고 믿는다. 또 공알바위 구멍을 작대기로 쑤시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엄격하게 금한다.

 

 

제천시 무도리 공알바위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신포리마을 뒷산에 옹달샘이 있다. 이 옹달샘을 보지골이라 한다. 여기에 사람들이 나무 작대기로 장난을 하거나 짐승이 물을 마시면 마을 여자들이 미쳐서 가출한다는 속신이 전한다. 여기서는 나무도 하지 않는다.

 

2-3. 남녀성기숭배는 바위의 모습이 남녀 성기와 모양이 비슷하거나 남녀성기를 상징하는 암석을 신체삼아 신앙하는 형태이다. 암탑 · 수탑 · 음양돌 · 남녀암 · 동서미륵 등으로도 불린다. 사람들은 남녀성기 상징물을 신격화하고 부부상함, 음양의 조화를 기원한다.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 동오리 마당바위와 선돌

 

 

 

 

M. 엘리아데는 남녀석을 함께 모시는 것은 천지간의 성혼(hierogamy)을 모방하여 그때의 성스러운 엄숙성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 탄생을 모방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2-4. 성교숭배는 주로 강원도 해안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것으로 삼척의 해신당, 명주군 안인진리 해랑당에서 볼 수 있다. 처녀신에게 나무로 깎은 모형성기를 바쳐 죽은 해신을 위로하고 원혼을 달랜다.

 

 

해신당

 

 

성교숭배는 그 신앙적 측면이 약화되고 놀이의 측면이 강화되어 전통연희가 된다. 강강술래 놋다리밟기 월월이청청 등 여성 집단 놀이는 달과 여성기의 형상이 성적으로 형상화된 놀이이다. 줄다리기에서 암줄과 숫줄을 연결하는 것은 성교를 모의하는 놀이이며 탈춤 역시 풍농굿에서 기원한 것으로 성상징이나 모의 성행위가 나타난다. 이를 통해 성과 농경 간의 관련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놀이들은 생식력의 신비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이 지닌 생산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기우제에서 여성이 성기를 신에게 드러냄으로써 신에게 성을 공양하는 성격을 보인다. M. 엘리아데는 가뭄이 극심하면 여자들이 발가벗고 뛰어다님으로써 하늘의 생식력을 일깨워 비를 오게 한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성적 행위를 통해서 신을 모욕하여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 드러나 있다.

 

3. 청동기시대 암각화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숭배 신앙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3-1.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에는 대략 10여 명이 남근을 드러내고 있다. 반구대 그림의 왼쪽 맨 위에 세 마리 거북과 함께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서있는 인물은 두 팔을 올려 기도하거나 또는 무언가를 바치는 모습인데 양 가랑이 사이에 앞으로 성기가 뻗어있다. 고래잡이배들을 위쪽으로 배치한 것으로 보아 두 팔을 올린 인물은 고래를 많이 잡기를 기원하는 제사장을 겸한 부족장일 것이다. 거북의 머리는 전후 운동이 가능한 신축성과 머리의 생긴 모습으로 보아 남자성기의 상징이며, 움츠린 모습과 몸통은 여성기와 자궁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한국 고대 성기 숭배의 관념을 표현한 최초의 예일 것이다. 또 물고기, 산짐승들과 함께 성기를 노출한 인물들이 춤을 추거나 나팔을 부는 것으로 보아 수렵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반구대 암각화/ 피리 부는 남자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는 농사의 다수확, 동물, 고기잡이 등 생산과 다수확, 다산을 통한 가족 구성원의 증가, 가족원의 건강, 무병장수를 위한 기원에서 제의를 통한 신앙의례로 변천되었을 것이다.

 

3-2. 세계의 어느 원시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의 한반도에서 성기숭배는 다산 · 풍요 신앙의 중심이 되어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인간의 번식과 땅의 풍요로움이 동일시되어 농경의례에서 성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대전의 한 골동품상에서 발견된 방패모양의 농경문 청동의기는 그물 무늬로 양분되어 있다. 한쪽에는 발가벗은 몸으로 따비에 발을 얹고 밭을 가는 남자의 가랑이 사이로 남근이 나타나 있고, 다른 한 쪽에는 토기 항아리를 놓고 일하는 농부가 음각되어 있다. 대지의 여신, 지모신인 땅에 남근의 상징인 따비를 설정하고 남근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중의 상징성을 부각하여 곡물의 성장과 다수확을 기원하였다. 여기에는 남근은 생산에 활력을 준다는 생각이 드러나 있다. 둥근 고리가 달린 뒷면에는 큰 나무 가지 위에 새 두 마리가 앉아있는 솟대 모양의 문양이 있다. 위에는 6개 네모난 구멍이 한줄로 뚫려있어 제사장이 신분과 힘을 상징하는 패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농경무늬청동기

 

농경무늬청동기 실측도, 뒷면

 

 

 

또 농경문 청동의기에는 나경 문화의 유습을 나타나 있다. 이와 유사한 문화가 일본 신석기 유적, 남태평양, 미국 인디언 등에도 수확, 풍농 민속으로 남아있다.

관동 · 관북지방 화전민들에게는 예로부터 裸耕이 있었다.

정월대보름날 숫총각으로 성기가 큰 남자가 알몸으로 木牛나 토우를 몰고 밭을 갈며 풍년을 비는 민속이다. 땅은 풍요의 여신이요, 쟁기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산력을 지닌 대지 위에 남자의 성기를 노출시킴으로 풍성한 수확을 비는 것이다.

 

 

3-3. 신라시대 노 젓는 형상을 한 토우에는 큼직한 남근이 드러나 있다. 노를 젓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잡이에서의 만선, 해상에서의 안전, 저승길 안내, 죽은 자의 재생 및 부활, 자손의 창성을 기원하는 고대 유풍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북 부안의 용왕제의 띠배놀이, 전남 신안군 흑산도의 남근이 강조된 제웅 등에서 보는 것과 같다.

 

3-4. 신라시대 4~5C 고분의 부장품 토우에 성교 및 출산을 표현한 것들이 있다. 이들 토우에는 예술성과, 다산과 쾌락의 성이 함께 나타나 있다. 이것들이 생산력에 근거한 성기숭배사상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죽은 자의 저승에서의 부활과 성의 생산성, 자손의 번영, 성의 환희와 열정을 기원하는 의례적 행위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신라시대 토우들

 

 

안압지와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나무와 돌로 조각한 실물 크기의 남근상은 우물과 남근의 교합을 통한 물의 정화, 농사에 필요한 풍부한 물을 기원하는 당시인의 의식을 담은 것이다. 달리 여인의 성욕 충족을 위한 자위기구였음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자연 종교. 토착신앙의 하나로 된 성숭배는 삼국시대에는 자연암 제사, 옥문, 음경의 거대함이 지도자의 자격요건의 하나로 제시되고 거대한 음경과 옥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신성의 의무로 은유되어 전승되고 있다.

신라 제 22대 지증왕(500~514 재위), <삼국유사, 1>에 따르면 음경이 한 자 다섯 치(45cm)나 되었다. 마땅한 배필을 얻지 못해 사자를 삼도에 보내 배필을 구했다. 모량부의 어떤 나무 밑에서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똥 눈 사람을 찾아가보니 모량부상공의 딸이었다. 그녀는 키가 일곱 자 다섯 치(2m 25cm)나 되었다. 성기도 그만큼 클 것으로 생각하여 왕비로 삼았다.

 

3-5. 불교는 여근숭배와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초기불교에서 성은 의 원천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화된 대승불교는 이미 풍요신앙과 습합되어 있었다. 성숭배가 불교 신앙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특히 신라 중기 이후로 여성으로 인식됐던 관세음보살 신앙은 여성이 가진 생명력과 연결되어 있다. 원효 스님은 관음이 늘 머문다는 오늘날 낙산사로 가는 도중 관음보살의 화신인 한 여성이 생리 피가 묻은 옷을 빨고 있던 물을 더럽다고 하여 거절하자 그에게 아직도 아집이 남아 있다고 하여 관세음보살의 참모습을 만나볼 수 없었다. 아이를 달라는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나게 해주고, 눈이 먼 아이가 있으면 새 눈을 주었다는 관세음보살의 생명력의 상징은 여성의 성이다.

 

조일전쟁 후 승병의 공로를 인정해 국가적으로 불교를 후원한다. 사찰 중건, 경제력 성장에 따라 민간의 불사 참여가 확대된다.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등 별도의 예배공간이 성립된다. 사찰 입구에 장승, 남근석, 여근석 같은 성숭배 조형물이 들어서고, 경내의 특정 바위나 계곡 혹은 불교적 조형물에 성숭배 의미를 부여한다. 남근석을 비롯한 성숭배 조형물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 문화가 활성화된다. 그것이 불교와 결합한다. 민간에서는 선돌을 세우고 미륵으로 불렀고, 공동체 조형물로 민불을 세우기도 하였다.

 

3-6. 유교가 사회의 지도이념, 정치이념이 되면서 조선의 성문화는 종래의 개방적인 성 풍속을 억압된다. 성숭배는 감추어진 심층문화로 재생산되어, 오히려 조선의 성숭배 자료가 풍부하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각 지방마다 社稷神 숭배 의례가 행해졌다. ‘신은 토지신, ‘신은 곡신으로 사직신 숭배는 농경문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직신을 위한 제사에서 神物로 나무로 남근을 깎아 붉은 칠을 하고 푸른 글씨를 써서 바쳤다.

사직신 숭배와 관련하여 付根 습속이 나타난다. 부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종실록 13-중종 6(1511)> 조에 처음 보인다. 그러므로 부근당에서의 제사 풍습은 이미 그 전부터 행해온 것이었다.

부근신은 아름다운 여신이고 부근신에게 바치는 공물은 목제 남근이다. 부근제는 관사에서 관원들이 정기적으로 목제 남근을 바치는 의례행위였다. 해랑당에서처럼 남근을 깎아 여신에게 바쳤다. 그러므로 부근은 나무로 깎은 남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아에서 모시던 부군당은 민간의 성신앙인 부근신앙을 포섭하여 모신 것으로 부근이 府君이 되면서 관료화한 것이다. 부근당 제사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궁중이나 관사에서 벗어나 민간에서도 성행했다. 지금도 부군당이라는 당사가 각 지방에 많이 남아있다. 이것이 다시 민간화된 것이다.

성리학이 세력을 떨치면서 남근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여성이 부근신이 된.

 

 

府君堂 신앙

서울 경기 지방에는 府君堂 신앙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예로부터 남성기를 깎아 여신에게 바쳤던 곳이다. 이규경의 <五洲衍文長箋散稿>지금 서울의 陰詞 各司에 신사가 있어 付根堂이라 한다. 이것이 와전되어 府君堂이라 하기도 한다. 한번 제사에 드는 돈은 누백금에 이른다.”고 하였다.

<增補文獻備考>나라 풍속에 都下의 각 관부에 으레 작은 祠宇를 두고 여기에 종이돈을 총총이 걸어놓고 부군이라 하며 서로 모여서 난잡하게 제사를 지냈는데, 새로 임명된 관원은 반드시 정성들여 제사를 지낸다.” 서울 원효로 부군당의 주신은 송씨인데 부근은 송각씨가 실려있고, 사방 벽에 목경물을 달아 지나치게 陰褻하였다.”고 하였다.

 

이능화는 <조선무속고>에서 목경물은 宋氏姐를 위하여 만든 것으로서 부근의 명칭이 원래 목경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송씨저는 손각씨를 말하는 것 같으며, 세속에서 처녀가 시집 못가고 죽은 것을 손각씨라 하는데, ‘은 음이 서로 비슷한 까닭으로 동체이명으로 불리어지는 것 같다고 하고, 부군신에 대해서는 봉사하는 모든 부군당은 각각 신이 다르다. 예를 들면 형조의 부군은 송씨부인이고, 전옥의 부군은 동명왕이고, 기타는 제갈 무릉 문천상 등의 신이며, 고려 공민왕을 신봉하는 자도 많았는데, 이는 여말의 유민들이 각사의 아전이 되어 항상 구국의 왕을 생각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부군이란 지명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각 군마다 부군당이 있는데, 이 부군당의 신은 대개 守宰로서 임소에서 죽은 이가 많다. 이는 수재를 부군이라 칭한 까닭이다. 부군은 한나라의 태수를 칭한 것이다고 하였다. 부군에 대해서는 부군의 사당이 관사에 부속되어 그를 신봉하는 대상이 神君이었다.”고 하였다.

 

속리산 법주사에서는 매년 설날에 신자들이 자재송이라는 목제 남근을 산정 신당에 봉납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을 송이놀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보은현, 祠廟>조에, 따르면 대자재천왕사는 속리산 정상에 있다. 그 신은 매년 10월 범날[寅日]에 법주사에 내려오는데,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을 맞아다가 제사를 지낸다. 이 신은 45일 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한다. <조선무속고>에는 음력 섣달 그믐날이면 온 寺衆이 모여 제사를 행했는데, 목봉으로 양경의 형용을 만들고 거기에 붉은 칠을 하여 그것을 들고 춤을 추며 신을 위안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찰에 재난이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행하였으나 근년에 비로소 혁파되었다.”고 하였다.

 

여신에게 목제 남근을 비치는 풍습은 그 근원이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三國志-魏書, 烏丸鮮卑東夷傳 30> 조에,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 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이를 수혈이라 부른다. 10월에 나라에 대회가 있으며 수신을 국동에서 맞아들여 신좌에 木隧를 모시고 제를 지낸다.”라는 기록이 있다.

 

집안 國東大穴에는 바위 아래 큰 동굴이 있고, 굴 뒤편에 다시 굴이 있고 굴 한편이 하늘로 통한다 하여 통천교라 한다. 구름다리처럼 생긴 통천교를 통해 신이 내려와 제사를 받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국중대회에 앞서 10월에 왕실에서 여기에 와서 먼저 제를 올렸는데 굴 안에 신좌를 만들고 신을 모셔다 제를 지냈다. 木隧를 대혈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 신좌에 모신 횃대에 불을 댕겨 횃불을 켜고는 제례를 모신다. 양주동은 목제 남근, ‘수신은 남성신이라 보았다. 대혈을 여성으로 삼고 남성의 상징인 불을 들고 들어가 합방하여 대혈 안이 밝아지는 환희를 맞보는데 그것은 음양이 합방하여 생산을 한다는 뜻이다.

또 양주동은 삼한의 소도는 수터수컷의 터’, ‘立大木대목은 목제 남근의 상징물이라 했다.

 

3-7. 성리학이 지배하면서 가부장적 남아선호사상은 남근숭배를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하였다. 여인들은 절을 찾아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불공을 드렸다. 그러다가 마을 미륵을 섬김으로써 절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미륵이 마을로 들어와 남근과 결합한다. 민중들은 남근과 비슷한 바위마다 미륵바위란 이름을 붙인다. 아들 낳기를 원하는 이들은 미륵바위에 집단적 제의를 바쳤다. 신석기 후기부터 전국 각지에 세워진 선돌은 남근의 상징으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신앙, 마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미륵, 당산, 살맥이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자신앙의 핵심이 되었으며 공동체 신과 부녀자들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3-8. 바위구멍은 돌의 겉면에 파여진 구멍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혈, 알구멍이라고도 한다. 민속학에서는 알바위, 알구멍, 알터, 알뫼 등으로 부른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바위구멍은 대체로 고인돌이 널려있는 선사시대 유적지, 석탑이나 비석이 있는 역사시대 유적지, 그 밖에 산천이나 들판의 넓적한 자연암반에 새겨져 있다. 특히 각 지역의 명산 꼭대기 바위 위에 인위적으로 파여진 바위구멍이 많다. 또 선돌 솟대 돌탑 불상 신당 등 기존 신앙 대상물에도 나타난다.

 

이 구멍의 크기는 여성기만큼, 깊이는 남자의 성기만큼 판다고 한다. 바위구멍과 알의 관련은 아들 얻기와 풍농을 비는 주술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알은 불멸성 잠재력, 생명의 신비, 생식의 근원, 재생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남성의 정력을 왕성하게 하고 곡물의 풍성함을 빌고, 자손과 가축의 번식을 기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구멍 - - 곡물사이에 내재하는 주술적 관련성 때문이다. 여기에는 구멍 - 여성기 - 마찰 - 생산구멍 - - 곡식 - 생산이라는 모방주술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구멍은 여성기나 자궁을 상징하며 생산의 원천이었다.

아들을 비는 기자바위에는 반드시 나타난다. 바위구멍은 생산과 풍요를 비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아들을 얻는데 큰 효험이 있다고 믿어왔다.

 

울산시 강동면 어물리 알바위

 

 

 

고인돌 덮개돌에 새겨진 바위구멍은 일반적으로 풍요와 생산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바위구멍은 생산과 풍요를 비는 광범한 신앙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의미가 축소되고 다만 아들을 비는 단순한 신앙으로 되었을 것이다.

 

 

주술

James G. Frazer(1854~1942)<황금가지 1-(장병길 역, 삼성출판사, 45)>에서 주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주술은 인간 스스로 대상과 갖가지 힘을 조작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활동이며, 종교는 인간과 자연의 운행을 지시하고 통제한다고 믿는 전지전능한 힘을 융화하고 위무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주술의 기초가 되는 사고의 원리는 다음 두 가지라 했다.

유사는 유사를 낳는다.’ 말을 바꾸면 결과는 그것의 원인을 닮는다는 유사법칙이다. ‘유사법칙에 의해서 주술사는 단지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그가 바라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추리한다.’ 유사법칙에 기초한 주술은 동종주술(Homeoparthic magic), 모방주술(Imitative Magic) 또는 유감주술이라 했다.

한번 접촉한 것은 실제로 그 접촉이 떨어진 후에도 계속 서로 작용한다. 이것이 접촉법칙 또는 감염법칙이다. 접촉법칙에 의해서 주술사는 한번 어떤 사람에 접촉했던 물체에 대해서 행한 행위는 그 물체가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간에 그것과 똑같은 결과를 그 사람에게 가져다 둔다고 추리한다.’ 이것이 감염주술 또는 접촉주술(contagious magic)이다.

 

3-9. 성기신앙은 본디 생식과 재생의 의미가 강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남근의 상징물인 망주석과 연관되어 후손의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남근과 연결된 망주석은 고인이 저승에서의 부활하기를 염원하고 자손의 복과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4. 여성의 성적 특징은 출산을 통해 생산력을 제공하는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혼돈과 오염을 불러일으키고 남자들을 파괴시키는 위험한 힘의 근원으로 인식했다. 이의 배경에는 남성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생명 자체의 힘, 즉 출산이라는 신비한 힘이 자리잡고 있다. Mery Douglas<순수와 위험>에서 여성의 성적 특징이 남성들의 지배에 반발하는 여성의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위험하고 불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해석했다. 모호한 근거를 가지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력을 정당화하는 사회에서 여성에 의한 성적 오염을 믿는 신앙이 발전하기 쉽다는 것이다.

여성기에 접촉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간통, 바람, 근친상간, 풍기문란 등 반사회적 사건은 바로 성 특히 여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통제와 정화와 보호라는 장치를 만들게 된다. 따라서 여성기로부터의 회피 행위와 여성기와의 접촉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좋지 않는 사태를 미리 방지하려고 한 사고가 나타난다. 이 통제가 가부장적,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는 사회질서의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반사회적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 남성과 여성의 공동책임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사건을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성의 무질서는 규범적인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온전한 생산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그것을 규제해야 하지만 그것이 지닌 신앙적 본질마저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성숭배는 본디 생식과 재생의 의미가 강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풍수와 연결된다. 마을의 지형 때문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주로 비보 압승적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풍수지리적인 사고에서 남근석이 등장한다. 음기가 강하므로 그 음기를 누르기 위해 양의 상징인 남근석을 세운다. 이렇게 모신 남근석은 해이해진 공동체의 질서를 응축시키는 신성한 돌로 顯顯(kratophany)되고 그것을 통해 더럽혀진 사회를 정화시킨다. 아들을 낳게 해주고 여성의 바람기도 잠재우며 근친상간도 막아준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성숭배의식과는 다른 새로운 성숭배 의식이 배태된 것이다.

비보압승은 여성기의 지세를 남성기로 누르는 성격을 띠지만 이것은 음양의 조화를 통한 안정성과 풍요를 바라는 의식이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남성기와 여성기의 조화는 결국 풍수사상의 출발점인 음양의 화합인 것이다. 음양은 남녀 양성의 성행위 즉 성숭배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리하여 성숭배는 남성기가 상징하는 적극적인 생산력의 표상 쪽으로 그 대상이 이동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남성기에 대한 숭배가 남아를 출산할 수 있다는 의식과 맞물리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성기 보다는 남성기 위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이 남성보다 주변적 존재로 표현된다. 본디 인간 집단의 미래를 보장하는 번식을 어디까지나 여성의 성기가 좌우하기에 남근과 여근 사이의 차별은 없었다.

사찰에서도 환경에 대한 풍수적 형국의 인식과 해석에 따라 남성기를 세워 비보압승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한 책

김대성, 윤열수, 한국의 성석, 푸른숲, 1997.

박노자, 고대는 남근석의 나라, 한겨레 21, 20081222.

박노준, 향가, 열화당, 1991.

이종철, 한국의 성신앙, 민속원, 2003.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 지식산업사, 1989.

주강현,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한겨레신문사, 1997.

M. 엘리아데, 성과 속, 학민사, 1989.

M. 엘리아데, 종교사개론(이재실 역), 까치. 1993.

村山智順, 朝鮮鬼神(노성환 옮김), 민음사, 1990.
 

출처 :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
글쓴이 : 달마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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