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평사리 문학대상 수필당선작
섬진강(하동)
강 명 자
골짜기마다 두 갈래 세 갈래 물길이 한 몸으로 합수하여 모여드는 전설 같은 섬진강을 따라 하동에 들어서면 소꿉처럼 아기자기하게 들어앉은 마을마다 재첩국 끓는 냄새로 먼저 넉넉한 인심을 풀어놓는다.
하얀 모래톱과 오밀조밀하게 펼쳐진 산의 능선과 송림들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 있다. 섬진강에서도 하동의 은모래를 빼 놓고는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말 할 수 없다. 산과 들을 지나 모든 길이 드나드는 저 강가 도닥도닥 고운 낯빛으로 서로 부비고 부벼 은모래로 부서지는 오묘함, 물결 위로 트인 하늘이 유난히 곱다. 나는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이세상의 가장 순결한 곳으로 들어왔음을 느꼈다. 송림과 강물, 모래의 흰색이 어우러진 하동, 그 어느 선비가 이보다 더 고결할까.
강물 굽이를 돌아 나온 놀란 물 새떼 안개를 강가로 몰며 한 마리씩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강기슭에서 은은히 피어올라 산과 산 사이를 까마득히 잠겨 놓은 안개가 제 몸을 비틀어 짜내 띄워 놓은 저 무지개 속엔 어른어른 물그림자가 비친다. 강물은 푸르다. 저 푸름이 온 산에 가득 안개를 씌우는 걸까. 물 밑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풀빛을 섞어 향기를 쏟아 낸다. 눈에 감겨오는 푸른 강줄기를 몸에 두르고 물안개에 싸여 돌아오는 새벽 골짝 능선으로 흐느적 흐느적 누가 올라와 정적을 모래 무덤에 묻어놓고 바위 모퉁이를 돌아 뒤척이는 모래밭에 고요한 평상심으로 일정한 보폭을 옮기며 발자국 찍고 있다. 으깨진 조개껍데기가 맨발을 찌른다.
비린 물 내음 강물을 보면 어떤 물살은 빠르고 어떤 물살은 느리다. 또 어떤 물살은 크고 어떤 물살은 작다. 어떤 물살은 더 차고 어떤 물살은 덜 차고 어떤 물줄기는 바닥으로만 흐르고 어떤 물줄기는 위로만 흐른다. 또 어떤 물줄기는 한복판으로만 흐르는데 어떤 물줄기는 조심조심 갓만 찾아 흐른다. 뒷 것이 앞 것을 지르기도 하고 앞 것이 우정 뒤로 처지기도 한다.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되기도 하고 다시 갈라져 따로따로 제 길을 가기도 한다. 때로 산골짝을 흘러온 계곡물을 받아 스스로 큰물이 되어 다리 밑도 지나고 쇠전 싸전도 지난다. 산과 들판을 지나고 바위와 돌 틈을 어렵사리 돌기도 한다. 흔들림 없는 중심을 두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저 물길의 파동, 제 속을 채웠다 비우는 모래들, 굴곡 속으로 삶을 풀어가는 물살처럼 청청한 출렁임에 몸을 가라앉힌 인고의 모습들 해질 무렵 물 위로 난 길들이 돌아올 길 버리고 조용조용 서로의 아픔 다독인다.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어느 때이던가. 한 사람과의 만남이 둘이 걷는 길로 만들어지던 그 잔잔한 떨림을 받은 것은 처음 하동에서였다. 혼자서 흐르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며 흘러가리라 생각했었다. 지금 내 곁에 선 한 사람이 이제서야 겨울나무처럼 담백하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강물의 깊이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로를 주장하지도 다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 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처럼 사람의 마음도 하나로 스며들어 한 생의 바다에 조용히 당도하리라 생각해본다.
사람이 사는 일도 이와 같으니 나는 온갖 삶 모두 끌어안고 다시 올 수 없는 먼 곳까지 가서 그 줄기찬 아우성으로 섬진강 물길이 되어 살아 있음을, 살아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들이 내 안의 나이테마다 스미어 안으로 흐르고 밖으로 밀리는 물살이고 싶다.
다 늦은 저녁 답에 강물 위로 툭, 하고 조바심처럼 돌을 들어 힘차게 던졌다. 물결 살점이 불끈 고통처럼 치솟는다. 어디선가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정물화 한 폭이 불현듯 사라진다. 그 빈자리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이 오랫동안 출렁거렸다. 우연이듯 강물 속으로 구부러진 강가의 나무 가지 사이로 이따금 물살 치는 소리가 홀로 깊어지는 풍경소리로 들렸다.
깊고 넓은 강물 끌어안고 바다로 가는 이 장엄한 흐름, 어디서 이 크나큰 생명은 맥박 쳐 오는 것일까. 강은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남았던가. 우리네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오늘도 강물은 바다를 향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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