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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4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이태영

테오리아2 2014. 1. 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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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다 / 이태영


소니가 앞뒤로 몸을 흔든다몸을 숙일 때마다 등의보호외국인이란 흰 글자가 형광등 불빛에 번쩍거렸다흔들림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하필 근무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기다니여자 보호실에는 그녀와 나 단 둘뿐이었다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위급한 일이 생기면 당직실로 연락하라고 이 반장은 말했었다소니가 요란하게 몸을 떨더니 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나는 당직실 내선 번호를 눌렀다신호음은 갔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시계를 보니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이 반장은 밤새 직원이 당직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라 했었는데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망연히 소니만 바라봤다소니는 비린내를 맡은 임산부처럼 헛구역질을 해댔다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소니가 말했다.

 

언니제발소니 물 줘.”

 

소니의 일그러진 입가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어눌한 소니의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다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소니도 영문을 모른 채 나를 따라 웃었다.

 

보호소를 안내해주던 이 반장은 말했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소니한테 물어보라고저래 보여도 사무소에서만큼은 나보다 선임이니깐.”

 

이 반장은 소니를 가리키면서도 내 쪽을 흘끔거렸다철장 안의 소니보다 나를 더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살아오며 항상 마주쳐야 했던 눈빛이었기에 새삼스럽진 않았지만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라면 많은 혼혈을 봤을 텐데마치 외국인을 처음 본 사람처럼 계속해서 곁눈으로 슬그머니 흘겨봤다아마도 같이 일하는 사람 중 혼혈은 처음인 것 같았다나는 이 반장이 가리키고 있는 소니를 쳐다봤다내 옅은 커피색 피부보다 소니의 피부는 희었다소니의 피부는 한국인들이 살색이라 부르는 옅은 귤색에 가까웠다.

 

나는 종이컵에 물을 따르려 했다그 모습을 본 소니가 언니하며 나를 불렀다그녀는 한 아름 크기의 원을 손으로 그렸다나는 그녀의 뜻을 이해했지만 왜 그렇게 많은 물이 필요한지 이해되지 않았다소니가 다시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가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왔다대야 한가득 담긴 물을 본 소니는 구역질을 멈췄다소니는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리고는 한참 동안 수면 위를 내려다봤다.‘후훕 후훕소니의 날숨과 들숨소리가 보호실에 울려 퍼졌다한참을 내려다보던 소니가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대야에 담갔다넘쳐난 물이 바닥을 적셨다정수리까지 잠기자 찰랑대며 흘러넘쳤던 물결이 잠잠해졌다소니의 숨소리가 사라지자 보호소는 파도가 멈춘 바닷가처럼 고요해졌다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얕은 내 숨소리뿐이었다소니의 앞머리가 흘러내렸다수면 위로 소금쟁이 발자국 같은 작은 물결이 일렁였다얼마나 지난 걸까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고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소니는 미동조차 않았다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마음이 초조해졌다철창을 열려는데 소니가 대야에서 고개를 들었다물방울들이 그녀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졌다소니가 소매로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소니 땅 멀미했다이젠 괜찮다.”

 

땅 멀미배를 오래 탄 선원들이 뭍에 올라오면 멀미를 한다고 하던데그걸 말하는 건가소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같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도 온전히 자기 뜻을 전달하지 못하는데하물며 소니는 지금 외국어를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쇠창살에 기대앉은 소니가 말했다.

 

소니는 바다에 살았다땅에 안 디뎠다.”

 

물방울이 소니의 이마에서 볼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다채 마르지 않은 물방울의 궤적을 따라 형광등 불빛이 반사됐다소니가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치며 말했다.

 

소니 여러 여름 전바다 떠났다.”

 

그녀는 땅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그러나 올라선 땅은 흔들렸다바다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울렁거림을 겪어야 했다바다를 떠나야 했던 이유를 그녀가 설명했지만 어눌한 발음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땅을 찾아 헤맸다그렇게 한국까지 흘러들어왔다하지만 이곳도 마찬가지였다공장에서도쪽방에서도화장실에서도 매 순간 속은 메슥거렸다나는 며칠 전 봤었던 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바다에서 생활하는 소수종족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바다 집시라 불리는 그들은 육지에 올라오면 오히려 멀미를 느낀다고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온난화와 주변 국가의 압력 때문에 땅에 정착해야만 했다그들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를 떠올렸다아버지는 엄마가 동생을 낳다 죽었다고 했다나는 엄마의 얼굴도목소리도 심지어 그녀의 국적조차도 알지 못했다그저 내 피부색을 보며 다큐멘터리에 나온 저들처럼 바다와 강렬한 해가 있는 지역 출신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그러고 보니 소니의 피부색은 그들이나 나보다 옅었다.

 

지하층 계단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등이 나간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집주인은 갈아주지 않고 있었다흐릿한 빛에 의지해 현관문을 열었다안은 말라버린 우물 속처럼 컴컴했다벽을 더듬자 콘크리트의 냉기가 손끝에 스며들었다스위치를 찾지 못한 나는 어둠 속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채 몇 걸음 떼지도 못한 채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무릎과 정강이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찔끔 오줌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퀴퀴한 지린내가 밀려왔다나는 팬티를 갈아입을 생각도 않은 채 그대로 침대까지 기어가 누웠다첫 밤샘근무였고 한밤중에 소동까지피로에 찌든 몸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다얼마나 잔 걸까알 수 없었다방은 여전히 어두웠다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눈가를 만졌다다행히 손끝에 느껴지는 물기는 없었다언제부턴가 나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채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발견했다처음에는 눈에 무슨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그러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꿈을 꾸며 눈물을 흘린다는 걸무슨 꿈인지는 알지 못했다마치 교통사고 후의 기억상실증처럼 꿈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대신 깨어날 때마다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허기가 엄습해왔다더듬거리며 일어나 방에 불을 켰다시계를 보니 벌써 한밤중이었다통증처럼 허기가 밀려왔다라면 두 개를 끓였다밥까지 말아 먹고 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다 먹고 난 냄비를 싱크대에 놓았다수도꼭지를 틀자 빈 냄비 속으로 물이 쏟아졌다냄비 속 옅어진 갈색 국물이 거품을 내며 소용돌이쳤다밥풀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다 넘쳐나는 물을 따라 개수대로 흘러갔다땅멀미를 한다는 소니의 얼굴이 떠올랐다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멀미할 때처럼 속이 울렁였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동생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나는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울렁임은 더욱 심해졌다배를 채우면 이 메스꺼움이 좀 가라앉지 않을까찬장에서 감자칩을 꺼내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키듯이 넘겼지만 메스꺼움은 쉬이 달래지지 않았다.

 

보호실 철문이 열리고 이 반장과 함께 한 남자가 들어왔다남자는 이런 곳이 처음인지 창살 안을 힐끔힐끔 쳐다봤다어린이 팔뚝만 한 쇠봉이 한 뼘 간격으로 세워진 창살 안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여자 외국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다그녀들은 마루 형식으로 된 바닥에 국적별로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소니만이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은 채 구석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사무소 직원이 아닌 듯 남자는 관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검은색 쟈켓에 베이지색 면바지그리고 특징 없는 인상은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십대 아저씨의 모습이었다이 반장이 소니를 조사실로 호출했다남자는 조사실로 들어갔다둘은 삼십 분 정도 조사실에 있었다가끔 소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평소와는 다른 웃음이었다끈적끈적하니 교태가 묻어있는 웃음이었다조사실에서 나온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어그러뜨렸다황당하다는 웃음 같기도싱겁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남자와는 다르게 뒤따라 나오는 소니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남자는 이 반장에게 짧게 말을 전한 후 돌아갔다나는 이 반장에게 다가갔다저분은 누구예요라는 내 물음에 이 반장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비밀이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순순히 돌아갔다내 태도에 이 반장은 당황한 듯싶었다쩝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더니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소니가 진짜 이름일까?”

 

나는 그제야 이 반장이 비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는 걸 눈치챘다나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최대한 지어보려 노력했다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잘 직시하지 못했다나의 피부색을 처음 본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표정이 굳는다그리고는 바로 꼬인 가방끈을 고쳐 매듯 낯을 바꾼다마치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어떤 반감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그냥 본능적인 반응이다그러나 그 표정을 본 나로서는 더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이 반장은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말했다.

 

당연히 진짜 이름 아니지소니 들어봤잖아워크맨 만드는 전자회사

 

작년 겨울한 베트남인이 여고생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이 사건은 십분 정도 모 포털 사이트 검색어 톱을 차지했다첫눈이 오기 전날 대대적인 불법 체류 외국인 단속이 벌어졌다그날 밤 노래방을 덮친 경찰은 손님의 노래에 맞춰 탬버린을 치고 있는 소니를 붙잡았다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녀는 첫눈을 맞으며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넘겨졌다그녀의 지문과 일치하는 한국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출입국 관리 사무소로 넘겨진 불법 체류 외국인들은 사무소 내에 있는 보호실에 임시로 수감된다제일 먼저 그들의 국적을 확인하는데 가끔 추방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국적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소니는 아예 한국어를 모르는 척했다여러 언어의 통역사들이 말을 걸어봤지만그녀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모르는 척 연기를 했을지 모르겠지만그녀가 협조하지 않는 한 그녀의 모국어가 무엇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굉장히 난감해했다직원들은 소니의 소지품을 확인했다수거된 소지품에서 신원의 단서를 찾아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생각보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품에 지니고 다닌다신분증부터 휴대폰수첩메모 등그러나 그녀의 소지품이라고는‘SQNY’라고 로고가 박힌 짝퉁 휴대용 라디오뿐이었다나중에 그녀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은 발각되었지만그녀의 국적은 밝혀지지 않았다그녀는 절대 신원의 실마리가 될 이야기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그해 겨울 마지막 눈이 녹았지만여전히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심문에 잘 대답하다가도 신분이 노출될 만한 질문이 들어오면 입을 다물거나 딴소리를 해댔다.

 

그 엉뚱한 말들 때문이었을까심문했던 직원들 중 몇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결국그녀는 정신병원에 보내져 검사를 받아야 했다그뿐만 아니라 각국 대사관에 그녀의 사진이 포함된 협조문도 보내졌다미친 것은 아니라는 의사의 소견과 자기네 국민이 아니라는 답변만이 돌아왔다몇몇 국가는 아예 회신조차 하지 않았다원칙적으로 출입국 관리 사무소의 보호실은 외국인 보호소로 이송되기 전하루나 이틀 정도 임시 수용되는 곳이었다하지만 골치 아플 것을 눈치챈 외국인 보호소는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버렸다이름이 없으니 불편함을 느낀 직원 하나가 그녀를 소니라 부르기 시작했다그녀도 그 이름이 맘에 들었는지 자신을 소니라 소개했다이야기를 듣던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근무 첫날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이 반장에게 했다소니가 바다에서 왔다는 내 말에 이 반장은 껄껄대며 웃었다.

 

소니는 신입이 오면 꼭 한 번씩 골탕을 먹이더라고내가 말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해그냥 맘 편하게 신고식이었다고 생각하도록 해.”

 

이 반장은 은근히 흐뭇해하는 눈치였다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이 반장은 말했다.

 

나도 올 초 여기 사무소로 발령받아 왔을 때 감쪽같이 속았다고소니가 자기는 동생한테 이름을 빼앗겼다는 거야.”

 

소니는 자신이 일 가구 일 자녀 정책을 펴는 중국에서 태어났다고이 반장에게 말했었다소니의 아버지는 아들을 원했다첫아이가 소니이자 벌금을 낼 형편이 못 됐던 그녀의 아버지는 앞으로 태어날 남동생을 위해 그녀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그녀에겐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대신 미리 지어 놨던 남자 이름남동생에게 주어질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하지만 그마저도 곧 태어난 남동생이 가져가 버렸다그녀는 이름도 없고 서류상으로도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소니의 비밀을 알게 된 이 반장은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런데 다 거짓말이었어중국대사관에 동생 이름을 문의해 봤더니 그런 자는 없다는 거야.”

 

소니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이상하게도 먹먹해진 내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내 안의 무언가가 건드려진 것 같았다나는 만난 적 없는 엄마와 기억나지 않는 꿈을 떠올렸다.

 

아마도 소니는 여기서 두 번째 겨울은 나지 못할 것 같아.”

 

이 반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나 보다내 반응에 이 반장은 신이 났는지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아직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윗분들이 그녀를 풀어주려 한다고 했다어차피 더는 그녀의 신원을 알아낼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가둬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그러자 혹시 간첩이 아닐까 누군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 새롭게 부각되었다방금 전 소니를 조사했던 남자는 이를 규명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남자가 지었던 표정으로 봐서 그녀는 간첩이 아닌 게 분명했다창살 사이로 소니를 바라봤다분명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그녀는 시치미를 뚝 떼고 티브이만 바라보고 있었다두터운 쌍꺼풀에 불거진 광대뼈두꺼운 입술 위로 큼지막하게 자리한 뭉툭한 코아무리 뜯어 봐도 어디 사람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속으로 삼키듯 소니를 발음해 봤다.‘SONY’라는 글자를 전 세계 사람 모두 소니라고 발음한다는 기사를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똥별 같은 느낌을 주는 소니라는 어감은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최소화한다고 했다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그녀와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비록 ‘SQNY’라 적힌 그녀의 라디오는 짝퉁이지만.

 

핸드폰 벨소리에 눈을 떴다팔을 뻗어 보려 했지만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야간근무를 시작한 후부터 낮에는 앓는 사람처럼 곯아떨어져 버렸다벨소리는 곧 끊어졌다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동생에게서 부재중 전화와 함께 문자가 와 있었다. ‘어머니 제사 때는 집에 올 거지?’ 동생의 문자를 다 읽은 나는 그대로 이불 위로 쓰러졌다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며 꿈을 기억해 내려 노력했다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의 추억처럼 꿈은 기억나지 않았다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냉장고 문을 열자 어제 먹다 남긴 치킨이 보였다차가운 치킨을 데우지도 않고 먹기 시작했다살코기는 푸석댔고 닭 껍질은 질겼다차가울 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그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기계적으로 씹을 뿐이었다접시 위의 치킨은 모두 없어졌지만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온전한 것을 찾아 수북이 쌓인 닭 뼈 사이를 뒤적였다손에 닭 목이 걸려 올라왔다튀김가루가 다 떨어져 앙상해진 닭 목을 통째로 씹었다. ‘빠드득’ 입안에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손가락을 입속에 집어넣었다어금니가 심하게 흔들렸다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입 밖으로 삐죽거리며 새어 나왔다엄마의 제사는 연극 같았다나는 엄마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아버지에게서 도망친 엄마는 불법 체류 외국인이 되어 아직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엄마를 만나고 싶었다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나를 낳았는지왜 고향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는지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지만 나는 엄마를 찾지 않았다대신 단속에 걸린 불법체류 외국인들이 보호실로 들어올 때마다엄마 또래의 외국인들을 유심히 살폈다그러나 나는 엄마의 얼굴을 모른다.

 

마치 쏘기 직전의 활처럼 소니와 나이지리아 여자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어제 들어온 금발의 우즈베키스탄 아가씨는 커다란 눈망울로 둘의 눈치만 살폈다나는 슬며시 수화기를 들어 이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나이지리아 여자는 들어온 지 일주일이 넘었다벌써 외국인 보호소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난민신청 문제로 이송이 지연되고 있었다소니는 그동안 보호실의 터줏대감처럼 행동했었다워낙 오래 있었고 기가 셌기 때문에 처음 들어온 외국인들은 그녀에게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나이지리아 여자는 자신의 덩치를 믿고 그녀를 무시했다아슬아슬했던 둘 사이가 결국 터지려 하고 있었다나이지리아 여자가 소니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금이 그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소니의 영역은 티브이 맞은편 창가 아래였다사람들은 아무리 보호실이 붐벼도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고 직원들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다른 수감자들과는 달리 소니는 너무나 편안한 얼굴로 그곳에서 티브이를 보거나 낮잠을 청했다소니가 나이지리아 여자에게 먼저 주먹을 날렸다소니의 주먹이 정확히 나이지리아 여자의 얼굴을 때렸지만나이지리아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도리어 나이지리아 여자가 성큼 달려들어 소니의 머리채를 잡아챘다검은 표범을 연상시키는 그녀는 보통의 남자보다 몸무게도 더 나갔으며 몸도 더 우람했다작은 키에 마른 편인 소니는 금방이라도 찢길 듯 위태로워 보였다나이지리아 여자는 소니의 머리를 흔들어 대며 괴성을 질러댔다그 기세에 우즈베키스탄 아가씨는 구석으로 도망쳤고 철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나도 멈칫했다아직 이 반장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잠깐 망설였지만 뭉치로 뽑혀 휘날리는 소니의 머리카락을 보자큰일 나겠다 싶었다무작정 안으로 뛰어들어 나이지리아 여자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나이지리아 여자가 파리를 쫓듯 팔을 휘젓자 나는 그대로 날아 엉덩방아를 찧었다그 틈에 소니는 나이지리아 여자의 팔을 깨물었다나이지리아 여자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소니의 머리카락을 잡아끌었다얼마나 세게 당기는지 소니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고 눈초리는 찢어질 듯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하지만 소니는 나이지리아 여자의 팔을 두 손으로 꽉 쥐고는 놓아주지 않는다흰자위로 금이 가듯 붉은 실핏줄이 섬뜩하게 번져 갔다이 반장이 도착했을 때 나이지리아 여자는 제발 놓아 달라며 울고 있었다나와 이 반장우즈베키스탄 아가씨가 달려들어 겨우 소니를 떼어 놓을 수 있었다소니의 입은 거품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나이지리아 여자의 팔뚝은 처참하게 살점이 뜯겨 있었다소니는 분이 안 풀리는지 몇 번이고 이를 드러내며 나이지리아 여자에게 달려들었다보고를 받은 김 실장이 달려왔다나이지리아 여자는 병원으로 이송됐고 김 실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소니를 한참 동안 노려봤다.

 

다음 날 아침퇴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반장이 들어왔다.

 

같이 병원 좀 가줘야겠는데.”

 

이 반장은 소니와 나를 차에 태우고 인근 정신병원으로 향했다어제 싸움을 보고 김 실장이 특별 지시를 내린 모양이었다여자 수감자가 외출할 때는 반드시 여직원이 동행해야 했다소니는 차창 밖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오랜만의 외출이어선지 살짝 들뜬 것처럼 보였다이른 아침인데도 병원 대기실에는 사람이 많았다여러 번 왔었는지 이 반장은 간호사와 아는 척을 했다대기 순번을 보니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접수를 마친 이 반장은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펴들었다느긋한 그의 모습을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지금쯤이면 거의 집에 도착했을 시간인데당장 쓰러질 것같이 피곤했다핸드폰 벨소리가 고요한 대기실에 울렸다이 반장이 황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갔다간호사들만 이리저리 바삐 움직일 뿐 대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사람들은 멍하니 티브이만 들여다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한참이 지났는데도 밖으로 나간 이 반장은 돌아오지 않았다들어올 때만 해도 어스레했었는데 어느새 대기실은 햇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슬슬 데워지기 시작한 볕은 커피 잔의 온기처럼 따스했다머리가 무거워지며 눈꺼풀이 스르륵 감겨 왔다고개를 흔들어 봤지만 집요하게 따라 붙는 졸음을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슬쩍 소니를 쳐다봤다소니도 대기실의 다른 이들처럼 아침드라마에 넋을 놓고 있었다열중했는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도 신경 쓰지 않았다나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이 스르륵 풀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사막에 있었다작은 모래 구릉들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었다나 이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제일 높아 보이는 모래 구릉으로 올라갔다주변을 살펴봤지만예상대로 모래벌판 외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소리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질척이는 모래 속에서 한참을 달렸지만소리의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기진맥진해진 나는 멈춰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남자의 목소리여자의 목소리격양된 노인의 언성과 가는 아이의 음성사투리도 들려왔고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도 있었다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무력감에 빠져 주저앉는데 저 멀리 누군가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히잡 같은 스카프를 머리에 둘렀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그녀를 쫓았지만그녀와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오히려 조금씩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나는 두려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여보세요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제발 알려주세요.’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그리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그녀가 바로 엄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눈을 떠 보니 간호사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손을 들어 눈가로 가져갔다축축한 물기가 만져졌다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간호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환자분 어디 가셨어요진료실로 들어오시라는데.”

 

옆을 보니 소니가 앉아 있어야 할 의자가 비어 있었다뒤통수가 서늘해지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주위를 둘러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기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대신 뒷줄에 새로 온 이들이 보였다화장실로 달려가 봤지만소니는 없었다사람들에게 소니를 봤는지 물어봤지만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다리에 힘이 풀리며 목이 탁 막혀 왔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이 반장이 들어왔다나는 울상을 지으며 소니가 사라졌다고 말했다자초지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내 이야기를 들은 이 반장이 밖으로 뛰쳐나갔다나도 이 반장을 쫓아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이 반장의 모습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소니는 어디로 간 걸까소니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뿐어디로 갔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수많은 목소리와 거리의 소음들이 한꺼번에 귀로 파고들었다나는 손가락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그런 내 모습이 이상했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은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봤다문득 스쳐 가는 한 여자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자의 옆모습은 소니와 닮아 보였다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안경을 쓴 여자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돌아봤다소니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여자에게 사과한 후 무턱대고 앞으로 걸어갔다정류장이 보였다버스가 멈춰 서자 소니와 닮은 여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나는 누구를 쫓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가방을 멘 여자를 따라갔다한참을 쫓는데 여자가 핸드폰을 꺼냈다이번에도 소니가 아니었다여자의 한국말은 너무나도 유창했다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이 반장에게 전화를 해봤지만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출입국 관리 사무소로 돌아갈까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택시를 잡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데 옅은 커피색 피부의 손등이 보였다보호소 철장 안에 이런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은 많았다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도망쳐 나온 게 내가 아닐까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거리를 가득 메운 간판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일그러진 간판의 글자들은 처음 보는 외국어처럼 낯설었다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지금 여기 이곳의 내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나는 그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빈 석상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그렇게 얼마나 있었던 걸까핸드폰이 울렸다이 반장에게 온 전화였다그는 소니를 찾았으니 집으로 퇴근하라 했다.

 

소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침한 표정으로 자신의 영역에 앉아 있었다그런 그녀를 보는 내 기분은 가을비처럼 오락가락했다도망친 것에 대해 화가 나기도 했고 돌아와 준 것에 대해 고맙기도 했다소니는 도망친 지 네 시간여 만에 자기 발로 사무실에 돌아왔다직원들은 그녀가 어디를 갔다 온 건지 몸이 달 정도로 궁금해했다하지만 소니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았다며칠 후 이 반장이 비디오테이프를 가져왔다병원 근처 지하철역의 개찰구와 그 앞 대합실을 찍은 CCTV 영상이었다하단의 숫자는 소니가 도망친 날의 아침을 가리키고 있었다화면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졌다이 반장이 저기다저기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화면 끝에서 소니가 걸어오고 있었다시간을 보니 아홉 시 삼십 분이었다병원에서 역까지는 걸어서 십분 정도 거리였다내가 졸자마자 도망친 게 분명했다그녀는 대합실에 설치된 의자에 앉았다그리고 멍하니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하단의 숫자가 열두 시를 넘었지만여전히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눈길을 보내지도 않았다이 반장이 비아냥거렸다.

 

돈이 없으니 아무 데도 못 가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내가 아는 소니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사람을 속여서라도 갈 사람이었다이 반장은 의심스러운 장면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며 한 번 더 비디오를 틀었다사람들은 빠르게 화면을 스쳐 지나갔고 의자에 앉은 소니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반장과 나는 어떤 징계도 받지 않았다오히려 소니의 도주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갈까 봐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그 사건 이후에도 소니는 예전과 다름없이 행동했다새로 들어온 외국인들에게 텃세를 부렸고 자신의 영역에 누워 드라마를 봤다그렇게 소니가 또다시 겨울을 보호소에서 날 줄 알았다하지만 첫눈 예보가 있던 날 소니의 석방이 통보되었다그 소식을 들은 소니는 거품을 물고 뒤로 나자빠졌다그래도 통하지 않자 자신의 몸에 자해를 했다결국소니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하지만 윗사람들은 단호했다그런 소동을 부렸음에도 다음 날로 석방이 미뤄졌을 뿐이었다새로 온 소장은 골치 아픈 문제를 빨리 치우고 싶어 했다이 반장은 병원에서 돌아온 소니를 잘 감시하라고 신신당부했다첫날처럼 보호실에는 나와 소니 둘만이 남았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다른 수감자들은 일찌감치 외국인 보호소로 보내 버렸다취침시간이 지났는데도 소니는 자리에 눕지 않았다불을 끌 엄두가 나지 않았다대답을 바라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톤으로 소니가 말했다.

 

소니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지하철역을 말하는 건가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소니가 말했다.

 

사람들은 걸을 때 참 무서운 얼굴을 한다그런 얼굴로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소니는 고개를 돌려 나의 눈을 바라봤다소니의 눈동자는 마치 갓난아기의 눈처럼 샛말갰다.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흰 얼룩 같은 눈송이가 쌓이고 있었다어제 내릴 거라던 첫눈은 오늘 아침에야 내리기 시작했다파도처럼 밀려오는 인파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소니는 예정대로 오늘 아침 석방되었다아침 일찍부터 불법체류 외국인들이 이송되어 왔기 때문에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소니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기분이 이상했다소니는 어디로 간 걸까마치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거리에는 눈이 쌓여 가고 있었다나는 소니의 발자국을 찾으려 했다하지만 벌써 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에 의해 어지럽혀 있었다무작정 소니의 흔적이라 짐작되는 발자국을 따라갔다눈바람이 날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발자국들은 뭉개졌다나는 발자국을 놓쳤다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역 앞이었다나는 역으로 들어갔다출근하는 사람들로 역은 붐볐다부딪히지 않게 나는 어깨를 움츠려야 했다그때왠지 낯이 익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도망친 소니가 앉았던 지하철역의 의자였다나는 그 의자로 가 앉았다소니의 말대로 사람들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빠르게 내 앞을 지나쳐 갔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나는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그러나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지우개로 지워지듯 오고 가는 사람들은 점점 옅어져 갔다결국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져 버렸고 역에는 나 홀로 남게 되었다그러나 소리들은 그대로였다사람들의 말소리와 주변 소음은 오히려 증폭되어 귓전을 때렸다전차가 진입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전차는 A시 공단역으로 갈 것이다엄마는 A시 공단역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나는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때 전화벨이 울렸다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아버지에게서 온 전화였다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소니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당선소감] 길을 믿는 인간만이 앞으로 걸어갑니다


호주의 자연보호구역을 방문한 세 명의 천체물리학자는 자신들이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학회 참석차 한국일본덴마크에서 온 그들은 초거대 블랙홀에 관해 토론하다 그만 투어버스를 놓친 것이었습니다그들은 천체를 육안으로 관측해 서쪽을 찾으려 했습니다하지만 그들은 다시 서로의 주장을 가지고 싸워야 했습니다남반구에서 해가 어느 쪽으로 뜨는지하늘에 떠 있는 희멀건 것이 달인지 해인지에 대해잡지에서 읽은 기사입니다사 년 전저는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오른쪽으로만 도는 변기의 물이 너무나 익숙했듯이 아무런 의심도 없었던 삶이었습니다글을 쓰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하지만 회사를 나오며 동료들에게 소설을 쓸 거라 말하지 못했습니다바른길을 찾았다는 믿음이 모자랐던 걸까요세 명의 천체물리학자들이 운 좋게 지역 담당자에게 발견되어 아웃백에서 구조되었듯 저도 여러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소설을 공부하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아마도 아내가 없었다면 절대 이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혜란아 사랑해지도해 주신 박상우 선생님과 소행성 문우들 감사합니다용성구환정대씨이승재 부장님 감사합니다글만 쓰겠다는 졸렬한 의지로 그동안 지인들과 친구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그리고 모자란 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길이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그것을 믿는 인간만이 앞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저는 연약한 인간입니다끊임없이 저 자신에 대해 의심합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1977년 강원도 원주 출생 아주대 기계공학과 졸업 전직 삼성전자




[심사평] 단편소설의 정석·잘 짜인 구성미 갖춰


신춘문예 당선작을 고를 때 심사위원들은 여러 가지 기준을 다각적으로 고려하게 된다그 가운데에서도 세 가지 요건을 생각한다무릇 소설은 문장이 좋거나의식이 날카롭거나감수성이 뛰어나야 한다예심을 거쳐 모두 열세 편의 소설이 올라왔다생각보다 많았다. ‘건선주의보’, ‘나의 사랑하는 압제자’, ‘그림자놀이’, ‘출국장’, ‘킬러 팬케이크’, ‘주성치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플라밍고’, ‘무게 증후군’, ‘이누이트의 책장’, ‘당신을 응원합니다’, ‘바람’, ‘길을 잃다’, ‘벚꽃나무 아래서’, ‘폭염’ 등이다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것새로운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감수성 면에서 충분치 않은 것 등을 제외해 나가니 다섯 편 정도가 남았다. ‘벚꽃나무 아래서는 감수성이 신선하고 새롭다순수함이 느껴진다다만 결말 처리 부분에서 모범생이 되었다문장도 아직 아마추어리즘 기운이 다분하다하지만 의식이나 감수성에서 앞날이 기대된다.

 

길을 잃다는 단편소설의 정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쓴 소설이고잘 짜인 구성미를 갖추고 있다특히 관찰자 여성 화자인 의 어머니 역시 이주 여성이라는 설정에서 주제가 예각화되었다국적성과 개체의 삶의 관련성을 심문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무게증후군은 일종의 변신담이다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그런데 이 변신의 내적 논리가 충분히 주어지지 못했다사건 처리가 비교적 단순한데이는 이 작품의 교정퇴고가 불완전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마음의 여유를 더 가지고 착상을 더 탄탄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폭염은 문장이 간결하고도 운치가 있으며 구성도 잘 짜여 있다무엇보다 실감을 자아내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여성 인물의 내적 심리나 그 정염의 발동을 이만큼 여실하게 그려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이런 유형의 소설에 사회성이 있느니 없느니 한다면그것이야말로 철 지난 얘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주성치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플라밍고는 활달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있다매력이 있다다만 구성이 치밀치 못한 느낌을 주고문장에서도 아직 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길을 잃다와 폭염을 놓고 고심했다둘 다 특장이 있다사회를 보는 눈도 있고 구성미도 있다결국 길을 잃다에 기울었다. ‘폭염을 선택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느낀다이주민 문제를 다루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간 길을 잃다의 작가에게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드린다. ‘폭염의 작가에게는 실망치 말고 정진할 것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 성석제, 방민호)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해동공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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