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사랑
- 이문열
봄은 눈뜸과 피어남과 움직임의 계절이다.
또 봄은 떠나는 사람, 떠돌고 헤매는 이의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해 가을 늦게 산속 깊은 곳 사냥꾼들이나 심마니 혹은 이런 저런 까닭으로 숨어 사는 이들이 얽었다가 버리고 간 오두막에 늙고 지친 몸을 뉘었던 시인에게도 그랬다.
아늑한 골짜기의 덤불 속에서 작은 깃을 오그리고 있던 멧새처럼, 어두운 바위굴에서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그 오두막에 헤어진 삿갓과 나날이 무거워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쉬던 시인도 봄이 오자 나날이 무거워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시인도 봄이 오자 긴 잠과 같은 멈춤에서, 스산한 그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을 스멀스멀 간질여 오는 듯한 봄기운에 끌리어 시인이 오두막을 나서 보니 먼 산자락까지 두텁게 쌓여 있던 눈은 봉우리 끝으로 밀려가고, 겨우내 얼어붙어 잇던 계곡에는 눈 녹은 물이 졸졸 소리내어 흘렀다.
내려다보이는 들판은 기분 좋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양지 바른 둔턱을 덮고 있는 참꽃의 꽃망울은 어느 새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시인은 그날로 괴나리봇짐을 꾸려 오두막을 나섰다. 이 세상에서의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예감이 그 봄의 시인을 바쁘게 내몰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 봄의 날들이 시인에게는 아름답게 불타다가 스러져 가는 노을처럼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사이 시인은 더욱 늙어 있었다. 쓰고 들려주던 시를 떠나 스스로 시가 되고 시를 사는 동안에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자연의 일부인 그의 몸도 그 세월을 따라 시들어 갔다.
이제 시인은 솔밭에 서면 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늙은 소나무 같았고, 바위언덕을 오르면 바위 중에서도 가장 오래 풍상을 겪어 푸슬푸슬하고 이끼 낀 바위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시 자연의 일부인 시인의 마음은 봄과 함께 새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삭아 가는 굴참나무 가지에서 새 움이 돋듯이, 늙은 곰이 묵은 털을 벗듯이, 또는 아직은 메마른 산봉우리 위로 힘차게 피어오르는 봄구름처럼.
자연과 인간 사이를 넘나들며 걷는 동안에 봄은 점점 짙어 갔다. 들풀들이 파릇한 싹을 틔워 내고 산꽃들도 하나 둘 망울을 터뜨렸다. 들짐승도 산새들도 짝짓기를 위해 저마다의 소리와 빛과 내음으로 짝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인이 어느 이름 모를 영마루에서 발 아래 골짜기의 작은 마을을 저만치 굽어보고 있을 무렵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마을의 복숭아나무는 불타는 구름 같은 복사꽃을 둘러쓰고, 하얀 배꽃들은 4월에 때아닌 눈비를 뿌려 댔다.
마침 한나절이라 몇 줄기 점심 때는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마을의 초가집들이 그림같이 모여 있는 언덕 발치에는 차고 맑은 물이 한 줄기 쪽빛 띠처럼 감아돌고 있었다.
일생을 떠돌며 이 땅 구석구석에서 흔하게 보아왔지만 그 봄따라 시인에게는 그런 정경들이 너무 정겹고 아름다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시인은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으로 한동안 그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문득 그런 시인의 두 눈에 찔려오듯 들어오는 정경이 하나 있었다. 마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호젓한 골짜기 어귀의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네였다.
시인의 시들어 가는 몸 어디에 깃들여 있던 의식의 느닷없는 작용이었을까. 그걸 보자 근년 들어 침침해 오던 시인의 눈은 갑자기 높이 든 소리개의 눈처럼 밝고 맑아졌다.
그 눈에 의지해 보니 처음 시인이 그저 산지기의 아낙쯤으로 여겼던 여인네는 나이 든 아낙이 아니라 스물이 차지 않은 처녀였다. 아직 너무 멀어 생김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맑은 개울가에 앉아 빨래를 하는 그녀의 자태는 그 골짜기 근처에도 지천으로 피어 있는 그 어떤 봄꽃보다 화사하였다.
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그 처녀가 있는 골짜기의 개울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름다움은 시인이 일생을 허비하며 추구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었다.
젊은 날 스스로 읊은 적도 있듯이 긴 세월을 그렇게 신산스레 떠돌면서도 시인이 아름다움을 그대로 지나쳐 간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젊은 여인네가 주는 감동은 늙음과 더불어 조금씩 시들해 갔는데, 그날따라 젊었던 그 어느 날보다 다 강렬하고 신선한 감동이 되어 시인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 처녀는 마을 끝 산지기네의 외딸이었다. 가난하고 지체 낮아 혼기를 넘겨 가고 있던 그녀는 그날도 알 수 없는 그리움과 기다림에 몰려 빨래를 핑계로 집을 나왔다.
아버지는 호미와 낫을 벼리러 오십 리 밖 장터로 나가고 어머니는 산속으로 나물하러 가고 없어 집에는 늙은 할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봄은 그녀의 가슴에도 와 있었다. 집 앞에서 화안하던 복사꽃 돌배꽃으로부터 골짜기의 참꽃 산수유꽃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물가에 오니 맑은 물을 따라 분분히 떠내려 오는 갖가지 빛깔의 꽃잎들 또한 그녀의 가슴을 할퀴어 댔다.
그런 그녀에게 시인은 진작부터 눈에 띄었다.
멀리 대처로 넘어가는 길목 영마루에 시인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녀의 젊고 밝은 눈은 쉽게 시인의 형용을 알아보았다.
나이보다 훨씬 늙고 시든 나그네가 일찍 길을 떠났구나!
무심한 눈길의 그녀에게는 그렇게만 보였다.
그런데 그 나그네가 자기를 향해 다가오자 그녀는 느낌이 달라졌다.
빤히 보이기는 해도 이리로 접어들면 십 리는 갈 길을 돌게 되는데, 무슨 일일까?
재만 넘으면 주막이 있고 우리에게는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
그러면서 살피는 사이에 다가오는 나그네의 모습은 점점 변해갔다.
기이하게도 그녀가 먼저 느낀 것은 멀리서부터 쏘아 오는 그 나그네의 눈빛이었다.
나이는 들어도 눈빛만은 맑고 힘차구나.
이어 그의 걸음걸이가 처음의 생각에 의심이 들게 했다.
보기보다 젊은 분인지 몰라, 걸음걸이가 힘차고 가뿐한 게 마치 산등성이를 차고 오르는 수노루 같구나.
그러는 사이에도 나그네는 빠르게 다가왔고 처녀는 점차 혼란되어 갔다.
내가 잘못 보았어, 그렇게 나이 든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아랫배미 위토의 주인인 그 문중 새서방님이 한식 성묘라도 오신 것일까. 아냐, 저것 보아. 저렇게 얼굴이 환하고 근골이 번듯한 게 아직 미혼의 도령님 같애. 서울에 과거라도 보러 가시는 것일까. 가다가 신들메라도 끊어진 걸까.
그러다가 저만치 그 나그네가 다가왔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다가온 사람은 열두엇 소녀 때부터 밤마다 꿈꾸어 오던 그리운 낭군의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추레한 차림에 까닭 모르게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때쯤은 시인도 제정신이 돌아왔다. 취한 듯 흘린 듯 오기는 왔지만 막상 호젓한 골짜기 물가에 낯선 처녀와 마주치게 되자 겸연쩍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내 그 겸연쩍음은 새로운 감동으로 지워졌다. 말 못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여기 피어 있다…….
시인은 취한 듯 어린 듯 그녀 앞에 멈춰 서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녀의 얼굴은 점점 붉어져 그대로 화려한 꽃송이가 수그리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색깔이 주는 감동이 시인의 야릇한 열정을 건드렸다.
저 아름다움과 함께 하고 싶다. 하나이고 싶다…….
그러나 그 열정은 오래 전에 벗어난 독점이나 소유의 욕망과는 멀었다.
나비는 꽃을 소유하지 않는다. 꽃도 나비가 자기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산지기 처녀에게도 비슷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자연의 일부로 환원된 그녀의 영혼은 그녀의 의식에 덧칠된 인간의 모든 상념을 벗어나 시인과 똑같은 소망을 품게 했다.
저 종류가 다른 아름다움과 어떻게든 하나가 되고 싶다. 함께 조화를 이루고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피어나고 싶다.
시인이 가만히 팔을 벌렸다. 이제 그와 하나가 된 시가 눈부신 빛처럼 그의 온몸에서 쏟아져 나와 처녀를 일으켰다.
처녀는 끌린 듯 시인에게로 다가가 그 품에 안기고, 시인은 그녀를 부축해 가까운 산수유꽃 그늘로 데려갔다.
둘레에는 찔레와 인동덩굴이 담처럼 우거져 바람을 막아 지난 가을의 낙엽이 아직 푹신한 요처럼 덮여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낙엽들 위에 취한 듯 쓰러졌다. 그리고…… 무한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구름이 잘생긴 봉우리를 휘감았다 가고, 꽃사슴 한 쌍이 부끄러움 없이 어울렸다 나뉘어 갔다. 바람이 무심히 후박가지를 흔들어 그 향기를 흩어 놓고,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함께 흐르다 다시 갈라졌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죄없는 만남과 헤어짐이 거기 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시인이었다. 시인은 언제 벗었는지도 모르게 널려 있는 남루를 찾아 조용히 걸쳤다.
봄볕은 아직도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으나 바람은 열정이 식은 그의 늙은 몸이 견뎌 내기에는 아직 쌀쌀하였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을 채운 것은 젊은 날 그토록 자주 그를 서글프게 하던 환락 뒤의 적막과는 달랐다. 세상 아름다움 중에서도 가장 큰 아름다움에 흠뻑 젖었다가 깨어나는 이의 나른함과 포만감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처녀도 일어나 그때껏 햇볕 아래 드러나 있던 속살을 무명베로 감추었다. 물에 씻긴 조약돌이 부끄럼 없이 그 자태를 햇볕아래 드러내듯, 자작나무가 그 희디흰 줄기를 무심히 바람에 맡기듯, 그때껏 시인에게 맡기고 있던 속살이었다.
처녀가 처음 그 산수유 아래로 들 때처럼 온몸을 단단히 여미고 일어났을 때, 어느새 채비를 마친 시인은 그림자처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언뜻 그럴 때를 위해 말이 있고 몸짓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멀어지는 시인을 그냥 보냈다. 소리치거나 움직이면 허망하게 깨어 버릴 쉬운 꿈속에 있는 느낌 때문이었다.
처녀가 다시 빨래터로 돌아간 것은 뒤 한번 돌아봄이 없이 멀어지던 시인의 뒷모습이 마침내 영마루 너머로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차가운 계곡 물에 다시 손을 담갔을 때야 비로소 깨어난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를 잠시 되새겨 보았다.
화안하고 고운 봄꿈을 한바탕 꾸었다는 막연한 느낌뿐,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안하고 고운 봄꿈을 한바탕 꾸었다는 막연한 느낌뿐.
재너머 내리막길을 늙은 시인이 숨을 헐떡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팽팽하게 부풀었다 꺼진 욕망의 자리처럼 그의 살갗에는 전보다 한층 골 깊은 주름이 덮이고, 불 꺼진 재처럼 기력은 전보다 훨씬 쇠잔해 걸음마저 비틀거렸다.
방금 그가 지나온 것은 여인과 나눈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이었지만, 기억을 거부하는 그의 의식에 남은 것은 그윽한 골짜기에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는 한 떨기 나리꽃의 영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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