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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59 -이성복

테오리아2 2015. 12. 9.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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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

                                이성복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성기(性器)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 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여름의

                                         이성복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

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

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났습니다.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결국 언어는 밀가루에 불과하다. 물론 좋은 밀가루는 좋은 빵의 선결조건이다. 그러나 빵의 맛은 밀가루보다는 밀가루를 다루는 사람의 장인정신과 재료를 다루는 기술, 물과 불과 발효를 이해하는 데서 기인한다.  언어가 좋은 시를 만드는 재료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느 잘난 시인도 언어(기호)가 아닌 것으로는 시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역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럼에도 왜 그들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는 그 맛이 달라지는가. 

  이성복은 독특한 비유체를 통해 한 문장 안에 서로 방향이 다른 문맥들을 잇대어 놓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연 사람이다. 그런 의미를 좀 과하게 확장한다면, 그는 어느 미래파보다 미래파다운 사람이다. 그와 미래파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언어가 아닌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인식에 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왜 나는 당시의 이성복에 미쳐 있었는가. 왜 나는 이런 생각을 앓 수 없지? 나는 지금도 이성복을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친다. 자, 그의 싯구 중에서 내가 모르는 말은?  여러분들도 자신에게 되물어보실 것을 권한다. 난 왜 저들의 관점과 다르게 아름다울 수 없을까. 그게 되물으려면 '꿈에 나를 다녀간 여자'는 왜 깨어있는 지금까지도 내 내부를 서성이는지 깨달아야 가능해진다. 앞의 문장의 자체에는 답이 없으니 버리시라. 당신의 생각, 당신의 꿈과 현실과 그 간섭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흔들고 영향을 주는가를 아는 게 우선이다.

  지구 저쪽의 나비짓이 여기에 이르러 폭퐁이 된다고?  천만에! 그 먼 물동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다. 시뮬라르크!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청개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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