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
목사·수필가
하나는 하나 이상이다.
입안에 작고 하얀 구멍이 생겼다. 결코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피곤하다싶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달갑지 않은 불청객. 혀의 표면에 생긴 궤양으로, 설염 또는 혓바늘이라고 한다. 며칠이 지나 사그라질 때도 되었건만, 이번은 호락호락하게 물러날 것 같지 않다. 꾀나 깊게 뿌리를 내렸는지 통증은 매섭고 끈질기다. 이가 닿든지, 음식물이 스치기라도 한다면 아리고 쓰리다. 특히, 입 안이 바짝 건조된 상태에서의 접촉한 상처와 피부가 떨어질 때면 온 몸에 쭈뼛한 통증이 바늘같이 일어난다. 오죽했으면 바늘로 찌르는 아픔이라고 했겠는가.
하루 왼 종일을 상처에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다. 점점 세력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는 게릴라성 공격에 진이 쭉 빠진 저녁 무렵, 사지가 으스스 떨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겨우 포도씨만 한 녀석의 반란에 온몸은 무너지고 만 것이다.
아내가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던 적이 있었다. 저절로 싱싱 돌아가는 줄 알았던 집안 일, 그게 아니었다. 집안 꼴이 마치 폭탄 맞은 듯했다. 아내의 빈자리, 엄마의 빈자리가 생긴 것이다. 그 자리를 매워야 한다는 위기감이라도 느낀 것인지 식구들은 말하지 않아도 제 역할들을 하기 시작했다. 딸은 집안 청소와 설거지, 나는 요리담당이었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고3인 아들에게서 일어났다. 자기가 벗은 양말을 고이 펴서 세탁기로 가져간다. 그리고는 한마디 던진다. “우리 집에 구멍 생겼다.”
우리가 속한 어느 공동체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한 사람의 자리에 구멍이 생기면 전체가 마비된다. 마치 배와 같다. 항해하는 배에 작은 구멍하나가 생겨 그것을 막지 못하면 거대한 덩치는 침몰한다. 그렇다면, 작은 것은 작은 것이 아닌 것이다. 가정이든 사회든, 한 사람은 전체에 비해 작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생명 있는 한 사람은 전체에 연결된 유기체로서의 하나다. 하나가 아프면 전체가 아파야 건강한 공동체다.
손이 입더러 일은 안 하고 밥만 축내고 사사건건 잔소리만 한다고 입을 막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먹지 못해 죽고 만다. 입을 막아버린 손의 운명도 끝난다. 또, 발가락이 구태여 다섯 개일 필요가 없어보여서 하나를 잘라버리면 어떻게 될까. 몸에 균형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몸에는 쓸모없는 곳이 없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꼭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불멸한 힘에 의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으며, 땅에서 꽃 한 송이만 꺾어도 하늘에서는 별 하나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친다’고 영국의 작가 프랜시스 톰슨은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감흥이 만든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염연한 실제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것 하나라지만 하늘과 연결되어 있으면 티끌만한 것 하나라도 결코 전체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무가치한 것은 없는 듯하다. 작은 것이 반드시 위대하지는 않아도 하찮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우리 주변에는 하찮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하찮은 마음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아름다운 마음은 작은 것을 사랑해본 가슴만이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 작은 하나는 하나 이상이다. 곧 전체의 일부다.
거울 앞에 서서 혀를 낼름 내밀어 보았다. 하얀 구멍위에 선홍빛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상처는 어제보다 작아진 듯하다. 지난 일주일간 불꽃처럼 타올라 내 삶을 장악하고 이제 서야 퇴각을 하려나보다. 찌푸려졌던 표정이 절로 펴지고, 잠시 사라졌던 미소를 되찾았다. 온몸이 개운해졌다. 그동안 먹지 못했던 얼큰한 국밥 한 그릇 생각난다.
요 작은 것에서 큰 깨달음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때로는 삶이 밋밋해질 때, 이런 밉지 않는 불청객하나가 불쑥 찾아와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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